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비운의 씨씨

화려한 결혼식

정준극 2009. 10. 5. 13:56

화려한 결혼식

 

 

아우구스틴교회에서 거행된 프란츠 요셉 황제와 씨씨의 결혼식

 

바바리아로부터 엘리자베트의 비엔나 입성은 배를 타고 들어오는 것으로 준비 되었다. 비엔나 외곽의 린츠라는 도시로부터 도나우 강을 거슬러 올라와 비엔나의 누쓰도르프(Nussdorf)에 내리는 일정이었다. 화려하게 단장한 배가 준비되었다. 1854년 4월 20일, 엘리자베트는 뮌헨의 정든 집을 떠나 린츠로 향하였다. 린츠에서 왕궁 영접사의 영접을 받은 엘리자베트는 4월 22일 해군 제독의 안내를 받아 배를 타고 비엔나에 도착하였다. 도나우 강변 누쓰도르프의 선창에는 커다란 환영 건물이 세워졌다. 황제가 직접 마중하였다. 구름같이 몰려든 시민들은 환호를 연발하였다. 호프부르크 궁전에 여장을 푼 엘리자베트는 이틀 후인 4월 22일 호프부르크 궁전에 부속되어 있는 아우구스틴 성당에서 예식을 올렸다. 황실 전용의 결혼교회였다. 마리아 테레제도 이 교회에서 결혼하였으며 나중에 황태자 루돌프와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도 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아무튼 젊은 황제 프란츠 요셉과 아름다운 왕비 엘리자베트의 결혼식은 온 유럽이 떠들썩할 정도로 대단한 축제 분위기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고종황제 시절로서 대원군과 민비가 서로 세력 다툼을 하는 바람에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그런 결혼식이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비엔나 시민들은 아름다운 왕비를 보려고 거리로 몰려 나왔다. ‘황제 만세! 씨씨 만세!’...시민들은 엘리자베스의 애칭을 부르며 환호하였다. 성당이라는 성당에서는 모두 축하의 종이 울렸다.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수없이 있었다. 밤새 축포가 터져 비엔나의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축하 무도회가 호프부르크의 대연회장에서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 헝가리의 귀족들도 대거 참가하였다. 엘리자베트의 고향 뮌헨, 그리고 황제가 씨씨에게 청혼하였던 바드 이슐의 감회는 남달랐다. 이렇게 하여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제국의 왕비가 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

 

힘겨운 궁정 생활

어린 왕비 엘리자베트에게 이제 자유라는 것은 사라졌다. 모든 것이 왕실의 법도에 따라 철저하게 규율적으로 이루어졌다. 시종 노릇을 하는 귀족 부인들은 어린 새댁 엘리자베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참견하였다. ‘밥을 먹을 때는 이렇게 먹으셔야 하옵니다. 세수는 이 시간에 하셔야 하옵니다. 오후 2시 5분에는 아무개 공작부인을 만나셔야 하옵니다. 공작부인과 얘기 나눌 때에는 이러이러한 말씀을 하옵소서. 침수에는 10시 35분에 드셔야 하옵니다. 화장실에는 우리 시종들과 같이 가셔야 하옵니다.....’등등 실로 개인적인 시간은 한 치도 없었다. 17세의 어린 왕비에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더구나 시어머니 되는 이모 조피의 간섭과 '너의 친정에서는 이렇게 배웠냐?'라면서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일은 한계를 지난 것이었다. 저 멀리 고향 집을 떠나서 비엔나의 어마어마한 궁전에 살아야 하는 씨씨는 점점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 귀찮았다. 그래서 간혹 엉뚱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잠옷 차림으로 남편 프란츠 요셉 황제가 신하들과 회의를 하는 장소에 들어와 '여보, 언제 끝나?'라고 말하는 것 등이었다. 이런 엉뚱한 행동들은 결국 시어머니 조피의 마음에 한가지 결심을 하도록 해주었다. '손자 손녀가 생기면 며느리에게 맡길수 없다. 내가 직접 내 방식대로 키우겠다'는 결심이었다.

 

씨씨의 시어머니인 조피의 젊은 시절

 

그래도 신혼 처음에는 남편 프란츠 요셉의 다정한 말이나마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의 얼굴을 구경조차 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공식적인 만찬석상 등에서야 얼굴을 볼수 있었지만 옛날 강가에서 만나 웃고 떠들던 시절처럼 즐거운 시간은 아니었다. 남편 프란츠 요셉은 실로 공사다망했다. 대 제국의 황제로서 프란츠 요셉이 해야 할 업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젊은 황제 프란츠 요셉은 일벌레였다. 자기의 집무실에 아예 작은 침대를 놓고 밤이 늦으면 아예 그곳에서 쓰러져 잤다. 이렇듯 국정에 소홀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시간을 좁혀 놓는 것이었다. ‘이, 이게 말로만 듣던 왕비의 생활이란 말인가? 어찌하여 내가 청혼을 받아 들였단 말인가, 이게 어디 지옥이나 다름없는 생활이지 뭐란 말인가? 아~~~’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왕실에 적응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오스트리아제국의 왕비 엘리자베트(씨씨). 머리에는 다이아몬드 스타라고 부르는 핀을 달았다.

 

첫 딸과의 생이별

결혼한 이듬해, 18세의 왕비 씨씨는 첫 딸을 낳았다. 시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조피(Sophie)라고 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씨씨의 손에 이 아이를 기르면 안 된다고 생각을 실현키로 했다. 제 멋대로 기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태어 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어머니 조피는 씨씨와 협의도 없이 어린 딸 조피를 데려갔다. 씨씨는 딸을 돌려 달라고 애걸하였지만 시어머니는 완강하였다. 왕실 법도대로 기르려면 씨씨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씨씨의 실망은 무척 컸다. 실망이라기보다는 분노였다. 이로부터 씨씨와 시어머니와의 사이는 냉전으로 일관했다. 첫 딸 조피는 태어 난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씨씨는 이 모든 것이 시어머니의 그 못된 주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소연 할 데가 없었다.

 

씨씨의 가족

 

큰 딸 조피가 태어난 이듬해 씨씨는 연년생으로 둘째 딸 기젤라를 낳았다. 기젤라는 오래오래 살았다. 바바리아 왕국의 레오폴드라는 사람과 결혼하여 76세까지 살았다. 둘째 딸 기젤라가 태어 난지 2년후, 씨씨는 기다리던 왕자 아기씨를 생산하였다. 루돌프였다. 그리고 10년 후, 셋째 딸 발레리를 낳았다. 셋째 딸도 오래 살아서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씨씨의 둘째 딸 기젤라(왼쪽)와 셋째 딸 마리-발레리(오른쪽). 마리-발레리는 아버지인 프란츠 요셉 황제를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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