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57 마르코 다비아노(Marco d'Aviano)

정준극 2009. 8. 8. 21:56

참고자료 57

 

마르코 다비아노 가쎄와

카푸친수도회의 마르코 다비아노(Marco d'Aviano)

 

마르코 다비아노(1631-1699)는 베니스공국의 아비아노에서 태어난 카푸친(Capuchin) 성직자인 다비아노의 원래 이름은 카를로 도메니코 크리스토포리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믿음의 선조들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순교와 신앙의 승리에 대하여 깊은 감동을 받고 언젠가는 자기도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그는 16세 때에 베니스 공국의 병사들이 오토만 터키군과 싸우고 있는 크레테 섬으로 가서 이교도들과의 전투에 참가코자 했다. 크레테로 가는 도중에 그는 어떤 카푸친 수도원에 들르게 되었다. 수도원장은 그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해주며 어린 나이에 전쟁터로 가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하였다. 다비아노는 하루 밤을 카푸친 수도원에서 보내면서 수도승들의 간절한 신앙생활을 보고 카푸친 수도원으로 인도하셨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었다. 그는 일단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에 정식으로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승이 될 것을 서약하였다. 수도원은 그에게 마르코 다비아노라는 이름을 주었다. 몇해 후인 1664년 그는 마침내 베니스를 비롯하여 이탈리아의 다른 곳에서도 설교할수 있는 권한을 위임 받았다. 그로부터 다비아노의 생활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부활절과 유월절에 교회와 수도원을 순방하며 설교를 하여 듣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그러다가 1676년, 그는 45세 때에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 다비아노가 13년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어떤 수녀에게 축복을 내려주자 놀랍게도 그 수녀는 병고침을 받았던 것이다. 기적의 축복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병자들이 그의 축복을 받고자 몰려왔다. 많은 사람들의 그의 설교를 듣고자 했다. 그중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레오폴드 1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레오폴드 1세는 다비아노를 비엔나로 초청하여 그에게 믿음의 인도자가 되어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로부터 다비아노는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레오폴드 1세를 도우며 그를 신앙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아하게 되었고 아울러 정치, 경제, 군사, 종교의 여러 부분에서 황제를 자문하였다. 교황 인노센트 11세는 다비아노를 사도 눈치오(Nuncio)로 임명하고 또한 교황청 특사로 임명하였다.

 

다비아노는 1863년 터키군이 비엔나를 공성하였을 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신성동맹에 참여한 오스트리아군, 폴란드군, 베니스공국군, 그리고 교황청 군사들을 진지로 방문하고 그들에게 하늘의 뜻을 수행하라는 감격적인 설교를 하고 축복을 내려 주었다. 폴란드군을 이끈 얀 조비에스키 3세는 비엔나의 교외인 칼렌버그에서 다비아노의 축복을 받고 터키군을 급습하여 놀라운 전과를 이룩하였다. 전투가 시작될 때에 다비아노는 모든 장병들이 비장한 각오로 집합하여 있는 중에 십자가를 높이 치켜들고 터키군 쪽을 향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보라! 적들은 물러갈지어다!’라고 소리쳤다. 병사들은 마치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듯 용감하게 진격하였다. 전투가 진행되는 중에 다비아노는 예배처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리며 시간을 보냈다. 다비아노는 터키군이 비엔나에 대한 공성을 풀고 후퇴한 후에도 계속 진중을 방문하며 신성동맹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특히 1686년 부다(Buda)를 해방시키고 1688년 베오그라드를 해방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속설에 따르면 다비아노는 터키와의 비엔나 전투가 끝난 후에 카푸치노 커피를 개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비아노에 대한 어떠한 기록에도 그러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다비아노와 카푸치노 커피에 대한 얘기는 1980년대에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농담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 마르코 다비아노의 기념상은 알베르티나 광장에서 아우구스틴 교회쪽으로 가는 중에 있는 카푸친교회에 세워져 있다. 마르코 다비아노는 2003년 로마 교황에 의해 성자로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