참고자료 41
괴트봐이어가쎄와
슈티프트 괴트봐이거(Stift Göttweiger) - 괴트봐이거 수도원
괴트봐이그 수도원교회의 정면
괴트봐이거 수도원은 베네딕트 수도회에 속한 수도원이다. 괴트봐이거수도원은 도나우 남쪽 남부 오스트리아의 크렘스(Krems) 부근 푸르트(Furth)의 산정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괴트봐이거 일대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에는 강, 뒤에는 언덕이어서 주거지역으로서 적당했던 것이다. 이곳의 언덕 위에 처음으로 교회가 들어선 것은 1072년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파싸우(Passau)의 주교인 알트만(Altmann)이 수도승들과 함께 건물을 지었다고 되어 있다. 그후 1083년에 교회의 옆에 수도원을 건축하여 남부오스트리아 여러 지역으로부터 수도승들을 받아 들였다. 1904년에는 울리히 1세 주교가 수도원을 베네딕트 수도회에 속하도록 조치했다. 15세기에 들어서서 수도원교회의 성단소가 완성되었으며 이밖에 납골당과 부속건물들도 차츰 완성되었다. 1715년 터키의 침공으로 수도원은 파괴되었다. 1718년 고트프리트 베쎌(Gottfried Bessel)이 수도원장일 때에 수도원을 완전히 개축하는 공사가 착수되었다. 당대의 거장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Johann Lucas von Hildebrandt)가 설계를 맡았다. 1750년 수도원은 완공되었다. 수도원교회의 정면도 새롭게 건축되었다. 베쎌 수도원장은 훌륭한 역사학자 겸 외교관으로서 나중에는 비엔나대학교 총장까지 지냈다.
괴트봐이그 산정에 자리 잡은 괴트봐이그 수도원의 위용
괴트봐이그 수도원은 요셉 2세의 개혁정책으로 오히려 활성화되었다. 요셉 2세 황제는 괴트봐이그 수도원 출신의 인물들이 계몽주의의 실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맡아 할것으로 믿어 1783년 성직자의 수를 대폭 증원해 주었다. 과연! 요셉 2세의 예견대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중요한 시기에 괴트봐이그 출신들은 민중의 계몽을 위해 많은 활약을 했으니 잠시 몇 사람의 이름을 거명해 보면 프리드리히 블룸버거(Friedrich Blumberger: 역사학자), 람베르트 카르너(Lambert Karner: 고위 성직자), 레오폴드 하커(Leopold Hacker: 곤충학자), 빌리발트 레브(Willibald Leeb: 민속학자), 베네딕트 키쓸링(Benedikt Kissling: 식물학자), 아달베르트 푹스(Adalbert Fuchs: 역사학자) 등이다. 2차 대전중에 괴트봐이그 수도원은 전쟁포로수용소로 이용되었다. 산정에 있기 때문에 포로들의 탈출이 용이치 않았다. 1943년부터 1945년 초까지는 국가정치교육기관으로 사용되었다. 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러시아군이 점령하여 수비대로 사용하였다. 괴트봐이그가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것은 1947년이었다.
괴트봐이그 수도원교회 천정의 프레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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