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74 빌헬름 폰 테게트호프(Wilhelm von Tegetthoff)

정준극 2009. 8. 13. 06:33

참고자료 74

 

테게트호프슈트라쎄와

해군제독 빌헬름 폰 테게트호프(Wilhelm von Tegetthoff)

 

빌헬름 폰 테게트호프 제독

 

오스트리아에 해군이 있다는 것은 마치 몽골에 해군이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는 몽골과는 달리 분명히 해군이 있다. 신성로마제국 시절로부터의 전통이다. 오스트리아의 주요 해군기지는 북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와 베니스에 있었다. 트리에스테와 베니스는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해 있었다. 지금도 오스트리아의 일부 해군이 트리에스테 군항에 정박하고 있다고 한다. 트리에스테의 오스트리아제국 해군은 아드리아해를 장악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멕시코를 식민지로 삼은 일이 있다. 그러므로 멕시코를 왕복해야하는 함선이 필요했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해군을 보유하지 않을수 없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군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빌헬름 폰 테게트호프(1827. 12. 23-1871. 4. 7) 제독이다.

 

테게트호프 기념탑

 

비엔나 북부역(Wien Nord: 현재는 프라터슈테른역)의 앞에 있는 5거리를 프라터슈테른(Praterstern)이라고 부른다. 프라터 앞에 있는 별처럼 여러 방향으로 뻗은 길이 있는 로터리이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테게트호프 기념탑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있는 거리 이름들을 열거해 보면, 시내 쪽으로는 프라터슈트라쎄이며 도나우쪽으로는 라잘레 슈트라쎄, 그리고 옆으로는 클랑 하이네 슈트라쎄와 하우푸트알리가 뻗어 있고 그 사이로 노르드반 슈트라쎄와 아우스슈텔룽스 슈트라쎄, 프란첸스브뤼케 슈트라쎄 등이 뻗어 있다. 이 로터리에 높은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오스트리아제국의 영웅적인 해군제독인 빌헬름 폰 테게트호프 제독을 기념하는 기념비이다. 높이 11 미터의 대리석 기둥으로 된 기념탑이다. 기념비 기둥의 중간쯤에는 닻과 전함의 뱃머리를 본뜬 여섯 개의 조각들이 자리 잡고 있다.  상당의 테게트호프 제독의 기념상은 높이가 3.5 미터이다. 하단에는 당장이라도 뛰어오를것 같은 군마들이 조각되어 있고 그 옆으로는 두명의 인물상이 있다. 하나는 승리의 월계관을 높이 들고 있는 여신이며 반대쪽에는 마치 사악한 용을 제압하는 성미하엘의 모습을 한 천사가 창을 높이 처들고 있는 모습이다. 테게트호프 제독이 1871년에 서거하자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제독의 기념탑을 세우자는데 의견을 함께 했으나 실제로 설계 공모를 거쳐 완성이 된 것은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896년이었다. 설계는 당대의 조각가인 칼 쿤드만(Carl Kundmann) 교수였다. 이같은 모습의 기념탑은 로마제국 당시 해전승리 기념탑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프라터슈테른의 테게트호프 제독 기념탑은 런던 트라팔가의 넬슨 제독 기념탑, 파리 방돔 광장의 기념탑과 함께 유럽의 3대 해군제독 기념탑으로 알려져 있다.

  

기념탑의 하단. 리사해전을 기념한다는 문구가 보인다.

 

빌헬름 폰 테게트호프는 슈티리아의 마르부르크(Marburg)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슬로베니아의 마리보르(Maribor)라는 곳이다. 아버지는 칼 폰 테게트호프(Karl von Tegetthoff)는 오스트리아제국 육군 중위였다. 어머니 쪽으로는 1851-1861년간 비엔나 시장을 지낸 요한 카스파르 폰 자일러(Johann Kaspar von Seiler) 남작의 집안과 연결이 된다. 테게트호프는 1840년 비엔나 해군아카데미에 들어갔다. 그후 1845년에는 해군사관생도가 되었다. 해군사관생도로서 그가 1848-49년 베니스에 갔을 때 초기 이탈리아혁명을 목격하였다. 1849년 4월 해군장교로 임관된 그는 5월부터 8월까지 베니스에 배속되어 항구를 봉쇄하는 임무를 맡았다. 테게트호프는 1852년 중위로 진급하여 전함에 배속되었다. 2년 후인 1854년, 그는 소형 순양함인 엘리자베트호의 함장이 되었다. 당시는 오스트리아가 해군력을 증강하기 위해 군함들을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전환하는 시기였다. 테게트호프는 증기선의 배치를 적극 주도하였다. 1855년 그는 크리미아 전쟁중 도나우 어귀를 순찰하는 증기선의 선장이 되었다. 테게트호프의 성실한 근무는 오스트리아 해군의 총사령관인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의 관심을 끌었다. 1858년 테게트호프는 신형 스크루 함선으로 북아프리카 연안을 순찰하는 Erzherzog Friedrich(프리드리히 대공)의 함장으로 승진하였다.

 

기념탑 하단의 조각. 하단의 한쪽에는 WILHELM VON TEGETTHOFF라고 적혀 있고 다른 쪽에는 DEM HELDENMUTHIGEN SIEGER SEINE DANKBAREN MITBURGER 1886 이라고 적혀 있다. '용맹스런 승리에 대하여 국민 모두가 감사를 드린다'는 내용이다.

 

1859-60년에 테게트호프는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을 수행하여 브라질 방문길에 나섰으며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오토 1세를 폐위시킨 그리스 혁명의 추이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1864년 테게트호프는 프러시아를 도와 덴마크 함대와의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덴마크는 북해를 장악하고 독일의 북부 항구들을 봉쇄하고 있었다. 테게트호프는 적은 군사력으로 덴마크의 함대를 물리침으로서 프러시아를 덴마크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란츠 요셉 황제는 테게트호프를 해군제독으로 승진시키고 철관훈장(Order of the Iron Crown)을 수여하였다. 1866년 테게트호프는 이탈리아와의 해전에 참전하였다. 이탈리아의 함대는 오스트리아에 비하여 훨씬 강대했지만 테게트호프는 충분한 사전준비로 이탈리아의 함대를 물리쳤다. 그러자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해군기지가 있는 리싸(Lissa)로 함대를 돌려 공격하였다. 이를 파악한 테게트호프는 함대를 이끌고 리싸로 달려가 적선단의 중간을 격파함으로서 이탈리아의 대함대를 격파하였다. 테게트호프의 함대는 그야말로 종횡무진으로 이탈리아 함선들을 화염에 휩싸이게 했다. 이튿날 이탈리아 함대는 남은 함선들을 이끌고 도주하였다. 테게트호프는 당시 멕시코 황제인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으로부터 축전을 받았으며 즉각적으로 해군제독에 임명되었다. 이와 함께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 십자훈장을 받았으며 비엔나의 명예시민으로 추대되었다.

 

이탈리아와의 리싸 해전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테케트호프 제독

                                    

리싸에서 승리를 거둔 테게트호프는 프란츠 요셉 황제에게 달마티아를 합병하여 그곳에 오스트리아의 해군기지를 설치할 것을 강력히 주청하였다. 이같은 주청은 당장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테게트호프가 세상을 떠난후에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여 해군력을 강화하게 되었다. 그후 테게트호프는 영국, 프랑스, 미국을 항해하며 오스트리아의 해군력 증강을 위한 방안을 강구하였다. 1867년 멕시코의 베니토 후아레즈(Benito Juarez)정부가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황제를 처형하자 테게트호프는 순양함인 노바라(Novara)호를 이끌고 멕시코로 급파되어 페르디난트 황제의 시신을 인도받아 1868년 1월 16일 트리에스테에 귀환하였다. 1868년 3월 테게트호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테게트호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대대적인 개혁을 이룩하였다. 이탈리아, 또는 프랑스나 영국에 비하여 해군력이 현저히 약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심지어 평상시에도 도나우강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해군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1868년 4월 테게트호프는 추밀원 위원이 되었고 이어 상원(Herrenhaus)의원이 되었으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프라터 슈테른의 테게트호프 메모리얼과 뒷편의 리젠라트. 그림

 

테게트호프는 1871년 4월 7일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43세였다. 그는 그라츠의 산크트 레온하르트(St Leonhard)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테게트호프 기념비는 마르부르크, 비엔나, 폴라(Pola)에 건립되었다. 비엔나의 프라터슈테른(Praterstern) 한복판에 건립된 기념비는 칼 쿤드만(Karl Kundmann)의 작품으로 11m 높이이며 상단에는 3.5 m의 테게트호프 청동상이 올려져 있다. 프라터슈테른의 기념비는 그가 리싸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여 1886년에 완성되었다. 폴라에 있는 기념상도 칼 쿤드만의 작품이었다. 폴라는 1919년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테게트호프 기념상은 1935년 그라츠로 옮겨졌다. 테게트호프의 리싸 해전 장면은 2004년도에 20유로 기념주화로 발행되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1935년에 테게트호프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1873년에 북극에서 프란츠 요셉 랜드를 발견한 선박은 테게트호프의 이름을 딴 SMS 테게트호프였다.

 

프라터슈테른에 세워져 있는 테게트호프제독 기념탑. 뒤편에 있는 고성과 같은 건물이 옛 북부역 역사이다. 1900년대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