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비운의 씨씨

프란츠 요셉 황제의 청혼

정준극 2009. 10. 5. 13:52

프란츠 요셉 황제의 청혼

 

다음날, 바드 이슐의 황실 별장에서는 무도회가 열렸다. 젊은 황제가 초청하는 무도회였다. 엘리자베트의 엄마 루도비카는 큰 딸 헬렌만을 무도회에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작은 딸 엘리자베트를 집에 혼자 두면 또  어딜 쏘아 다닐지 모르기 때문에 함께 데려 가기로 했다. 무도회장은 가벼운 흥분의 도가니였다. 이 자리에서 젊은 황제가 앞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중전마마가 될 새로운 왕비를 선택하여 청혼할 것이라는 뉴스가 기정사실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트의 엄마 루도비카와 황제의 어머니 조피는 짜고 치는 고스톱 처럼 어서 젊은 황제가 헬렌에게 청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의 청혼은 황제가 상대방에게 꽃다발을 건네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무도회장 밖에는 바드 이슐의 시민들이 모여 들어 젊은 황제의 약혼 발표가 있으면 만세를 부르고 불꽃을 쏘아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트리에스테에 도착하여 영접을 받는 씨씨와 프란츠 요셉 황제

  

무도회가 한창인때에 황실의 시종장이 커다란 장미꽃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이제 젊은 황제는 이 장미꽃 바구니를 자기의 미래 신부에게 전달하고 청혼하기만 하면 되었다. 한쪽에 서있는 헬렌의 얼굴이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프란츠 요셉은 장미 꽃 바구니를 한 쪽 구석에 서 있던 엘리자베트에게 전해 주며 정식으로 청혼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좌중이 모두 깜짝 놀랐다. 제일 놀란 것은 황제의 어머니 조피와 엘리자베트의 어머니 루도비카였다. 헬렌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여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억지로 참고 창백한 미소만 띠고 있었다. 황제는 그런 분위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자베트에게 다가서서 말하였다. ‘막시밀리안 공작의 따님 엘리자베트여,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뜻밖의 황제의 청혼에 엘리자베트는 당황하여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옆방으로 도망치듯 비켜갔다. 황제의 청혼이 있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논란이 있을 수 없었다. 무도회에 참가하였던 만조백관들은 '황제 만세, 엘리자베트 공주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중들도 덩달아서 만세를 부르고 불꽃을 쏘아 올렸다. 당시 엘리자베트는 16세, 신랑이 될 프란츠 요셉은 23세였다. 프란츠 요셉이 엘리자베트에게 청혼한 에스플라나데(Esplanade) 10번지의 이 건물은 현재 바드 이슐 시립 박물관(Museum der Stadt Bad Ischl)이다. 이 건물은 1858년 8월 19일 프란츠 요셉 황제와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 공주가 약혼식을 거행한 곳이다. 결혼후인 이듬해 씨씨의 시어머니인 조피(Sophie) 대공부인은 두 사람의 결혼기념으로 바드 이슐에 있는 황실 별장(카이저빌라)을 선물로 주었다. 프란츠 요셉과 씨씨의 가족은 여름이면 카이저빌라에서 지냈다. 프란츠 요셉은 카이저빌라를 '지상천국'이라고 불렀다. 그 지상천국에서 1914년 프란츠 요셉 황제가 세르비아와의 선전포고문에 서명함으로서 1차대전의 신호가 올려졌다. 오늘날 카이저빌라는 프란츠 요셉과 씨씨의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지만 건물의 일부는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씨씨의 약혼식이 열렸던 건물. 현 바드 이슐 시립박물관.

입구의 양쪽에 당시 프란츠 요셉와 씨씨의 모습이 그림으로 걸려 있다.

 

참고삼아 부연하자면 원래 프란츠 요셉 황제와 결혼키로 내정되어 있었던 큰 딸 헬렌(1834-1890)은 이탈리아 토리노공국의 군주계승자인 막시밀리안 안톤 라모랄(Maximilian Anton Lamoral)과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고 살다가 향년 56세로 이탈리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1854년 프란츠 요셉과 씨씨의 결혼 기념으로 조피 대공부인이 선물한 카이저 빌라. 프란츠 요셉 황제는 1914년 세계 제1차 대전을 알리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문을 이곳에서 서명하였다.

 

시어머니 조피의 허탈감

황제의 결혼 상대자는 황제가 직접 선정한 일이어서 어느 누구도 무어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아무리 황제의 어머니라고 해도 황제가 만좌에서 엘리자베트를 장래의 신부로 공표하였으므로 이를 번복할 재주가 없었다. 조피는 엘리자베트가 당황하여 앉아 있는 옆방으로 가서 엘리자베트에게 ‘네가 싫다면 어쩔수 없다. 하지만....황제가 그렇게 정하였으니....’라면서 말을 마무리하지 못하였다. 자기의 원래 계획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허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미 주사위는 던저졌다. 조피가 할수 있는 일은 어린 며느리 후보자(실은 조카딸)를 처음부터 군기를 확 잡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를 깊이 느끼도록 하며 아울러 시어머니인 자기 말에 절대 순종토록 할 심산이었다. 그래서 엘리자베트에게 ‘궁중 예법을 어서 속히 배워야 한다, 프랑스 말도 할줄 알아야 한다, 라틴어도 공부해야한다’ 등등 압박을 주기 시작했다. 결혼식은 다음 해, 엘리자베트가 17살이 되면 하겠다고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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