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 이야기/막달라 마리아는 누구?

막달라 마리아 숭배

정준극 2009. 9. 22. 18:26

막달라 마리아 숭배사상

 

상트 보메 계곡의 동굴에 있는 성막달라 마리아 영묘. 동굴은 마르세이유 서쪽 약 30km 지점에 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승들이 이곳을 관리하고 수호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예수 부활의 위대한 사건을 가장 먼저 보고 가장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 막달라 마리아이지 않던가! 그래서 훗날 바티칸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성녀로 시성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막달라 마리아는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막달라 마리아의 유해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지방의 마르세이유 인근, 상트 보메(Sainte Baume)라는 곳에 있는 성막시맹(St Maximin)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원래 이 성당은 처음 지었을 때 규모가 작았으나 막달라 마리아를 추앙하는 순례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오자 13세기에 대성당으로 개축되었다. 그로부터 성막시맹성당은 프랑스 남부에서 가장 훌륭한 고딕 성당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의 유해를 담았다고 하는 관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빈약해지자 교황 클레멘트 8세(재위: 1592-1605)는 새로운 석관을 만들어 막달라 마리아의 유해를 안치하는 대역사를 수행하였다. 막달라 마리아의 머리는 그가 말년에 홀로 고행하며 지냈다고 하는 상트 보메 계곡의 동굴에 교회를 짓고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 얘기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의 유해는 불행하게도 프랑스 혁명기간 중에 성막시맹성당이 훼손되자 역시 훼손되어 이리저리 흩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혁명기간 중에 훼손된 성막시맹성당(라 상트 보메 성당)은 1814년 재건되었고 이와는 별도로 막달라 마리아가 혼자서 고행하며 지냈다고 하는 상트 보메 계곡의 동굴에는 1822년에 자그마한 성당이 들어섰다. 막달라 마리아의 머리는 성막시맹 성당에서 새로 단장한 동굴교회로 옮겨져 오늘날까지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동굴교회는 전통적으로 도미니카 수도승들이 수호하고 있다. 중세로부터의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는 에베소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에 있는 성모마리아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가 888년에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옮겨져 현재는 이스탄불의 토카피 궁전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마르세이유 서남쪽의 카마라그 마을에 있는 상트 보메의 성막시맹 성당의 성막달라 마리아 기념상. 막달라 마리아의 머리라고 생각되는 해골 모양의 얼굴이 보인다. 매년 7월 22일은 성막달라 마리아 축일로서 이 기념상을 메고 거리를 행진하는 축제가 펼쳐진다.


막달라 마리아는 헛되고 헛된 이 세상에서 참회의 상징이 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를 그린 성화의 주제로는 '참회하는 여인'이 가장 많다. 그래서인지 막달라 마리아를 그린 그림을 보면 해골이 자주 등장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한즉 사망을 낳으리니'라는 말씀을 생각하면 죄가 곧 죽음이고 죽음의 상징은 해골이라는 것을 인식할수 있다. 막달라 마리아라라는 이름은 캠브릿지의 ‘막달레느 칼리지’에서처럼 높이 기념되게 사용되기도 하지만 아일랜드의 ‘막달레느 정신병원’에서처럼 창녀들을 교화하는 강제수용소의 이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니었다는데도 자꾸만 창녀와 연결하여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스탄불의 토카피 궁전. 일설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유해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동방정교회는 막달라 마리아가 베다니의 마리아와는 다른 여인이며 또한 성경에 나오는 ‘죄 있는 여인’과도 다른 인물로서 평생을 덕행으로 살았던 훌륭한 여인으로 믿고 숭배하고 있다. 그래서 동방정교회는 매년 막달라 마리아 축일을 정하고 크게 기념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부활이라는 최대의 역사적인 사실을 처음으로 목격한 여인으로서 크게 존경받고 있다.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여자는 어떤 사항이든지 증인이 될 수가 없었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부활의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러한 일 때문에, 그리고 예수 부활이라는 복음을 전파한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사도들과 동등한 인물’로 추앙받게 되었다. 동방정교회의 이콘(성화)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를 담은 옥합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는 막달라 마리아가 죄를 지은 여인으로서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발랐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준비했다는 뜻으로 설명된다. 동방정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승천 이후 성모 마리아(테오토코스: Theotokos)와 함께 에베소로 가서 지내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같은 내용은 이미 터키에서도 오랜 기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었다. 

 

이탈리아의 파올로 베로네세의 작품 '막달라 마리아의 회심'(Conversion of Mary Magdalene). 마리아의 언니 마르다가 동생 마리아를 쾌락과 허영의 세계로부터 올바른 신앙생활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있는 예수께 데려온다.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시는 말씀에 온전히 감동하고 참회의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림에서 보는대로 마리아는 참회의 심정으로 감히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주저 앉아 있다. 마리아의 의상을 보면 앞가슴이 크게 파인 것으로 이런 의상은 성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마리아가 세상열락을 쫓았고 허영스런 생활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리아의 목에 걸쳤던 화려한 목걸이가 떨어져 나가고 있는 것은 그가 비로소 세상 물질을 부인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브르미술관 소장.



로마가톨릭과 기독교의 견해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로마가톨릭은 오래동안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서, 죄 있는 여인으로서, 참회하는 죄인으로서 간주하여 왔다. 그러다가 1969년 과거 수세기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던 내용들을 정리하고 막달라 마리아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라고 주장하는 것을 모두 일축하였다. 이에 따라 바티칸은 로마칼렌다의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내용들을 개정하였고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미사도 추가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막달라 마리아가 죄인이었다는 표현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교회적으로는 공식화되지 않았다. 영국성공회는 막달라 마리아를 성인으로 존경하고 있다. 다른 개신교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와 같은 인물로, 또한 예수의 친구로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와 같은 반열에 두고는 있지만 성인으로 숭배하고 있지는 않다. 개신교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베다니의 마리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다. 예수의 사역 마지막 순간에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다.

 

부활의 예수를 처음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 19세기 러시아의 알렉산더 이바노프의 작품. 막달라 마리아는 처음에는 무덤에서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으나 예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자 그 음성을 듣고 그가 부활하신 예수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음성은 목자가 양을 부르는 음성과 같은 것이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온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하여 알아야 할 사항을 다섯가지로 요약해 본다.

첫째, 교회는 간혹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 중의 사도'로 높이고 있다. 이유는? 막달라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처음으로 안 사람이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가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자 그때서야 그리스도인 것을 알았다. 그 음성은 선한 목자의 음성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부활이라는 기쁜 소식을 다른 사도들에게 처음으로 전한 사람이다. 그런고로 '사도 중의 사도'라고 불러도 마땅할 것이다.

둘째, 성경의 어느 구절을 보더라도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기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고 믿고 있다. 최근의 연구는 창녀가 아니었다는 주장으로 흘러가고 있다.

셋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로부터 귀신 쫓음을 받은 사람이다.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셨다. 막달라 마리아로서는 깨끗한 정신을 갖게 되었으므로 당연히 예수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후로 예수의 가장 헌신적인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넷째, 막달라 마리아는 참으로 용기있는 여인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 당하실 때에 다른 모든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은 예수를 부인하고 흩어져서 자기들의 안위만을 생각하였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제자인 요한과 함께 십자가 아래에서 몇시간에 걸친 고통스러운  장면을 지켜보고 마침내 예수께서 운명하시자 시신을 돌보아 주었다. 로마 군인들이 우글거리는 가운데 꿋꿋하게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켜보았고 애통하였다는 것은 크나큰 용기가 아닐수 없다.

다섯째, 막달라 마리아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살아 있는 것은 그의 참회 때문이다. 온갖 죄악의 생활을 참회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 들인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바리새인인 시몬의 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을 향유로 씻고 자기의 긴 머리칼로 닦았다는 사실은 진정한 참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