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비운의 씨씨

탐미적 인생관의 오스트리아인들

정준극 2009. 10. 5. 13:28

탐미적 인생관의 오스트리아인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탐미적이다.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오페라 아리아, 요한 슈트라우쓰의 매혹적인 왈츠, 클림트의 탐미적인 그림, 쉴레의 환상적인 그림.....이들이야 말로 오스트리아를 대변하는 요소이다. 그리고 또 있다. 오스트리아 여인들은 아름답고 명랑하다. 예로부터 수많은 이민족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이다. 그런 나라일수록 여인들은 아름답고 남자들은 멋이 있다. 더구나 오스트리아는 마쟈르족인 헝가리와 같은 나라였다. 동양적인 마쟈르족과의 혼합은 매력적인 여인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정작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성중에는 그리 뛰어난 인물이 없었다. 역사상 유명한 ‘마리 앙뚜아네트’ 역시 이름만큼 아름다운 여인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 여인들의 특징은 눈이 툭 튀어나오고 대체로 뚱뚱한 편이다. 대부분 근친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길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합스부르크 왕가였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왕가가 아닌 독일 바라리아 출신의 씨씨의 경우는 달랐다. 역대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씨씨 만큼 아름다운 왕비는 없었다. 기품과 위엄과 단아함과 교양과 지성의 인물이었다. 씨씨를 흠모하는 사람들은 이 가냘프면서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인 씨씨에 대하여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치하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다시 말하여 탐미적인 요소를 사랑하는 오스트리아 사람들로서 씨씨의 모습은 영원이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움의 표상이 아닐 수 없었다.

 

비엔나 폭스가르텐에 있는 씨씨 기념상 

 

씨씨는 비운의 삶을 살았다. 연약하고 고독하였다. 외로웠다. 외로운 여인은 사랑을 받게 마련이다.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연약함. 바로 이점이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외롭고 연약한 씨씨를 말할 수 없는 고뇌의 길로 끌어 간 것은 황태자의 죽음이었다. 가장 사랑했던 아들의 자살을 보아야 했던 어머니 씨씨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가톨릭 국가에서 자살은 죄악이 아니었던가? 씨씨 자신의 죽음은 또 어떠하였던가? 이름도 없는 이탈리아 무정부주의 청년의 칼에 찔려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죽음의 미학! 이것이야 말로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핵심되는 인생관이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씨씨는 자기들의 모든 이상과 추억과 괴로움과 철학과 미학을 압축하여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국민이 씨씨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하여 사람들이 씨씨에 대하여 흠모와 연민의 정을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그의 영광과 비운이 점철된 생애 때문이다.

 

헝가리의 왕관, 보주, 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