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과학자/유명 발명가

폭스바겐의 페르디난트 포르셰(Ferdinand Porsche)

정준극 2009. 8. 31. 19:32

폭스바겐의

페르디난트 포르셰(Ferdinand Porsche)

 

 페르디난트 포르셰


페르디난트 포르셰(1875-1951)는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자동차 엔지니어로서 독일을 대표하는 폭스바겐을 처음으로 창조한 인물이다. 그는 또한 독일 2차 대전에서 악명을 떨쳤던 독일군 신형탱크인 타이거 1, 타이거 2, 엘레판트(Elefant)의 개발에 크게 기여하였다. 포르셰는 독일 제3제국으로부터 독일국가과학예술상을 받았다. 히틀러의 제3제국으로서는 매우 예외적인 사항이었다. 포르셰의 아들인 페리 포르셰(Ferry Porsche)는 아버지 페르디난트가 개발한 폭스바겐을 바탕으로 스포츠카인 포르셰자동차를 개발했다. 사실상 아버지 페르디난트 포르셰도 포르셰자동차의 개발에 크게 참여하였다.

 

아우토 휘어 예더만(Auto fur Jederman)이라는 표어아래 개발된 독일의 국민차 폭스바겐 비틀

 

포르셰는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보헤미아 북부, 리베레크(Liberec: 현재는 독일의 Reichenberg)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계통이었다. 아버지는 리베레크에서 철공소를 경영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기계에 대하여 대단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는 낮에는 리베레크(라이헨버그)기술고등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아버지 공장에서 아버지를 도와 일하였다. 그는 성실하였다. 그는 18세 때에 비엔나의 ‘벨라 에거(Bela Egger)전기회사’에 취직할수 있었다. 그는 비엔나에서 낮에는 벨라 에거 전기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비엔나공과대학교의 강의를 청강하였다. 말이 청강이지 실은 학생이 아니면서도 몰래 강의를 들었던 것이다. 포르셰는 그 이상의 고등교육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포르셰는 벨라 에거 회사에 5년간 있으면서 전기모터를 처음으로 단독 개발하였다.

 

1898년 그는 비엔나에 본사를 둔 야콥 로너(Jakob-Lohner)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프란츠 요셉 황제를 비롯한 노르웨이, 스웨덴, 루마니아 왕실의 마차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야콥 로너는 마차보다는 자동차시대가 올것으로 확신하고 1896년부터 비엔나 교외의 플로리드스도르프(Floridsdorf)에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포르셰가 자동차 개발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음은 물론이다. 야콥 로너와 포르셰는 1898년, ‘시스템 로너-포르셰’라는 마차형태의 자동차를 제작하여 선보였다. 바테리를 이용한 두 개의 전기모터를 장착하여 전륜을 구동하는 자동차였다. 이어 포르셰는 두 개의 전기모터를 추가로 장착하여 4륜구동의 자동차를 제작하였다. 포르셰의 4륜구동자동차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4륜구동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나온 다른 자동차보다도 속력이 빨랐다. 그러나 납으로 만든 바테리의 무게가 보통이 아니어서 문제가 되었다.

 

세계최고급의 포르셰

 

1902년 포르셰는 군대에 징집되었다. 그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운전기사로 복무했다. 나중에 페르디난트 대공은 1914년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로서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피살되어 1차 대전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다. 그 페르디난트 대공을 2년동안 모신 운전기사가 포르셰였다. 1906년 오스트로-다임러 엔진회사가 포르셰를 디자이너 책임자로 영입하였다. 그가 오스트로-다임러에서 설계한 자동차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85마력의 프린츠 하인리히(Prinz Heinrich)였다. 프러시아의 황태자 하인리히를 위해 제작한 것이었다. 1916년 그는 이사로 승진하였고 비엔나공과대학교에서 명예공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이후로 포르셰는 모든 직함에 반드시 Dr Ing. H.C.를 명기하였다. Doktor Ingenieur Honoris Causa(명예공학박사)의 약자이다. 대학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남들의 강의를 훔쳐 들어야 했던 그가 우수한 학생들도 획득하기 어려운 공학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포르셰는 계속 경주용차를 설계했다. 1922년에 디자인한 경주용차는 유럽에서 열린 전체 53개 대회에서 43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얼마후 그는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다임러 모터회사의 기술이사 자리로 옮겼다. 당시 슈투트가르트는 독일 자동차 산업의 중심이었고 그 중심에는 다임러가 있었다. 그는 슈투트가르트공과대학교에서 또 다른 명예공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어 명예교수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1926년 다임러 모터회사와 벤츠회사가 통합하여 다임러-벤츠회사로 출범했다. 이로부터 메르세데스-벤츠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포르셰는 경량의 소형 메르세데스-벤츠를 설계했으나 회사의 경영진은 별로 탐탁하게 여지기 않았다. 1929년 포르셰는 슈타이르(Steyr)자동차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대공황이 엄습하여 슈타이르회사는 폐업되었다.

 

포르셰 자동차를 세계 수준으로 올려 놓은 페리 포르셰(1909-1998)

 

1931년 포르셰는‘이제는 독립!’이라는 모토아래 슈투트가르트에서 개인회사를 차렸다. Dr. Ing. h. c. F. Porsche GmbH, Konstruktion und Beratungen für Motoren und Fahrzeugbau(명예공학박사 포르셰 모터 및 자동차 제조 및 상당회사)라는 긴 이름의 회사였다. 옛 동료들이 합세하였다. 포르셰는 과거 다임러-벤츠에서 소형차를 설계했던 경험을 살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극심한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사업은 실패를 거듭하였다. 1932년, 클라우스 폰 외르첸(Klaus von Oertzen) 남작의 주도로 중소자동차제조회사를 통합하여 ‘아우토 우니온 게엠베하’(Auto Untion GmbH)가 설립되었다. 이듬해 베를린에서 열린 모터쇼에서 독일제국의 수상인 아돌프 히틀러는 다음 두가지 사항을 역설하였다.

 

- 국민차: 전국에 자동차가 운행되도록 한다. 모든 국민은 자기의 자동차나 트랙터를 소유토록 한다.

- 국가주관의 자동차경주대회 개최: 고속의 독일자동차 생산을 위해 자동차경주대회를 개최한다. 이를 위해 메르세데스-벤츠가 매년 50만 마르크의 기금을 마련한다.

 

히틀러의 이같은 정책으로 포르셰는 두가지 프로젝트에 도전하였다. 국민차를 개발하는 것과 군용 탱크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포르셰는 2차 대전이 시작된지 얼마후 국민차인 폭스바겐(Volkswagen: VW)을 제작하였으며 탱크로서는 타이거 1, 타이거 2, 엘레판트(Elefant)를 제작하였다. 히틀러는 폭스바겐 생산을 위해서 팔러스레벤(Fallersleben)이라는 곳에 '카데에프 봐겐스'(Stadt des KdF-Wagens)를 설립하였다. 팔러스레벤은 오늘날 볼프스부르크(Wolfsburg)로서 아직도 폭스바겐의 본사공장이 있다.


2차 대전에서 맹위를 떨쳤던 나치 독일의 타이거 1 탱크

 

전쟁이 끝난후 프랑스 정부는 포르셰에게 폭스바겐공장을 프랑스로 이전토록 요청하였다.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전후배상청구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정부 내에서의 이견과 프랑스 자동차업계의 반발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1945년 12월 15일, 포르셰 부자와 동료인 안톤 피에슈(Anton Piech)는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타이거 탱크 제작이 가장 큰 죄목이었다. 아버지 페르디난트와 동료 안톤은 20개월 동안 디종(Dijon)에서 아무런 재판도 없이 구금되었었다. 다행히 일찍 풀려난 아들 페리(Ferry)는 사업을 계속하여 경주용자동차인 시시탈리아(Cisitalia) 타입360을 제작하였다. 4륜구동이었다. 이 차는 그랑프리 자동차경주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좋은 평가를 받아서 상당한 기금은 마련할수 있었다. 페리는 이 돈으로 디종에 갇혀 있는 아버지와 안톤을 석방하는데 사용하였다. 이후 페리가 주축이 되어 오스트리아 카린티아주의 그뮌트(Gmünd)에 있는 허술한 창고에서 새로운 디자인의 포르셰356이 개발되었다. 포르셰라는 브랜드를 사용한 최초의 자동차였다. 포르셰356은 순전히 수작업으로 49대 만이 제작되었다. 오늘날 포르셰356는 세계 자동차 수집가들의 가장 우선되는 수집품목이 되어 있다.

 

폭스바겐 1백만대 생산 기념차. 보석으로 장식했다.

 

포르셰 가족은 1949년 슈투트가르트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떻게 사업을 재개해야할지 막막했다. 예전의 공장은 미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은행은 대출을 주지 않으려 했다. 페리는 폭스바겐회사와 담판하여 지원을 받아냈다. 폭스바겐은 포르셰자동차가 납품되기 전에 선금을 지불하여 주었다. 페리는 대출을 거절했던 은행장에게 대출을 거부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냈다.폭스바겐으로부터 지원을 받을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포르셰의 사업은 순항을 거듭하여 17년간 7만8천대의 포르셰를 판매하였다. 폭스바겐은 포르셰에게 비틀(타입 1)의 설계개량을 요청하였다. 조건은 매 비틀 판매당 로열티를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포르셰가 설계를 개량한 비틀은 무려 2천만대나 팔렸다. 이제 포르셰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1950년 11월, 포르셰는 전후 처음으로 볼프스부르크의 폭스바겐 공장을 방문하였다. 포르셰는 사장인 하인리히 노르드호프(Heinrich Nordhoff)와 새시대의 폭스바겐 제조에 대하여 협의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포르셰는 그로부터 1주일후 심장마비로 입원하였고 두달 훙린 1951년 1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포르셰는 20세기 최고의 자동차 설계자였다.


2014년도 포르셰 918. 스파이더(Spyder). 오늘날 포르셰는 스포츠카의 대명사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