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73 요한 필립 슈타디온(Johann Philipp Stadion)

정준극 2009. 8. 12. 12:20

참고자료 73

 

슈타디온가쎄와

요한 필립 슈타디온(Johann Philipp Stadion) 백작

 

 

슈타디온가쎄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시절에 프란시스 2세(신성로마제국 황제) 정부의 수석장관으로서 정치가이며 외교관인 요한 필립 슈타디온(1763-1824) 백작을 기념하여 붙인 거리이름이다. 그는 오스트리아국립은행을 설립했다. 그는 1787년에 슈타디온-봐르트하우젠(Stadion-Warthausen) 백작의 칭호를 받았다. 그해에 그는 스톡홀름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1790-1793년에는 주영대사를 역임했다. 런던에서 돌아온 그는 잠시 휴양을 취하다가 1800년 오스트리아의 프러시아 특사로 파견되어 나폴레옹을 대적함에 있어서 프러시아와 동맹을 맺고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와에 대한 특사역할은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제3연맹을 형성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비록 프러시아와의 연맹에 실패했지만 프란시스 2세 황제에 의해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샤를르 대공과 함께 은밀한 중에 군사력을 길러 건곤일척의 전투를 기획하였다. 그리하여 아슈페른-에슬링 전투에서 프란시스2세의 동생인 샤를르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이 나폴레옹군을 격파하는 위대한 전과를 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프란시스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으나 신성로마제국의 문을 닫고 새롭게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고서는 프란시스 1세라고 불렀다.]

 

보티브키르헤 뒤편 오토 바그너 플라츠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오스트리아국립은행 본부 건물 

 

1808년 그는 지연정책을 포기하였다. 그는 메테르니히 수상의 후원을 받아 새로운 전쟁을 서둘렀다. 그러나 1809년 바그람 전투는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그는 외무장관에서 사임하였다. 그러나 1813년 나폴레옹의 실각후 새로운 유럽의 판도를 작성하는 작업에 크게 참여하였다. 외무장관에서 물러난 그는 여생을 국가 경제 파탄을 회복하는데 온갖 정열을 모두 바쳤다. 그리하여 1815년 재무장관직을 수락했으며 1816년 오스트리아국립은행(OeNB)을 설립했다. 그는 1824년까지 재무장관을 지냈으며 1824년 5월 15일 바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인 프란츠 슈타디온은 1840년대 오스트리아제국의 유명한 정치가였다. 슈타디온 백작은 연극을 무척 좋아하였으며 극작가인 프란츠 그릴파르저를 후원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슈타디온가쎄에 있는 콜롬비아대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