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와 가톨릭 신앙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종교는? 천주교, 즉 로마 가톨릭이었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국민 거의 전체가 로마 가톨릭이었다.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는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배출되었던 것만 보아도 오스트리아에서 로마 가톨릭의 위치를 잘 알수 있는 일이다. 모차르트는 35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전생애를 통하여 가톨릭신앙에 기본을 둔 생활을 하였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았고 결혼식은 비엔나의 성슈테판대성당에서 거행하였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은 곳도 성슈테판대성당이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영결미사를 거행한 곳도 성슈테판대성당이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와 어머니 마리아 안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래서 자녀들을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신앙으로 양육하였다. 자녀들은 가족 기도회에 참석해야 했으며 가톨릭 절기에 따라 금식을 해야 했고 성자들을 숭배하며 규칙적으로 미사에 참여해야 했다. 그리고 물론 고해성사도 정기적으로 해야 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는 모차르트가 성인이 되었어도 가톨릭 신앙에 근거한 엄격한 순종을 강조했다. 1777년 모차르트와 어머니가 파리에 여행중일 때 아버지 레오폴드는 모차르트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볼프강이 고해성사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독려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무엇보다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의 손으로부터 세상에서의 행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도 젊은 시절에 어리석은 행동을 많이 했지만 하나님께서 바른 길로 인도하시었습니다. 나는 내 영혼이 위험한 곳에 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하며 삽니다. 볼프강도 그러한 생활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차르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 페르틀 모차르트
레오폴드는 이 세상에서 지은 죄는 영원한 벌을 받아 지옥에 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러한 위험한 결과가 생기지 않도록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오폴드는 하나님의 기적을 믿었다. 그는 기적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징표라고 믿었다. 레오폴드는 아들 볼프강의 천재성이 하나님의 기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믿었다. 1768년, 레오폴드는 친구 로렌즈 하게나우어(Lorenz Hagenauer)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차르트가 하나님의 기적의 증표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잘츠부르크에서 빛이 보이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입니다. 나의 임무는 하나님의 기적을 온 천하에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볼프강을 하나님의 기적의 증표로서 온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차르트에게 나타내주신 하나님의 기적이 아주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억누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레오폴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적의 증표를 믿지 않으려는 것을 ‘계몽주의 사상’에 빗대어 말한것 같다. 계몽주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기적보다는 과학적인 자연현상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잘츠부르크 돔(대성당). 모차르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식을 올리고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은 성당
모차르트는 아직도 10대 때인 1770년, 아버지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이때 바티칸의 교황 클레멘트 14세로부터 황금박차훈장을 받았다. 기사작위를 받은 것과 같은 영예스러운 것이었다. 교황의 훈장을 받으면 과거에 파문을 당한 일이 있다고 해도 사면이 된다. 물론 모차르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다. 1777년에 그린 ‘볼로냐 모차르트’에는 모차르트가 황금박차훈장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다.
볼로냐 모차르트 그림. 1777년. 가슴에 황금박차훈장이 빛나고 있다. 마르티니 작품.
모차르트는 1784년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열심회원이었다.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것은 프리메이슨의 마스터로서 모차르트와 친분이 두터웠던 오토 하인리히(Otto Heinrich) 남작의 권유를 받아서였다. 모차르트는 ‘가톨릭 전통에 충실한다’는 것과 ‘선행을 수행한다’(Zur Wohltätigkeit)는 프리메이슨의 모토가 마음에 들었다. 당시 가톨릭 신자들은 계몽주의 성향이 짙은 프리메이슨에 대하여 오히려 호감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모차르트도 가톨릭 신자로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는데 대하여 어떠한 갈등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톨릭교회는 프리메이슨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1738년, 교황은 가톨릭신자들이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성서에 나타난 기적을 과학적으로 검토하고 따지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칙령은 오스트리아에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1792년까지 공포되지 않았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야 공포되었다. 만일 모차르트의 생전에 교황의 프리메이슨 금지 칙령이 발표되었다면 모차르트는 교황의 지시를 따랐을 것이다.
프리메이슨의 표시인 스퀘어(곡척)와 콤파스(규)
중국 투르판에서 발견된 복희여와도. 중국 우주창조의 신화에 등장하는 남신 복희와 여신 여와를 그린 것이다. 복희는 구부러진 자(곡척)을 들고 있고 여와는 콤파스(규)를 들고 있다. 중국의 우주관인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천원지방)을 상징하는 것이다. 프리메이슨의 상징인 구부러진 자와 콤파스와 똑 같아서 흥미롭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로마 가톨릭 신자인 모차르트가 임종에 즈음하여 병자성사를 받았는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까지도 꺼지지 않고 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34년 후인 1825년, 이제는 할머니가 된 그의 처제(妻弟) 조피 바이벨(Sophie Heibel: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의 여동생)이 모차르트의 임종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비망록을 작성하였다. 조피 바이벨은 콘스탄체가 재혼한 새로운 형부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쎈(Georg Nikolaus von Nissen)이 모차르트의 전기를 작성하고 있어서 그의 작업을 돕기 위해 비망록을 작성했다. 당시 니쎈은 조피와 마찬가지로 잘츠부르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간혹 서로 만나 모차르트의 전기에 대하여 의논을 했었다고 한다. 조피에 의하면 모차르트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자기가 슈테판성당에 사람을 보내어 신부를 모셔오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데 니쎈이 처음에 작성한 자료에 의하면 슈테판성당의 신부는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환자가 직접 사람을 보내 와 달라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갈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모차르트는 가톨릭 사제로부터 병자성사를 받지 못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나중에 니쎈은 당시의 일을 조피와 다시 확인한후 성당에서 신부가 오기는 왔지만 모차르트가 의식을 잃고 있어서 제대로 노자성체(路資聖體)를 주고 도유(塗油)를 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이렇듯 임종 당시의 상황이 정확치 못하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과연 임종에 앞서서 병자성사를 받았는지에 대한 여부도 확실치 않다.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모차르트가 만일 병자성사를 받지 않았다면 그것은 대단한 문제가 아닐수 없다. 지하에 있는 레오폴드로서도 한탄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성슈테판대성당(슈테판스돔)은 모차르트의 교구성당이었다. 이성당에서 모차르트가 결혼식을 올렸으며 자녀들의 세례를 받았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영결미사가 열렸다.
모차르트의 연구가들은 모차르트가 임종 때에 병자성사를 받지 못했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슈테판성당의 기록에 신부가 모차르트를 위한 병자성사를 시행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신부가 갔었다는 기록조차 없다. 신부가 가지 못한 이유는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였다고 보고 있다. 콘스탄체는 동생 조피에게 성당에 사람을 보내어 신부를 모셔오도록 요청했다. 다만, 극도로 쇠진하여 있는 모차르트를 당황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므로 신부를 모셔오기는 하되 마치 지나가다가 잠시 병문안을 위해 들른 것처럼 혼자서 오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식으로 병자성사를 받기 위해 신부를 모셔온다면 보조하는 사람들까지 합쳐서 서너 명은 올 것이며 더구나 병자성사를 진행할 때에는 시종하는 사람들이 종을 울리고 향을 피우는 등 혼잡할 것이므로 아무것도 모르는 모차르트가 놀랄지도 모르니 조용히 치루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병자성사를 드리기 위해 신부와 성당 사람들이 제의(祭衣)를 입고 몰려오면 이웃 사람들에게도 걱정을 끼칠 것이므로 그저 신부 한사람만 와서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임종을 지켜보아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콘스탄체의 의도가 신부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신부로서는 병자성사를 해 달라는 것인지 또는 그저 잠시 들려 달라는 것인지 확실치 않아서 다시 알아보고 오라고 사람을 되돌려 보냈다는 것이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빈손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모차르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모차르트는 슈테판성당에서 가톨릭 장례미사를 받았다. 그리고 며칠후 호프부르크 정문 앞에 있는 미하엘교회에서 모차르트의 유작인 진혼곡을 연주할 때에 사후이지만 병자성사도 함께 치루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약 60편 이상의 종교음악을 작곡했다. 대부분은 1773-1781년에 작곡한 것으로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음악가로 고용되었을 때이다. 그 이후에 작곡한 종교음악중 대표적인 것은 모차르트가 비엔나에서 지내다가 잠시 잘츠부르크를 방문했을 때인 1782년 작곡한 C단조 미사(K427), 1791년 세상을 떠나던 해의 봄에 비엔나 근교의 바덴(Baden)에서 요양할 때에 작곡한 아베 베룸 코르푸스(Ave verum corpus: K 618), 그리고 미완성인 진혼곡(K 626)이다.
모차르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넷째와 다섯째 아이가 세례를 받은 슈테판성당내의 성카테리나 카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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