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비운의 씨씨

황태자의 죽음

정준극 2009. 10. 5. 13:59

황태자의 죽음

 

루돌프 황태자. 30세의 젊은 나이로 비엔나 근교의 마이엘링의 황실사냥산장에서 애인 마리아와 함께 자살했다.

 

프란츠 요셉과 씨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제국의 황태자 루돌프는 3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과 작별하였다. 비엔나 근교 마이엘링(Meyerling)에 있는 황실 사냥 별장에서 애인 마리아와 함께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루돌프는 24세 때에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와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다.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트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루돌프의 결혼은 일종의 정략결혼이었기에 항상 자기 부인에 대하여 일종의 거부 반응을 가지고 있었다. 루돌프는 친구들과 어울려 허황된 생활로 일관했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 프란츠 요셉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아버지 프란츠 요셉이 너무 오래 황제 자리에 있기 때문에 황태자이지만 언제 황제에 오를지 모르는 불만도 있었다. 게다가 당시, 제국의 일원인 헝가리에서는 합스부르크제국에서 독립하려는 기운이 있었고 그 와중에 루돌프가 헝가리 왕으로 추대되는 비밀 움직임이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아버지 프란츠 요셉은 헝가리가 제국으로부터 이탈 하려는 움직임을 철저히 봉쇄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멀어 질대로 멀어졌다. 불쌍한 어머니 씨씨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를 배척하였다는 얘기도 있다. 아버지 프란츠 요셉은 공사다망한 국정 때문에 어머니 씨씨를 잘 대하여 주지 않았다. 이 점도 불만이었다.

 

루돌프 황태자와 동반자살한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 (오른쪽: 당시 17세). 왼쪽은 마리아와 루돌프 황태자의 인연을 주선해준 라리슈(Larisch) 백작부인.

 

루돌프 황태자는 어느날 비엔나의 프라터(Prater) 유원지에서 마리아라고 하는 젊은 아가씨를 만난다. 몰락한 남작 집안의 규수였다. 17세의 그 아가씨는 마리아 베체라(Maria Vetsera) 남작부인이라고 했다. 마리아는 청초하며 아름다웠다. 루돌프는 자기 부인 스테파니 황태자비에게서 느끼지 못하였던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스테파니 황태자비는 친정인 벨지움 왕실을 등에 업고 루돌프에게 바가지만 긁어 댔다. ‘당신은 언제 황제가 될거야요? 앙? 아버지라는 사람이 저렇게 늙어 꼬부라질 때까지 황제 노릇을 하고 있으니..나 원 참, 우리 차례는 언제나 온단 말이 예요? 아이구, 내 팔자야....’ 뭐 이런 투정이었다. 루돌프는 그런 잔소리를 듣기 싫어했다. 게다가 스테파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머니인 씨씨를 좋지 못하게 얘기하는 습관이 있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어머니 씨씨에 대하여 뭐라고 구스렁거리는 데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는 부부싸움이 그칠 새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리아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인 줄을 알면서도 계속 밀회를 하였다. 아버지 프란츠 요셉은 이런 아들을 가만히 방치할 수 없었다. 아버지 황제는 아들을 제국 육균의 연대장으로 임명하여 지방순회 시찰을 다니게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마리아를 비밀리에 외국으로 추방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못 만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 루돌프는 아버지 황제가 자기를 신임하여서 연대장을 시킨 줄 알고 무척 고마워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마리아와 만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아버지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루돌프 황태자의 애인 마리아 베체라(Maria Vetsera) 남작부인. 당시 방년 17세.

 

어머니 씨씨는 두 사람의 사랑을 묵인해 주었다. 아들의 심정을 이해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묵인아래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서는 사랑 할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결국 죽음의 길을 택하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비엔나 근교에 있는 마이엘링 산장의 겨울밤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간혹 길 잃은 어린 사슴이 엄마를 찾아 헤매는 소리와 눈내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1889년 1월 30일 새벽. 마이엘링의 들판에는 적막을 깨트리고 총소리가 울펴 퍼졌다. 루돌프는 권총으로 먼저 마리아를 쏘고 그 후에 자기의 머리를 쏘아 죽음을 택하였다. 아침 늦게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어머니 씨씨에게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은 처참 그 자체였다. 권총으로 머리를 쏘았기 때문에 머리의 절반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아들의 주검 앞에서 씨씨는 말문을 열지 못했다. 가슴에 응어리진 한이 점점 비중을 더해갔을 뿐이었다. 꺄뜨리느 드뇌브와 오마 샤리프가 주연한 ‘마이엘링’(Meyerling)이라는 영화는 루돌프 황태자와 마리아의 사랑과 죽음을 그린 것이다. 루돌프는 마리아 테레자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왕실 사람들이 영면하여있는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 뒷편 카푸친(Capuchin) 성당의 카이저그루프트(Kaisergruft)에 안치 되었다. 그후 프란츠 요셉 황제와 씨씨의 시신도 이곳에 함께 안치되어 있음은 역사의 단편이다. 한편, 마리아는 비엔나 북쪽 마이엘링 인근에 있는 한적한 하일리겐크로이츠의 조그만 시토수도원 숲속공동묘지(Waldfriedhof)에 쓸쓸하게 매장되었다. 비엔나에 매장하지 말하는 황제의 지시때문에 하일리겐크로이츠(성십자)수도원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루돌프황태자의 사후 사진. 머리에 총을 쏘았기 때문에 머리 윗편이 모두 손상되어 붕대로 감아 놓았다.

마리아의 사후 사진도 얼굴이 너무 손상되어 형체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 였다고 한다.

 

루돌프 황태자와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이 동반자살한 마이엘링의 황실사냥숙사. 지금은 교회로 개조하였다. 교회 안에는 루돌프를 기념하는 작은 전시실이 있다. 

마이엘링에서 가까운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에 속한 공동묘지에 있는 마리아 베체라의 묘지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와 결혼한 직후의 기념사진. 두 사람은 딸을 하나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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