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비운의 씨씨

씨씨와 루돌프에 대한 에피소드

정준극 2009. 10. 18. 22:58

씨씨와 루돌프에 대한 에피소드

 

예술세계에 나타난 엘리자베트 왕비(씨씨)와 루돌프 황태자에 대한 에피소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여러 내용 중에서 몇가지 특이한 스토리를 점검해 보았다. 영화 ‘마이엘링’의 스토리가 가장 표준적이라고 한다.

 

루돌프 황태자의 탄생. 모든 여신들과 천사들이 축하를 보내었다.

 

영화 ‘마이엘링’(Mayerling)

루돌프 황태자와 마리아 베체라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영화로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1936년도에 샤를르 보아이에와 다니엘르 다류가 주연한 '마이엘링'이 있고 1968년도 MGM이 제작한 '마이엘링'이 있다. MGM의 '마이엘링'에는 당대의 명배우들인 오마 샤리프(루돌프 황태자), 캬트리느 드뇌브(루돌프 황태자의 애인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 제임스 메이슨(프란츠 요셉 황제), 에바 가드너(엘리자베스 왕비), 즈느비에브 페이지(라리슈 백작부인) 등이 출연하였다. 테렌스 영(Terence Young)이 각본을 쓰고 감독했다. 클로드 아네(Claude Anet)의 소설 Meyerling(마이엘링)과 미셀 아르놀(Michel Arnold)의 소설 L'Archiduc(대공)를 참고했으며 1936년도 영화인 ‘마이엘링’도 참고하였다. MGM의 영화 ‘마이엘링’은 역사적 사실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화려한 세트와 의상 등으로 환영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悲愁’(비수)라는 제목으로 1969년에 대한극장에서 개봉되었다.

 

프랑스의 샤를르 보아이에(루돌프)와 다니엘르 다류(마리아)가 주연한 1930년도의 영화 '마이엘링'

 

오스트리아제국의 황태자인 루돌프는 아버지인 프란츠 요셉 황제와 자주 의견충돌을 빚는다. 루돌프 황태자는 오스트리아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할 것을 요구하지만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는 보수를 주장한다. 루돌프 황태자는 오스트리아제국의 범주 내에서 헝가리의 독립을 지지한다. 그렇지만 프란츠 요셉 황제는 제국의 분열을 원치 않는다. 루돌프는 자기가 잘못된 시절에 태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루돌프는 벨기에 스테파니 공주와의 사랑 없는 결혼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아 방황한다. 그럴 때에 청순하고 아름다운 아가씨 마리아 베체라를 만난다. 한때 루돌프의 정부였던 라리슈백작부인이 루돌프의 심중을 헤아려서 다리를 놓는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황태자 루돌프의 외도를 더 이상 좌시할수 없었다. 황제는 루돌프가 다른 일에 신경을 쓰도록 제국군대의 감찰관으로 임명하여 각지를 방문토록 한다. 한편, 황제는 마리아 베체라를 다른 나라로 나가서 살도록 한다. 루돌프의 눈길에서 떨어지도록 한 작전이었다. 나중에 황제의 계책을 알아차린 루돌프는 더구나 황제에게 반발한다. 두 사람은 자기들의 사랑을 누릴수 있는 세상에서 살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동반자살을 감행한다. 황실의 사냥숙사인 마이엘링에서였다.

테렌스 영 감독의 1968년도 영화 '마이엘링'에서 루돌프 황태자역의 오마 샤리프와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 역의 카트리느 드뇌브의 모습. 제임스 메이슨은 프란츠 요셉 황제로, 에바 가드너는 엘리자베트 왕비(씨씨)로 등장한다.

 

당대의 명배우들이 총출연한 영화였기에 기대가 컸지만 실제 인물들과의 이미지가 맞지 않아 미흡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씨씨(엘리자베트 왕비)역의 에바 가드너는 지나치게 육감적이며 체격도 유사성이 없어서 이미지 창조에 어려움이 있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 역할의 제임스 메이슨은 역시 중후한 연기로서 그나마 가장 적격이었다. 루돌프 역의 오마 샤리프는 훌륭한 연기로서 전편을 압도하였으나 역시 실제 루돌프 황태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어서 혼돈을 주었다는 후문이다. 마리아 역의 캬트리느 드뇌브는 17세의 처녀로는 보이지 않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어 역시 미흡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었다. 비엔나에서는 칼스키르헤, 쇤브룬궁전, 호프부르크 등에서 로케이션이 이루어져 비엔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었다.

 

마이엘링에서의 루돌프. 프란츠 요제프 황제, 엘리자베트 황비, 스테파니 공주, 엘리자베트 공주

 

뮤지컬 ‘루돌프’(Rudolf)

뮤지컬 ‘루돌프’는 프랭크 빌트호른(Frank Wildhorn)이 작곡을 맡았고 대본은 잭 머피(Jack Murphy)가 맡았다. 이 뮤지컬의 내용은 프레데릭 모턴(Frederick Morton)의 소설 A Nervous Splendor: Vienna 1888-1889(과민한 찬란함: 비엔나 1888-1889)에 기반을 두었다고 한다. 뮤지컬의 처음 타이틀은 Vienna: Affäre Mayerling(비엔나: 마이엘링 어페어), 그리고 Rudolf: The Last Kiss(루돌프: 마지막 키스)로 했다가 최종적으로 루돌프라고 결정했다. 1889년 마이엘링에서의 죽음은 자살을 가장한 살인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제국의 압력이 루돌프의 양어깨를 짓누른다. 루돌프는 아버지인 프란츠 요셉 황제와 정치적으로 또한 개인적으로 충돌을 빚는다. 벨기에의 공주 스테파니와 정략적으로 결혼한 루돌프의 결혼생활은 우연히 17세의 청순한 아가씨 마리아를 만나고부터 돌파구를 찾는다. 두 사람의 밀회는 에두아르드 타페(Eduard Taffe)수상의 눈길에서 벗어날수가 없었다. 타페 수상은 두 사람의 밀화를 루돌프를 정치적으로 파멸시키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프란츠 요셉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타페 수상은 루돌프가 진보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데 대하여 경계하고 있었다. 헝가리 독립주의자들은 비밀리에 루돌프를 새로운 왕국의 왕으로 추대코자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타페 수상은 헝가리 독립주의자들을 체포함으로서 루돌프의 입지를 더욱 벼랑으로 몰고 간다. 결국 루돌프는 죽음을 택하는 길밖에 없었다. 가톨릭에서 자살은 죄악이지만 그길만이 최선의 방책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아버지인 프란츠 요셉 황제를 반대하여 자살했다고 하면 합스부르크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므로 마리아 베체라라는 아가씨와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길을 택하였다.

 

 루돌프와 마리아. 오스트리아 영화에서.

 

뮤지컬 ‘루돌프’는 2005년 12월 16일 뉴욕시에서 첫선을 보였다. 그때 루돌프역은 랍 에반(Rob Evan), 마리아역은 브란디 버카르트(Brandi Burkhard), 타페 수상역은 마이클 루이스(Michael Lewis)가 맡았다. 그러나 뉴욕시에서의 공연은 리허설과 마찬가지였다. 세계 초연은 2006년 5월 26일 부다페스트의 Operett Szinhaz 극장에서 있었다. 비엔나 극장연맹(Vereinigte Buhnen Wien), 부다페스트 오페레타 극장, 체게드(Szeged)야외음악페스트벌가 공동 제작했다. 대사는 헝가리어로 번역되었다. 이어 7월 28일 체게드 야외극장에서 다시 공연되었다. 이후 겨울에는 부다페스트에서, 여름에는 체게드에서 번갈아가며 공연되었다. 비엔나 공연은 2009년 2월 26일 라이문트극장(Raimund Theater)에서 있었다. 루돌프 역은 드류 자리히(Drew Sarich), 마리아역은 리자 안토니(Lisa Antoni), 타페 수상 역은 우베 크뢰거(Uwe Kröger)였다.

 

루돌프 황태자 초상화

 

뮤지컬 ‘엘리자베트’(Elisabeth)

뮤지컬 ‘엘리자베트’는 비엔나극장연맹(VBW)의 의뢰하여 제작된 작품이다. 대본은 원작소설을 쓴 미하엘 쿤체(Michael Kunze)가 맡았으며 음악은 질베스터 르베이(Sylbeter Levay)가 담당했다. 뮤지컬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왕비인 엘리자베트의 비극적인 죽음을 다룬 것이다. 뮤지컬 ‘엘리자베트’는 초연 이래 7개국어로 번역되어 각국에서 공연되었으며 비엔나에서 1997년 1월 초연된 이래 2009년까지 9백만명 정도가 관람하였다. 독일어로 된 뮤지컬중 가장 성공한 작품이다. ‘엘리자베트’의 스토리는 전통적인 스토리와는 사뭇 다르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루돌프 황태자의 모습. 1889년

 

이야기는 연옥(Purgatory)에서 시작한다. 제네바 호반에서 엘리자베트왕비를 송곳처럼 뾰족한 흉기로 찔러 죽인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체니(Luigi Lucheni)를 마지막으로 심판하는 자리이다. 루체니는 지난 1백여년 동안 지옥에서 온갖 형벌을 받았었다. 루체니는 자기가 엘리자베트를 죽인 것은 자기가 죽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아서그랬다는 주장이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엘리자베트왕비 자신과 그의 연인이라고 털어놓았다. 심판관이 ‘연인이란 누굴 말하는 것이냐?’라고 다그치자 루체니는 엘리자베트가 평생에 걸쳐 바로 ‘죽음’이라는 존재의 연인이었다고 밝힌다. 이제 어떻게 하여 엘리자베트가 죽음의 연인이 되었는지 설명이 시작된다.

 

영화 '마이엘링'에서 루돌프황태자(오마르 샤리프)와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캬트리느 드뇌브)

 

꽃다운 소녀시절, 씨씨(엘리자베트)는 자기에게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어떤 젊은이로부터 처음으로 죽음과 마주친다. 사랑이란 것을 몰랐던 그에게 사랑의 이름으로 접근한 그 젊은이로 인하여 씨씨는 평생을 사랑을 증오하며 살게 된다. 그 젊은이는 프란츠 요셉 황제였다. 프란츠 요셉은 자기의 어머니인 조피(Sophie)에게 골탕을 먹이기 위해 자기의 신부로서 씨씨를 택한다. 그로부터 프란츠 요셉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결국은 합스부르크의 종말을 불러오게 된다. 씨씨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동화와 같은 결혼에 대하여 세월이 지날수록 크게 후회한다. 씨씨는 프란츠 요셉과의 결혼이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라고 생각한다. 씨씨는 그토록 사랑을 앞세웠던 남편 프란츠 요셉으로부터 소외되며 시어머니로부터 심리적인 학대를 받는다. 남편은 정무에 얽매어서 씨씨를 보살펴 줄 겨를이 없고 소유욕이 강한 시어머니는 아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씨씨를 핍박한다. 씨씨는 고독함으로 인하여 절망에 빠진다. 오직 한가지, 씨씨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두움과 관능적인 죽음의 그림자였다. 그러나 씨씨는 죽음과의 관계로 빠져 들기를 내키지 않아한다. 죽음은 씨씨를 동반하여 어둠의 세계로 가려고 했으나 씨씨가 선뜻 나서지 씨씨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우선 씨씨의 첫딸을 데려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씨는 죽음에 굴복하기를 마다한다.

 

뮤지컬 '루돌프'의 포스터. 비엔나의 라이문트 극장에서의 공연

 

첫 딸을 잃은 씨씨는 그후 세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모두 시어머니인 조피가 데려다가 길렀다. 씨씨가 할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빼앗긴 씨씨는 무엇이라도 되찾기 위해 점점 냉혹하고 이기적인 여인으로 변해간다. 씨씨는 비엔나의 궁전을 빠져나와 몇 년씩이나 이곳저곳을 방랑하듯 여행하기 시작한다. 공허하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씨씨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연합을 성사시킴으로서 남편과도 화합의 길을 찾는다. 하지만 예민한 성격의 진보적인 아들 루돌프는 어머니 씨씨가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을 유지토록 한데 대하여 매우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체제에 크게 실망한 루돌프는 죽음과 깊이 연결되기 시작한다. 마침내 루돌프는 마이엘링에서 정부 마리아 베체라라는 아가씨와 동반자살을 함으로서 죽음을 포옹한다. 씨씨는 아들의 죽음으로 심한 절망감에 빠진다. 씨씨는 죽음에게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씨씨의 연인인 죽음이 오히려 씨씨의 간청을 조소로서 거절한다.

 

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 황태자비

 

그로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씨씨는 아들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검은 상복을 벗지 않은채 아직도 방황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프란츠 요셉은 그러한 씨씨를 간혹 방문하여 제발 비엔나의 집으로 돌아가자고 부탁한다. 프란츠 요셉은 과거의 비극을 발판으로 사랑이 넘치는 새로운 결혼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씨씨는 이를 거절하였다. 씨씨는 사랑만으로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할수 없다고 말한다. 마침내 죽음이 씨씨의 간청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프란츠 요셉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무서운 환상을 본다. 프란츠 요셉은 마침내 자기의 신비한 라이벌인 죽음을 만난다. 프란츠 요셉은 죽음이 루체니라는 청년에게 흉기를 던져주는 장면을 목격했다. 프란츠 요셉은 씨씨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황제의 왕관이 너무 무거워서 그만 주저않고 만다. 1898년 9월 10일, 루이지 루체니가 제네바에서 페리보트를 기다리던 씨씨의 가슴을 흉기로 찌른다. 씨씨는 마침내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죽음을 포옹하며 숨을 거둔다.

 

루돌프 황태자와 동반자살한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사진)

 

1992년 9월 3일 비엔나의 테어타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후 1997년 1월까지 연속 공연되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후 1997년 9월 4일 다시 공연되기 시작했다. 2002년 10월에는 뮤지컬 ‘엘리자베트’ 공연 10주년 기념으로 비엔나 콘체르트하우스(Konzerthaus)에서 연주회 형식의 공연이 있었다. 2003년 10월 3일, 뮤지컬 ‘엘리자베트’는 약간 손질을 가한후 다시 공연되어 2005년 12월 4일까지 연속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뮤지컬 ‘엘리자베트’는 세계 각국에서 공연되어 환영을 받았다. 특히 일본에서 환영을 받았다. 다카라주카 그랜드극장과 토쿄 다카라주카극장에서는 1966년에 첫 공연을 가진 이래 현재 까지 연속 공연되고 있다. 이밖에 헝가리,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핀랜드, 스위스 등지에서 절찬리에 공연되었다.

 

루돌프(오마 샤리프)와 마리아(꺄트리느 드뇌브)

 

발레 ‘씨씨’(Sissi)

스위스의 유명한 무용가 겸 안무가인 모리스 브자르(Maurice Bejart)가 안무를 맡은 발레작품으로 프랑스의 세계적 발레리나인 실비 귀옘(Sylvie Guillem)이 마리아 역을 맡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에 의해 벨기에의 스테파니공주와 정략결혼을 한 루돌프 황태자는 결혼에 실증을 느껴서 다른 여자들과 열락을 즐긴다. 그중 하나가 친척이 되는 마리 라리슈(Marie Larisch)백작부인이었다. 그러나 루돌프는 라리슈백작부인에게도 실증을 느낀다. 이에 라리슈백작부인은 루돌프에게 마리아 베체라라고 하는 몰락한 귀족집안의 젊고 순진한 아가씨를 소개해준다. 마리아 베체라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느낀 루돌프는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한다. 프란츠 요셉 황제도 정부가 있었다. 카테리나 슈라트(Katherina Schratt)라고 하는 미모의 배우였다. 엘리자베트왕비(씨씨)는 자기가 집을 떠나 방랑하고 있으므로 남편 프란츠 요셉의 외도를 눈감아 준다. 프란츠 요셉 황제의 어머니인 조피(Sophie)는 이 모든 것이 못마땅하다.

 

루돌프 황태자와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이 동반자살한 마이엘링의 황실사냥숙사. 현재는 교회로 개조하였다.

 

한편, 씨씨에게도 오래전부터 애인이 있었다. 영국의 미들턴(Middleton) 대령이었다. 아들 루돌프는 어머니 씨의 외도를 반대했다. 루돌프에게는 과거의 정부인 라리슈백작부인, 현재의 애인인 소녀와 같은 마리아 베체라남작부인, 그리고 하나 더 있었다. 배우면서 고급 창녀인 미찌 카스파르(Mitzi Caspar)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아들의 불륜을 결코 용납하지 못했다. 카스파르는 경찰에게 고급 정보를 제공하는 일도 하면서 경찰국장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 여자가 황태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전체군주제에 있어서 위험한 일이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결국 카스파르를 멀리 추방한다. 마리아 베체라도 황제에 의해 당연히 추방되었다. 그러나 루돌프가 비엔나로 데려온다. 루돌프는 마리아 베체라와 동반자살을 결심한다. 발레는 마리아 베체라의 삼촌이 마리아의 시신을 하일리겐크로이츠(성십자)수도원의 공동묘지로 안고 가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루돌프 황태자의 애인 마리아 베체라(오른쪽)남작부인과 두 사람을 엮어준 마리 라리슈 백작부인(왼쪽). 일설에 의하면 마리 라리슈 백작부인은 루돌프 황태자의 친척이지만 한때 사귀는 사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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