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75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정준극 2009. 8. 13. 06:45

참고자료 75

 

테오도르-헤르츨-플라츠와

시온주의자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현대 시온주의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테오도르 헤르츨은 1860년 헝가리의 페스트(부다페스트의 동부지역)에서 태어났다. 유태인인 그의 부모는 오늘날 세르비아에 속한 제문(Zemun)에서 살았었다. 당시 제문은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다. 헤르츨이 18세 때에 그의 가족은 비엔나로 옮겨왔다. 헤르츨은 비엔나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졸업후 잠시 비엔나와 잘츠부르크의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던 그는 법률보다는 저널리슴과 문학에 보다 심취하였다. 그리하여 파리에 있는 신자유신보(Neue Freie Presse)의 비엔나 특파원이라는 신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훗날 신자유신보의 문학편집장이 되었으며 작가로서 여러 편의 희곡과 드라마를 집필하여 비엔나의 무대에 올렸다. 젊은 시절, 그는 학생조합(Burschenschaft) 운동에 관여하여 ‘명예, 자유, 조국’(Ehre, Freiheit, Vaterland)이라는 모토아래 독일 통일 운동에 열성이었다. 그의 학생운동은 유태인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것이었다.

 

 

신자유신보의 파리특파원으로서 헤르츨은 ‘드라이푸스 사건’(Dreyfus Affair)을 취재하여 보도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악명높은 반유태주의 사건이었다. 유태계의 프랑스 육군대위가 독일스파이로 오인되어 재판을 받은 사건이었다. 재판은 무죄를 선언했으나 파리 시내에서는 ‘유태인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전도가 유망했던 육군대위 드라이푸스는 공개석상에서 계급장을 뜯기고 대검이 분질러졌다. 군인으로서 최대의 모욕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헤르츨은 그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유태주의에 대하여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는 ‘유태인들은 유럽에서 박해를 받으면서 살 필요가 없다. 모두 유럽에서 떠나야 한다. 조국 땅에서 독립적인 국가를 수립하여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갖게 되었다. 이후 헤르츨은 국제무대에까지 시온주의를 지지하는 글을 써서 여론을 환기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명성은 점차 높아졌다. 1896년 4월, 그는 이스탄불을 방문하였고 이어 불가리아의 소피아를 방문하였다. 그곳의 유태인 대표들은 헤르츨을 열렬하게 환영하였다. 헤르츨은 계속 여행을 다니면서 시온주의에 대한 유태인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점차 지지자가 늘게 되었다.

 

1895년 1월 13일 유태인인 알프레트 드라이푸스는 공개석상에서 계급을 박탈당하였다.

 

1897년, 헤르츨은 사재를 털어 비엔나에서 Die Welt(세계)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그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 회의를 개최했다. 헤르츨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0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온주의 회의의 회장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회장으로서 그가 적극 추진하였던 사업은 국제적인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는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따듯한 환영을 받았으며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오토만 황제와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1902년, 그는 영국외국인이민자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연설을 하게 되었다. 이때에 그는 식민지담당 국무장관인 조셉 챔버레인(Joseph Chamberlain)과 여러 현안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인 협의를 할수 있었다. 예를 들면 영국이 이집트와 협상하여 시나이반도의 알라리쉬(Al'Arish)에 유태인들이 정착할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 등이었다. 1903년에는 바티칸의 교황 비오10세로부터 유태인국가 건설에 대한 지원을 얻고자 노력했다. 바티칸은 그같은 문제에 대하여는 행동거절(non possumus)원칙임을 설명하고 곁들여서 유태인들은 메시아로 이땅에 온 그리스도를 부인하기 때문에 교회로서 유태인들을 지지하거나 협조할수 없다고 내세웠다.

 

비엔나에 있는 헤르츨과 가족의 합장 묘지

 

바티칸이 시온주의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자 헤르츨은 다시 영국을 찾았다. 영국은 영국령 동아프리카에 방대한 땅을 제공하여 그곳에 유태인들의 독자적인 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우간다 프로젝트’라고 불렀다. 헤르츨은 이 문제를 1903년 바젤에서 열리는 제6차 시온주의 회의에 보고하고 검토토록 요청했다. 2년간의 검토가 있었다. 1905년의 회의는 영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유태국가는 역사적인 이스라엘에 건설해야 한다는 결심을 재강조 하였다. 헤르츨은 우간다 프로젝트의 부결을 보지 못했다. 1904년에 남부오스트리아의 에들라흐(Edlach)에서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겨우 44세였다. 그는 임종에 앞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의 장례식을 아주 조촐하게 치루어 줄것을 부탁했다. 연설이나 조화도 일체 없도록 했다. 그는 ‘훗날 사람들이 나의 유해를 조국 팔레스타인으로 옮겨 그곳에 장례지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949년 그의 유해는 비엔나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다시 매장되었다. 독립국가로 태어난 이스라엘은 헤르츨의 장례식을 국장에 준하여 엄숙하게 치루었다. 이스라엘은 헤르츨의 무덤이 있는 언덕을 헤르츨산(Mount Herzl)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곳에는 나중에 헤르츨의 부모, 누이, 남동생의 유해도 함께 안장되었다.

 

텔아비브에서 바라본 자파(욥바). 텔아비브라는 명칭은 헤르츨의 소설제목인 알트노이란트를 번역한 명칭이다.

 

헤르츨의 마지막 문학작품인 Altneuland(The Old New Land: 오래된 새로운 땅)은 시온주의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1923년에는 유태인 국가가 팔레스타인에 세워질 것으로 예견했다. 이스라엘은 그보다 20여년이 늦은 1946년에 수립되었지만 헤르츨의 유태인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아이디어는 실현을 본 것이다. 헤르츨은 서구 문화에 기본을 둔 현대 유태문회의 국가를 수립하는 아이디어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평화궁’(Palace of Peace)를 건설하여 국제사법재판소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유태인과 아랍인이 공존하는 국가를 염두에 두었다. Altneuland(알트노이란트)는 Tel Aviv(텔 아비브)라는 타이틀로 번역되었다. 저명한 학자인 나훔 소콜로프(Nahum Sokolov)가 그렇게 번역했다. 텔 아비브는 구약성서 에스겔 3: 15절에 나오는 말이다. 수천년이 지난 폐허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는 것을 텔 아비브라고 불렀다. 훗날 이스라엘의 자파(Jaffa: 욥바) 외곽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텔 아비브라고 부르게 된 것은 헤르츨의 기여였다. 텔 아비브는 이스라엘 제2의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텔 아비브 인근의 마을은 헤르츨을 기념하여 헤르츨리아(Herzlia)라고 이름을 지었다.

 

예루살렘의 마운트 헤르츨에서 헤르츨의 유해를 안장할 때에 의장대가 그의 관을 경호하고 있다.

 

헤르츨의 아버지인 야콥 헤르츨(1836-1902)은 기업으로 성공하여 재산을 모은 사람이었다. 헤르츨의 어머니인 자네트(Jeanette)는 아름답고 현명한 여인이었다. 어머니 자네트는 아들 헤르츨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며느리인 율리(Julie)와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헤르츨에게는 폴리네(Pauline)라는 누이가 있었다. 헤르츨보다 한 살 위였다. 폴리네는 1878년, 불과 18세의 젊은 나이로 장질부사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헤르츨은 가족과 함께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구시가지인 페스트의 도하니 유태교회당(Dohany Synagogue) 옆에 살았다. 헤르츨이 율리 나샤우어(Julie Naschauer)와 결혼한 것은 그가 29세 때인 1889년이었다. 율리는 비엔나에 살고 있는 부유한 유태인 상인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세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결혼은 불행한 것이었다. 헤르츨은 어머니인 자네트에게 깊이 집착하는 성격이었다. 그 때문에 어머니와 며느리인 율리와의 관계가 이상할 정도로 나빠졌다. 고부간의 문제는 헤르츨의 정치적인 활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부인 율리는 헤르츨의 활동에 대하여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세 자녀는 모두 어릴 때 죽었다. 참으로 비극이었다.

 

부다페스트에 있는 도하니 유태교회당. 옆집에 헤르츨이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