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비운의 씨씨

프란츠 요셉의 족보

정준극 2009. 10. 5. 13:44

프란츠 요셉의 족보

 

먼저 씨씨의 남편인 프란츠 요셉 황제의 족보부터 살펴보는 일이 순서일 것이다. 너무 멀리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겠기에 마리아 테레지아(영어로는 마리아 테레사) 여제로부터 시작해 보자.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최고 전성 시대였다. 서쪽으로는 독일의 일부, 남쪽으로는 스위스 일부와 이탈리아 북부, 동쪽으로는 헝가리, 그리고 보헤미아(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폴랜드 일부가 모두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였다. 잘 아는 대로 유럽 국가들은 왕실 간의 결혼으로 서로 인척을 이루며 지냈다. 그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합스부르크 왕가가 유럽 여러 나라와 혼인으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예들 들어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인 마리 앙뚜아네트가 프랑스의 루이16세와 결혼한 경우는 대표적이다.  공연히 얘기가 곁길로 들어갔음을 사죄하며 다시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프란츠 요셉까지의 족보를 관찰해 보도록 하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마리아 테레자에서 아들 요셉 2세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를 무려 15명이나 두었다(어떤 기록에는 16명). 그 중에서 첫째 아들 요셉 2세가 아버지 프란시스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모차르트는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로부터 요셉2세 기간중에 비엔나에서 활동하였다. 모차르트가 요셉 2세의 부탁으로 오페라 '후궁에서의 도피'를 작곡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요셉 2세 황제는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둘째 아들인 레오폴드가 형님인 요셉 2세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그  레오폴드는 일찍이 스페인 공주 마리아와 결혼하여 다행하게도 몇 명의 자녀를 두었다. 다음 황제 자리는 당연히 레오폴드의 큰 아들 프란츠 2세였다. 유럽의 왕실 족보를 슬며시 들여다보면 같은 이름이나 비슷한 이름 들이 많아서 상당히 혼잡하다. 어쩔 수 없다. ‘그저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마리아 테레자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요셉 2세

 

요셉 2세에서 프란츠 2세

아버지 레오폴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프란츠 2세는 공식적으로 2남 4녀를 두었다. 큰 아들은 페르디난드였다. 페르디난트는 나중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으나 그 역시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동생인 프란츠 샤를르(칼)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는데 아, 글쎄 이 프란츠 샤를르라는 양반이 황제 자리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고 하면서 사양하는 바람에 결국 다음 황제 자리는 프란츠 샤를르의 아들인 청년 프란츠 요셉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프란츠 샤를르가 '신은 황제 자리에 조금도 의향이 없사옵나이다'라고 주장한 것도 실은 형이 죽은후 황제 자리가 자기에게 돌아 온다고 가정했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늙어서 황제고 뭐고 관심이 없을 처지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프란츠 샤를르의 형인 페르디난드 황제는 82세라는 늙은 나이까지 황제를 해 먹는 바람에 그가 죽은 후 동생에게 황제 자리가 온 때에는 아무리 동생이었지만 나이가 76세였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입장에서 황제고 뭐고 귀찮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황제의 친동생으로서 영화라는 영화는 있는 대로 다 누렸으니 황제가 된들 별로 달라질게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악성 베토벤은 바로 요셉 2세와 레오폴드 시대에 비엔나에서 활동하였다.

 

프란츠 2세

 

그건 그렇고, 왕위에 관심이 없는 동생 프란츠 샤를르가 누구하고 결혼 했는가 하니 독일 바바리아 국왕 막시밀리안 요셉의 셋째 딸 조피(Sophie)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바바리아 국왕 막시밀리안은 1남 4녀를 두었다. 큰 아들 루드비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바바리아 국왕이 되었고 둘째인 딸은 프로시아 국왕과 결혼하였다. 셋째인 딸 조피가 바로 앞서서 말한 대로 중매가 잘 들어와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별 영양가도 없는 둘째 아들 프란츠 샤를르와 결혼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나중에 형님 황제가 후사가 없이 요단강을 건너자 영양가 없던 이 프란츠 샤를르 양반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 다음 황제에  오를 처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앞서서 말한 대로 형님 황제가 너무 늙어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프란츠 샤를르는 자기의 인생도 얼마 후면 종 치게 될 운명이서서 황제 자리에 취미 없다는 고상한 선언과 함께 자기 아들을 다음 황제로 적극 추천하였으니 바로 그가 저 유명한 프란츠 요셉(프란츠 요셉 1세)으로 씨씨의 남편이다.  일설에 의하면 프란츠 샤를르라는 양반은 좀 멍청해서 도저히 제국의 황제에 오를 만한 위인이 못되므로 측근에서, 특히 독일 출신의 깐깐하고 성깔 있는 부인(조피)이 적극 만류하였다고 한다. 조피는 자기 아들 프란츠 요셉이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면 그 다음부터는 대비마마인 자기가 궁중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프란츠 2세에서 페르디난드

여기서 잠시 프란츠 요셉의 할아버지인 프란츠 2세의 자녀들에 대한 얘기를 다시한번 짚어 보고자 한다. 프란츠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며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선포하고 프란츠 1세로서 첫번째 황제가 된 인물이다. 프란츠 2세 황제에게는 2남 4녀가 있었다. 장자 페르디난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으나 후사가 없이 죽었고 이에 동생인 프란츠 샤를르가 당연히 다음 황제 자리에 올라야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약간 멍청하기도 했지만 너무 늙어서 자기 아들인 프란츠 요셉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주기로 했다는 얘기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머지 네명의 딸에 대한 얘기를 해 보자면, 큰 딸 마리 루이제(Marie Louise)는 나폴레옹 1세 황제와 결혼하였고, 둘째 딸 레오폴디네(Leopoldine)는 브라질 황제와 결혼하였으며 넷째 딸 카롤리네(Caroline)는 독일 작소니 국왕과 결혼하였다. 대단한 집안이었다. 셋째 딸은? 그냥 지냈다.

 

 

페르디난트 1세 황제

 

페르디난드에서 조카 프란츠 요셉 1세

다시 프란츠 샤를르의 아들 딸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큰 아들 프란츠 요셉이 삼촌인 페르디난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으니 무려 68년이나 오스트리아제국(나중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통치한 주인공으로 바바리아의 엘리자베스, 즉 우리의 주인공 씨씨와 결혼한 인물이다. 프란츠 요셉의 둘째 동생 찰스 루드비히도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찰스 루도비히의 아들 프란츠 페르디난드가 사라예보에서 총탄에 맞아 죽는 바람에 1차 세계 대전이 촉발되었으니 말이다. 프란츠 요셉의 셋째 동생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황제였다. 그 당시 저 멀리 멕시코는 바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제국의 식민지였다. 막시밀리안 멕시코 황제는 멕시코 혁명의 와중에서 총살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프란츠 요셉은 나중에 프란츠 요셉1세로 불리었다. 왈츠의 황제 요한 슈트라우쓰는 프란츠 요셉1세 시대에 활동하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젊은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