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성물들/시작하면서

성헬레나는 누구?

정준극 2009. 11. 2. 06:16

성헬레나는 누구?

기독교를 로마국교로 정한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성십자가 등 그리스도의 고난 유물 발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성물을 고찰함에 있어서 헬레나라는 여인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헬레나라는 여인은 나중에 성인으로 받들어져 성헬레나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성헬레나(St Helena)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이다. 헬레나는 비록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서 한참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일단 기독교인이 되고나서는 얼마나 신실하였던지 연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지 순례를 결심하여 예루살렘에 가서 그리스도와 관련된 수많은 유물을 발굴했다. 대표적으로 찾은 성물(聖物)은 성십자가이다. 십자가에 사용했던 못도 발견했다. 성헬레나는 그러한 성물들로 인하여 기독교 신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여인이었다. 로마가톨릭은 헬레나 모후(母后)를 성인으로 시성하였으며 8월 18일을 축일로 정하였고(동방교회는 5월 21일)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에 그를 기리기 위한 채플(예배처)을 마련하고 아름답고 웅장한 기념상을 세워 놓기 까지 했다. 성베드로 대성당의 성헬레나 기념상은 그가 발견했다고 하는 커다란 십자가를 들고 있는 모습니다. 대서양의 고도로서 나폴레옹이 유배되었다가 세상을 떠난 세인트 헬레나(St Helena)섬은 훗날 헬레나 모후가 세상을 떠난 날에 스페인 선원이 처음으로 발견한 섬이어서 그의 이름을 붙였다.

 

바티칸의 성베드로성당에 있는 콘스탄틴 황제의 모후 성헬레나의 기념상. 한손에는 그가 처음 발견한 성십자가를 잡고 있으며 다른 한 손에는 십자가에 사용되었던 못을 들고 있다.

 

헬레나는 3세기 중반(248년)에 니코메디아 만(Nicomedia Gulf)에 있는 드레파눔(Drepanum)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니코메디아는 에게(Aege)해와 흑해가 연결되는 곳에 있는 지역으로 터키의 아시아와 유럽을 분리하는 중요한 지점에 있다. 헬레나는 평민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귀족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와 결혼하였다. 이들은 아들 하나를 두었다. 주후 274년에 태어난 콘스탄틴(Constantine)이었다. 정치적으로 야망이 많았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즉 헬레나의 남편이며 콘스탄틴의 아버지는 막시미아누스 헤르툴리우스(Maximianus Herculius)황제의 딸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하면 혹시 나중에 황제가 될수도 있다는 갸륵한 생각에 조강지처인 헬레나를 과감히 버리고 황제의 딸과 결혼하였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말이 되었다. 아들 콘스탄틴은 그런 아버지가 미워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참고 살았다. 아들 콘스탄틴은 물론 언제나 어머니 헬레나의 편에 서서 헬레나를 보호하였다. 얼마후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과연 황제가 되었으나 죄를 많이 지어서인지 몇년후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콘스탄틴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새로 부임한 콘스탄틴 황제는 효자였다. 저 멀리 시골에서 고생하며 살던 친모 헬레나를 당장 궁전으로 모셔 와서 함께 살았다. 이어 헬레나에게 로마 제국에서는 가장 존귀한 칭호인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헬레나의 초상화가 들어간 동전도 발행하여 사용케 했다.

 

주후 325-326년에 로마제국에서 통용되었던 헬레나 모후 기념 주화. 헬레나가 세상을 떠나기 4-5년전이다.

 

한편, 콘스탄틴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사필귀정이어서 그런지 말년에 인생무상을 느끼고 마침 로마에 넓게 파급된 그리스도 신앙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아들 콘스탄틴에게 은연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관심을 가져보라고 권면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태양신을 숭배한 콘스탄틴은 기독교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얼마후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하였지만 여기에는 특별한 전설이 있다. 당시 로마제국은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Maxentius)가  공동황제가 되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막센티우스가 혼자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할 생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콘스탄틴 군과 막센티우스 군은 312년 로마 북부의 티베르강을 사이에 두고 밀비안(Milvian) 교량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다음 날이면 건곤일척을 겨루는 대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그 전날 밤, 꿈에 하늘에서 십자가의 모습을 보았으며 또한 ‘이 징표로서 승리하리라’라는 말을 들었다. 콘스탄틴이 본 십자가는 이른바 키-로(Chi-Rho)라고 하는 십자가 심볼이다.

 

콘스탄틴 황제가 꿈에서 본 키-로(X-P) 심볼.  이 심볼을 병사들의 방패에 그려 넣고 전투를 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Chi는 그리스어로 X 이며 Rho는 그리스어로 R 이다. 그리스어로 Christ(그리스도)의 첫 두글자가 된다. 키-로 심볼은 위에서 보는바와 같이 X와 P가 연합된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콘스탄틴은 이를 하늘의 계시로 믿고 병사들에게 방패에 키-로 심볼을 그려 넣고 전투에 나가도록 명령했다. 전투는 콘스탄틴의 대승리로 막을 내렸다. 라이발인 막센티우스는 전사하였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밀비안전투였다. 이때로부터 콘스탄틴은 기독교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이듬해인 313년, 새로 공동 황제가 된 리치니우스(Licinius)와 함께 밀라노칙령을 공포하고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관대함을 베풀기로 했다. 말하자면 로마제국에서 누구든지 기독교를 자유롭게 믿을수 있도록 공인한 것이었다. 얼마후인 324년 공동 황제인 리치니우스를 물리치고 단독황제가 된 콘스탄틴은 로마의 연합을 위해 기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할수 있다고 믿었다. 그때 이미 로마제국에는 지역마다 기독교의 교구가 설립되었으며 지역별로 주교들이 임명되어 활발한 전도활동을 하고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니케아(Nicaea)에서 전체 주교회의를 소집하고 직접 회의를 주재하였다. 318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다. 니케아 종교회의가 기독교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지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익히 아는 사실이므로 생략코자 한다. 다만, 그때 예루살렘에서 온 마카리오스(Makarios: Macarios: 마카리우스: Macarius)주교가 헬레나 모후를 만나 성지 예루살렘이 점차 황폐해지고 있음을 설명하고 특히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들이 훼손되고 있어서 안타깝다는 얘기를 해주었음은 덧붙이고자 한다.

 

주후 825년의 스케치. 헬레나가 성십자가를 발견하는 장면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서 공인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세례를 받지 않고 있다가 337년 임종에 즈음하여 가이사라(Caesarea)의 주교 유세비우스(Eusebius)로부터 세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그러면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는 언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역사학자이기도 한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헬레나는 콘스탄틴이 세례를 받고 세상을 떠난 후에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헬레나의 신앙은 누구보다도 뜨거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헬레나 모후께서는 아마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구주의 제자가 된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성헬레나와 콘스탄틴 황제를 그린 이콘. 불가리아정교회

 

예루살렘 주교로부터 예수를 기억케 하는 장소나 물건들이 훼손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헬레나는 당장이라도 예루살렘으로 가서 무슨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작정했다. 하지만 연로하여서 모두들 장거리 여행을 극구 만류하였다. 헬레나는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면 할수록 어서 속히 예루살렘에 가서 주님의 생애를 느끼고 싶었다. 헬레나는 특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바로 그 장소를 찾아가서 그때 예수를 못 박았던 십자가를 찾고 싶었다. 드디어 헬레나는 준비를 단단히 하고 평생의 소원인 예루살렘 순례의 길에 나섰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헬레나는 현지의 어떤 나이 많은 유태인으로부터 예수를 매달았던 십자가가 하드리안(Hadrian) 황제가 세운 비너스신전의 지하에 파묻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헬레나는 비너스신전을 허물도록 지시했다. 사람들은 멀쩡한 신전을 허무는 것이므로 비너스 신으로부터 재앙을 받을 것이라면서 두려워했지만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의 명령이므로 듣지 않을수가 없었다. 마침내 놀랍게고 땅 속에서 세 개의 나무 십자가를 발견하였다. 헬레나는 세 개의 십자가 중에서 어떤 것이 예수를 못 박았던 것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화려한 성묘교회 안의 갈보리 제단. 그리스정교회가 관리하고 있다. 성묘교회는 성헬레나가 십자가를 발견한 장소에 세운 교회이다.

 

마카리오스 주교가 아이디어를 냈다. 마침 죽어서 장사를 지내야하는 어떤 시체가 있었다. 죽은 자에게 세 개의 십자가를 차례로 놓아보았다. 마지막 십자가를 시체 위에 놓자 놀랍게도 죽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살아났다. 진짜 십자가를 찾았던 것이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시체가 아니라 중환자였다고 한다.) 헬레나와 마카리오스 주교는 너무나 기뻐서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경배하였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놀랍고 두려워서 무릎을 꿇고 십자가에 경배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면서 울부짖었다. 헬레나는 진짜 십자가를 발견한 바로 그 장소에 교회를 세우도록 했다. 부활교회(Anastasis)라고 불렀다. 오늘날 성묘(Holy Sepulcher)교회라고 부르는 교회의 전신이었다. 성묘교회는 헬레나가 세상을 떠난지 5년후인 335년 9월 13일에 봉헌되었다. 로마가톨릭은 성묘교회가 봉헌된 다음날인 9월 14일을 성십자가 축일로 지키도록 했다. 성십자가는 아름다운 상자에 넣어 보관되었다. 그러다가 614년 페르시아(파사)인들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십자가를 약탈해 갔다.

 

예수의 시체를 누였던 곳

 

페르시아가 예루살렘을 점령한지 14년후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인 헤라클리우스(Heraclius)는 페르시아와 화친을 하고 페르시아로부터 성십자가를 돌려받았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성십자가를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와 성대한 예식과 함께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교회에 안치하였다. 이날 안치식에서는 황제가 황제의 옷을 벗고 맨발로 성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하기아 소피아교회까지 운반하였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성십자가가 들어 올 때에 소리 높여 찬양하였다. 성십자가를 찬양하는 축제는 628년부터 동서로마제국이 모두 함께 치루었다.

 

콘스탄틴 황제의 병사들이 예전 방패를 바닥에 버리고 새로 십자가 심볼을 그려 넣은 방패를 가지고 진군하고 있다. 천사가 앞을 인도하고 있다.

 

이후 헬레나의 지시로 건럽된 성십자가교회는 여러 수난을 겪었다. 1009년에는 이집트의 칼리프인 알-하킴(al-Hakim)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십자가교회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몹시 분개하였다. 십자군전쟁이 시작된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30년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십자가교회를 재건하였다. 재건된 성십자가교회는 1149년 성대하게 봉헌되었다. 약 50년후인 1187년 터키의 살라딘(Saladin)이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였다. 살라딘은 훌륭한 지도자여서 성십자가교회를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토록 했다. 얼마후 성십자가교회는 화재가 나서 잿더미가 되었다. 다시 복구되었다. 근년에 이르러서는 1927년 대지진으로 또 다시 완전 파손되었다. 아르메니아교회가 새로 성묘교회를 건축할때 성십자가채플은 지하에 복원되었다. 현재 성묘교회에 속한 성십자가채플은 로마가톨릭이 관리하고 있다.

 

Giotto의 작품. 예수의 죽음. 오른쪽에서는 사람들의 예수에게 입혔던 홍포와 못을 나누어 가지려고 다투고 있고 어떤 병사는 신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막대에 꽂아 예수에게 주려고 하고 있다. 예수의 발 아래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슬퍼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