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비운의 씨씨

비참하고 고독한 최후

정준극 2009. 10. 5. 14:07

씨씨의 비참한 죽음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겪어야 했던 씨씨는 육체적으로 몹씨 쇠약해 있었다. 한때는 폐염에 걸리기도 하여 건조한 공기를 찾아 이탈리아 북부에서 지내야 하기도 했다. 비엔나의 겨울 공기는 눅눅하고 차가워서 건강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씨씨는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 비엔나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씨씨를 끔찍이 사랑하였던 프란츠 요셉 황제였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상처까지 씻어 주지는 못했다. 프란츠 요셉은 복잡한 국사 때문에 씨씨에게 따뜻한 마음을 건네주지 못했다. 씨씨는 헝가리를 사랑하였다. 부다페스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괴델레(Godollo)는 씨씨가 애착을 가지고 머무르던 곳이었다. 괴델레 궁전은 유럽에서 두번째로 규모가 큰 바로크 건물로서 프란츠 요셉 황제가 씨씨의 여름 별장으로 구입한 것이다.

 

씨씨의 여름 별장이던 부다페스트 부근의 괴델레 궁전

 

1898년 9월, 씨씨는 스위스의 제네바 호반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씨씨가 52세 되던 해였다. 이르마(Irma) 백작부인이 충심으로 씨씨를 시종하고 있지만 씨씨는 건강은 정말 예전같지 않고 더욱 쇠약해 있었다. 9월 18일(어떤 기록에는 10월 17일), 이날도 간단한 점심을 마친 씨씨는 두툼한 옷을 걸쳐 입고 제네바 호반을 산책한후 몽트로(Montreaux)로 가는 증기선을 타려했다. 오후 1시 30분쯤이었다. 씨씨는 혼자 걷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시녀인 이르마 백작부인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저만치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몇명의 경호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 때 갑자기 웬 청년이 씨씨에게 덤벼들어 송곳 같은 뾰족한 것으로 가슴을(혹은 옆구리를) 찔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범인은 뒤따르던 경호원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처음에 씨씨는 찔린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배에 탄후 가슴을 움켜쥐고 괴로워하였다. 이르마 백작 부인은 씨씨가 또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겨우 배에 오른 씨씨는 나무토막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그제서야 백작 부인은 무슨 변고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 쫓아갔다. 이렇게 하여 화려했지만 비운에 점철되어있던 한 여인의 인생은 마감을 마지하게 되었다. 아들의 죽음 이후, 씨씨는 세상 떠날 때까지 줄곧 검은 드레스만 입었다. 운명의 그날도 마치 자기의 죽음을 예견이나 한듯 검은 상복을 입고 산책하고 있었다. 씨씨를 찌른 송곳 같은 칼은 비엔나의 씨씨 기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체포되어 가는 씨씨의 살해범 루이지 루체니

 

씨씨를 송곳 무기로 찌른 부랑자는 루이지 루체니(Luigi Lucheni: 1873-1910)라는 무정부주의자였다. 파리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인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버린 그런 아이로 자라난 사람이었다. 왕정 반대주의자였다. 누구의 사주를 받은 행동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 결정한 범행이었다. 루이지는 이탈리아 군대에서 3년반을 복무했다. 제대한 후에 그는 스위스로 이민을 갔다. 그는 스위스에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키웠다. 루이지는 엘리트 또는 탄압하는 상류층의 누군가를 죽이려고 생각했다. 아무라도 좋았다. 그래서 신문에 나기를 원했다. 원래는 이탈리아의 움베르토(Umberto) 국왕을 암살 대상으로 삼았었다고 한다. 그것이 여의치 않자 다음으로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자인 오를레앙 공 필립을 암살하려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립 대공의 스케줄이 달라지는 바람에 누구던지 왕족을 죽이려고 계획을 바꾸었으며 비운의 씨씨가 희생물로 선택된 것이었다. 범인 루이지는 씨씨가 누구인지 몰랐었다고 한다. 다만 여러 명의 시종과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라면 상당한 귀족이라고만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범인은 얼마 되지 않아 체포되었다. 사형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며칠후 그는 감방 안에서 벨트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당시 루이지는 25세였다. 씨씨의 피살은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씨씨가 피살된 다음달인 11월, 로마에서 '무정부주의자들로부터 사회를 방어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12월 21일까지 거의 한달 동안 열려 무정부주의자들로부터 사회를 방어하기 위한 여러 대책들이 강구되었다. 회의에서는 무정부주의(Anarchism)을 '사회조직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파괴하려는 행위'라고 규정하였다.

  

 

엘리자베트 왕비의 시신이 비엔나의 서부역에 도착하였을 때의 모습

 

 외로운 귀환

씨씨의 시신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기차로 비엔나의 서부역에 도착하였다. 먹구름이 잔뜩 찌푸린 그런 오후였다. 여섯 마리의 검은 말이 끄는 마차에 씨씨의 관이 놓여졌다. 제국의 근위병과 헝가리 근위병이 호프부르크 궁전까지 도열하여 운구를 경호하였다. 연도를 메운 시민들은 목이 메어 울먹였다. 하지만 감히 누구도 울음을 터트리지 못했다. 비통한 심정에 짓눌려서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상점들과 관공서는 모두 문을 닫았다. 카페와 식당들도 감히 문을 열수 없었다. 건물마다 검은 조기가 휘날렸다. 성당의 종소리는 구슬프게 울렸다. 이 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고의 비통한 날이었다. 씨씨의 시신은 호프부르크의 궁정교회(부르크카펠레)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그후 예에 의하여 세 곳을 나누어져 안치되었다. 심장은 씨씨가 프란츠 요셉과 결혼식을 올렸던 아우구스틴(Augustine) 성당 지하에 안치되었다. 내장은 성 슈테판 성당의 지하에 모셔졌다. 그리고 시신은 합스부르크 왕실 전용의 영묘인 카푸친 성당 지하에 모셔졌다. 아들 루돌프의 옆이었다. 나중에 프란츠 요셉도 그 자리에 합류했다.  

 

씨씨의 마지막 안식처인 비엔나 중심가의 카푸친 교회. 교회 지하실에 있는 카이저그루프트(Kaisergruft)에 남편 프란츠 요셉, 아들 루돌프와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다.

 

그로부터 8년후 비엔나 폴크스가르텐(국민공원) 한 구석에 씨씨의 모습을 담은 하얀 대리석 기념상이 세워졌다. 평소의 단아하고 기품있는 모습을 볼수 있는 아름다운 씨씨의 대리석 좌상이었다. 제막식에는 프란츠 요셉 황제가 직접 참석하였다. 지금도 매일처럼 이 기념상에는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모르는 꽃송이들이 외로운 씨씨를 위로하고 있다. 씨씨의 기념상은 이탈리아 북부 트리에스테(Trieste)등에도 있다. 한 때 이탈리아 북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었다. 

 

비엔나 폭스가르텐(Volkgarten)에 있는 엘리자베트 왕비 (씨씨) 기념상 앞에서 필자

 

엘리자베트 왕비의 기념상은 다음과 같은 8개 지역에 있다.

 

1. 비엔나 폭스가르텐(Volksgarten): 프란츠 요셉 황제가 직접 제막

2. 비엔나 서부역 구내(Westbahnhof): 스위스에서 죽임을 당한 씨씨의 시신이 비엔나에 도착한 역

3. 그리스의 코르푸(Corfu)섬의 아킬레이온(Achilleion) 정원: 씨씨가 요양을 위해 지내던 곳

4. 포르투갈 령 대서양 마데이라(Madeira)섬의 푸샬(Funchal): 씨씨가 요양을 위해 지낸 곳

5. 헝가리 남단 세제드(Szeged): 프란츠 요셉이 특별히 방문하여 홍수로 폐허가 된 도시를 발전시킨 곳

6.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Trieste): 원래 1912년 세운 기념상이 있었으나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후 철거되었다가 최근 다시 건립

7. 현 우크라이나(당시 부코비나) 체르니브치(Chernivtsi: 당시 Czernowitz)

8. 헝가리의 미스콜츠(Miskolc): 12898년 건립한 흉상의 복제품

9. 비엔나 루돌프스하임에 있는 엘리자베트 기념 병원의 정원에 흉상

 

 헝가리의 세게드에 있는 씨씨 기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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