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76
우니페어지태츠슈트라쎄와
비엔나대학교(Universität Wien)
리벤버그 시장 기념상으로부터 바라본 비엔나대학교
비엔나대학교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국가에 있는 대학교중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다. 독일어 사용과는 관계가 없는 중부 유럽의 나라들로 보았을 때는 비엔나대학교가 프라하의 칼(Karl)대학교, 크라코우의 야길로니안(Jagiellonian) 대학교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대학교이다. 하지만 규모 면에서는 비엔나대학교가 중부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비엔나대학교 본관 그랜드 홀(Festsaal)
비엔나대학교는 일찍이 1365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4세 공작이 설립했다. 하지만 두 동생들도 설립에 동참했다. 알브레헤트 3세(재위: 1358-1395)와 레오폴드 3세(재위: 1358-1386)이다. 그중에서도 루돌프 4세(재위: 1358-1365)는 비엔나대학교의 설립을 주도했기 때문에 ‘설립왕’(The Founder)이라는 별명을 듣고 있다.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통치는 복잡하여서 루돌프 4세, 알브레헤트 3세, 레오폴드 3세가 오스트리아를 분할하여 통치하였다. 그래서 재위 기간의 시작이 모두 같다. 아무튼 비엔나대학교 설립에 있어서 이들 3인방의 기여가 컸기 때문에 비엔나대학교를 일명 ‘알마 마테르 루돌피나’(루돌프 동문회: Alma Mater Rudolphina)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시 1365년으로 돌아가서 보면, 루돌프 4세는 비엔나에 파리대학교를 모델로 하는 박사학위 수준의 대학교를 설립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그런데 바티칸의 교황 우르반 5세가 루돌프 4세의 칙령을 인정할수 없다고 나섰다. 교황의 주장은 비엔나대학교에 신학부를 설치하는 것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이미 프라하에 칼대학교에 신학부가 있는데 또 다시 비엔나에 신학부를 둔 다는 것은 신학의 일관성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칼대학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칼 4세(샤를르 4세)가 주도하여 설립하였다. 칼 4세는 제국의 다른 곳에 신학부를 두면 칼대학교의 신학부와 경쟁을 해야 하므로 다른 곳에 신학부를 개설하는 것을 꺼려왔다. 칼 4세의 위력에 눌린 교황 우르반 5세가 비엔나대학교의 설립에 난색을 표명했던 것이다. 루돌프 4세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교황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384년 가톨릭 신학부를 포함하여 종합대학교로서 사후 비준을 받았다. 비엔나대학교는 1365년에 설립되었지만 첫 건물이 완성된 것은 교황의 비준을 받은지 1년후인 1385년이었다.
비엔나대학교를 설계한 하인리히 폰 페르스텔 기념상(비엔나대학교 본관)
현재 링슈트라쎄에 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은 1877년부터 1883년 사이에 완성된 것이다. 거장 하인리히 폰 페르스텔(Heinrich von Ferstel)이 건축설계를 맡았다. 폰 페르텔은 비엔나대학교 옆에 있는 보티프키르헤(Votivkirche), 오스트리아응용미술관 등을 설계한 건축가이다. 구대학교의 건물들은 슈투벤링의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Ignaz-Seipel-Platz)에 있다. 현재 이곳에는 대학교회(예수회교회)와 오스트리아 학술원: Österreich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이 남아 있다. 비엔나대학교가 여학생을 받기 시작한 것은 1897년부터였다. 그것도 철학과에 한하였다. 그후 점차 다른 학과에서도 여학생들을 받기 시작했다. 의학부는 1900년부터, 법학부는 1919년부터, 개신교 신학부는 1923년부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마 가톨릭 신학부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부터 여학생을 받기 시작했다. 최초의 여학생인 엘리제 리히터(Elise Richter)는 졸업후 1907년에 비엔나대학교 최초의 여교수가 되었다. 즉, 교수복을 입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로망스 언어를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는 또한 비엔나대학교 최초의 여성 명예교수가 되었다.
비엔나대학교 본관 페스트슈티게(Feststiege: 그랜드 계단)
비엔나대학교의 본관은 링슈트라쎄에 있지만 학부는 시내 이곳저곳에 있는 60여개의 건물에 분산되어 있다. 본관 건물의 뒤편으로 넓은 캠퍼스가 펼쳐져 있다. 현대식 강의실들도 대학교 캠퍼스의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비엔나대학교는 전통적으로 민주적인 방법으로 운영되었었다. 학교의 운영에 학생그룹, 강사그룹, 교수그룹이 공동으로 참여하였다. 모든 그룹은 이사회에 대표를 보내어 학교 운영과 관련한 사항에 대하여 투표권을 행사했었다. 그러다가 종전의 정부가 대학교 시스템을 개혁하여 교수들이 권한의 대부분을 가지도록 했다. 즉, 이사회에는 교수대표만이 참여토록 한 것이다. 이와 함께 그동안 받지 않던 등록금(수업료)를 2007년부터 학기당 약 367 유로를 받도록 했다. 그리고 의과대학은 비엔나대학교에서 분리하여 비엔나의과대학교로 만들었다. 비엔나대학교에는 각종 연구실이 있다. 비엔나대학교의 연구요원은 약 6천5백명이나 된다. 그중에서 약 1천명은 학교와 정부가 아닌 기업체 등으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비엔나대학교 본관
비엔나대학교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 본관 전시장. 왼쪽 끝 설명문을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은 필자의 오랜 친구인 필리핀의 Dr Carlito Aleta(전 필리핀원자력연구소장, IAEA/RCA Coordinator).
비엔나대학교의 학과는 다음과 같다. 가톨릭 신학, 개신교 신학, 법학, 비즈네스, 경제 및 통계, 컴퓨터 과학, 역사 및 문화학, 논리학, 철학, 교육학, 심리학, 사회과학, 수학, 물리학, 화학, 지구과학, 지리학, 천문학, 생명과학, 통역과학, 체육과학, 분자생물학 등이다. 2008년 현재 비엔나대학교의 교수로서 노벨상을 받은 인물은 로베르트 바라니(Robert Barany), 율리우스 바그너-야우레그(Julius Wagner-Jauregg), 한스 피셔(Hans Fischer), 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edinger), 빅토르 프란츠 헤쓰(Victor Franz Hess), 오토 뢰비(Otto Loewi), 콘라트 로렌즈(Konrad Lorenz),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eyeck)의 9명이다. 이밖에 비엔나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유명 인사들은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교황 비오 2세, 요셉 폰 존넨펠스(Joseph von Sonnenfels) 등 헤아릴수 없다. 비엔나대학교의 졸업생중 유명 인사로는 메트로폴리탄 음악감독을 지낸 루돌프 빙(Rudolf Bing), 지그문트 프로이드, 극작가 프란츠 그릴파르저, 대본가 휴고 폰 호프만슈탈, 정치가 브루노 크라이스키, 작곡가 겸 지휘자 구스타브 말러, 핵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 유전학자 그레고르 멘델, 교황 비오 3세, 물리학자 오토 프레밍거, 정치가 쿠르트 봘트하임 등이다.
비엔나대학교 본관 가든. 항상 무슨 행사가 진행된다. 특히 시험이 끝나는 날에는 간단한 파티가 자주 열린다.
비엔나대학교의 도서관은 가히 세계적이다. 본부 도서관이 있으며 50개 단과 도서관이 있다. 도서관 직원은 350여명이나 된다. 도서관은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이용할수 있다. 열람실을 이용할 때에는 신분 확인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자료를 반출 할 때에만 신분을 확인한다. 비엔나대학교의 도서관은 루돌프 4세가 대학교 건설을 칙령으로 발표할 때부터 포함되어 있던 사항이었다. 루돌프 4세는 칙령을 통하여 대학교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의 도서는 모두 대학교에 귀속한다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도서관의 장서는 늘어났다.
비엔나대학교 본부 도서관 열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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