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39
글룩가께와
작곡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Christoph Willibald Gluck)
칼스키르헤 옆에 있는 글룩 기념상
글룩가쎄는 비엔나에서 활동하다가 세상을 떠난 위대한 작곡가 크리스도프 빌리발트 폰 글룩을 기념하여 붙인 거리이름이다. 오페라 ‘오르페오와 유리디체’로 유명한 글룩은 1714년 7월 2일 바바리아의 베르힝(Berching)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으며 1787년 11월 15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글룩의 성장과정과 작곡가로서의 데뷔과정, 그리고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의 활동에 대하여는 장황하게 설명할 여지가 없으므로 비엔나에서의 활동에만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글룩은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비엔나를 몇 번 왕래하였으나 파리에서 피치니와의 유명한 ‘글룩-피치니 전쟁’을 마친후 조용하게 살고 싶어서 비엔나를 찾아와 이번에는 아예 정착했다. 더구나 궁정 카펠마이스터(지휘자)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정착을 결심했던것 같다. 그때가 1750년대 초반이었다. 그는 1754년 비엔나축제를 위해 Le Cinesi(시네시)를 작곡했으며 이듬해에는 나중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레오폴드 2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La Danza(라 단짜)를 작곡했다. 한편, 1756년 2월 로마에서 그의 오페라 Antigone(안티고네)가 공연되자 이를 본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너무나 감격하여 글룩에서 ‘황금박차기사’의 작위를 하사하였다. 그로부터 글룩은 Ritter von Gluck(리터 폰 글룩) 또는 프랑스 스타일로 Chevalier de Gluck(슈발레에 드 글룩)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했다.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유리디체'의 한 장면
글룩은 비엔나에 정착한 이후 그동안 미루어 놓았던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아를 고찰하는 Opera Comiques(오페라 코미크)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인 1761년, 글룩은 현대 발레의 기초가 되는 유명한 발레곡 Don Juan(돈 후안)을 안무가인 갸스파로 안지올리니(Gasparo Angiolini)와 협동하여 완성했다. 글룩은 ‘오페라 코미크’를 집필하면서 오페라 개혁에 대한 구상을 마쳤다. 글룩은 오래전부터 오페라의 형식과 내용에 대하여 기본적인 고민을 해왔다.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두 장르인 오페라 부파와 오페라 세리아가 진정한 오페라의 길에서 크게 벗어나서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오페라 세리아의 아리아는 지나치게 인위적이며 오페라의 내용도 진부한 것이어서 흥미를 주지 못하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아리아는 부르는 사람이 제멋대로 장식을 붙이거나 변경해서 부르는 바람에 오리지널 멜로디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수 없게 했다. 오페라 부파의 경우에는 원래의 신선함이 상실된지 오래이며 조크라는 것도 마치 누더기처럼 내용이 빈약하고 등장인물들도 똑 같은 사람들이어서 판에 박은 듯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글룩은 오페라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 드라마와 열정에 초점을 둔 것이어야 하며 대사나 음악이 모두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글룩은 비엔나에서 같은 의견을 가진 몇몇 사람들을 만났다. 궁정극장장으로 프랑스 무대음악에 대하여 열광하고 있는 자코모 두라쪼(Giacomo Durazzo) 백작, 대본가로서 메타스타시오 스타일의 오페라 세리아가 판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라니에리 데 칼자비기(Ranieri de' Calzabigi), 개혁적인 안무가인 갸스파로 안지올리니, 런던에서 훈련을 받은 카스트라토 게타노 과다니(Gaetano Guadagni)등이었다. 글룩의 발레곡 Don Juan(돈 후안)은 그의 개혁적인 생각을 처음으로 표현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1762년에 발표한 Orfeo ed Euridice(오르페오와 유리디체)는 글룩의 개혁오페라을 대표하는 작품이었다. ‘오르페오와 유리디체’의 대본은 칼자비기가 맡았으며 안무는 안지올리니가 맡았고 주역은 카스트라토인 과다니가 맡았다. 글룩은 주인공인 스타보다는 드라마가 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무미건조한 레시타티브(Recitative secco)는 되도록 배제하였다. 레시타티보 세코는 콘티누오에 의해서만 반주하는 레시타티브를 말한다. 콘티누오는 화성은 변하지만 저음은 일정한 연주 스타일을 말한다.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한 드라마 스타일은 훗날 바그너의 악극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이었다. 글룩과 칼자비기는 ‘오르페’에 이서 Alceste(알세츠트: 1767), Paride ed Elena(파리스와 헬렌: 1770)에서도 함께 일하면서 그들의 개혁적인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켰다. 글룩의 기념상은 칼스키르헤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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