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비운의 씨씨

씨씨에 대한 회상

정준극 2009. 10. 5. 13:26

씨씨에 대한 회상

 


몽트로의 씨씨 기념상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가 무대이다. 잘츠부르크의 폰 트랍 해군증령과 견습수녀였던 마리아가 여섯 아이들과 함께 나치를 피하여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로 간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오스카상을 몇 개나 받은 이름난 영화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도레미’, ‘에델바이쓰’와 같은 노래는 흥얼거릴 줄 안다. 하지만 정작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사운드 오브 뮤직’에 대하여 잘 모른다. 안다고 해도 그 영화를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잘츠부르크에 가서 ‘아, 여기가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였구나! 미라벨 공원, 수도원, 결혼식을 올리던 성당......’ 하고 감탄을 하면 그 동네 사람들은 ‘사운드 오브 뮤직이 뭐예유?’라고 물을 정도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아이들 아버지 폰 트랍은 오스트리아 해군의 잠수함 함장이었다. 여기서 우리들은 약간 무언가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바다도 없는 오스트리아에 웬 해군 함장이냐는 궁금증이다. 그건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멀리 이탈리아 북부와 나폴리 공국까지 지배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북부의 대표적인 도시는 트리에스테(Trieste)이다. 루마니아 남단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트리에스테에 막강 오스트리아의 해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다도 없는 주제에 무슨 해군이냐고 핀잔할 필요는 없다. 한편, 실제에 있어서 폰 트랍의 풀 네임은 게오르그 루드비히 폰 트랍으로서 크로아티아 출신의 오스트리아제국 U 보트 함장이었다. 그는 1880년에 태어나 1947년에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2차 대전 말기에 미국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Trapp Family Austrian Relief Inc.(오스트리아 트랍가족 구조기구)를 조직하여 전후에 고통을 받고 있는 잘츠부르크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비엔나의 23구 리징에는 트랍 함장을 기념하는 Trappweg(트랍베그)라는 길이 있다.

 

트리에스테의 엘리사베타(엘리자베트) 기념상. 트리에스테가 합스부르크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는 상징이다.

 

잘츠부르크 사람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전체 국민들에게 있어서 ‘사운드 오브 뮤직’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해도 그건 전혀 흠이 되지 않는다. 개중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이 어떤 영화인지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거야 미국 영화가 아니던가, 에그 그것도 영화라고....’ 하면서 굳이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만일 ‘씨씨’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온 동리 사람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열을 올린다. ‘아, 씨씨! 정말 아름다운 왕비님이셨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하면서 말을 잇지 못한다. 이렇듯 자못 깊은 감회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다시 말해서 만일 씨씨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오스트리아에서 사람대접을 못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비엔나에서....

 

엘라자베트 황비

 

씨씨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그러는가?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하면  모차르트, 요한 슈트라우쓰, 클림트 등을 떠 올리게 된다. 씨씨는 이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생각컨대 씨씨는 오스트리아 사람들로부터 모차르트보다 더 사랑받는 인물일 것이다. 비엔나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씨씨의 모습이 남아 있다. 공원에도 남아 있고 궁전에도 남아 있으며 카페나 호텔, 그리고 박물관에도 남아 있다. 기념품 상점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뒷편에 있는 유명한 자허(Sacher)호텔의 커피 숍에도 씨씨의 초상화가 걸려 있으며 임페리알 호텔의 2층 복도에도 씨씨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씨씨는 모차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클림트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관광상품이기 때문에 기념품 상점에서 씨씨의 모습을 볼수 있다. 슈타츠오퍼 씨씨는 어느 누구보다고 오스트리아 온 국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흠모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근세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왕비였다는 것, 더 할수 없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것, 지극히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것, 이 세 가지가 멜랑즈(Melange)되었기 때문이리라.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의 초상화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합스부르크라는 명칭은 자존심과 같은 것이다. 과거의 화려했던 영화를 회상하는 데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이란 이름만큼 좋은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의 대명사는 K.u.K.이다. Kaiser und Koenig의 줄여서 그렇게 쓰고 있다. 카이저(황제)는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를 말하여 쾨니히(왕)는 헝가리의 왕을 말한다. 오스트리아 사람들, 특히 비엔나 사람들은 과거 화려하였던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제국, 나중에는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영화를 조용하게 간직하면서 살고 있다. 그것이 이 나라 사람들이 현실에 적응하여 살아 갈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씨씨는 그러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왕비였다. 영광과 비운을 함께 겪은 왕비였다. 마치 합스부르크 왕가의 흥망성쇠를 보는 것과 같은 것이 씨씨의 삶이었다. 바로 이 점이 온 국민들로 하여금 씨씨를 사랑하며 동정심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씨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