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의 클라이맥스

정준극 2009. 11. 16. 05:36

[홀로코스트의 클라이맥스]

 

1942년 6월 홀로코스트의 책임자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프라하에서 암살당하였다. 에른스트 칼텐브룬너(Ernst Kaltenbrunner)가 뒤를 이었다. 아이히만의 동료였다. 아이히만과 칼텐부룬너는 히믈러의 지시에 따라 ‘최종해결’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1943년과 1944년에 각지의 강제수용소는 유태인 문제를 최후로 해결하기 위해 하루에도 수천, 수만명씩 가스실에서 처리했다. 독일의 영향권에 있는 지역에서 화물열차로 실어온 유태인들은 마치 닭 공장에서 닭이 처리되는 것처럼 수도 없이 죽었다. 1944년 봄까지 아우슈비츠에서는 매일 8천명이 처리되었다.

 

홀로코스트의 참상.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서부지역에는 군수공장들이 많이 있었다. 유태인 노동자와 기술자들 때문에 군수품 생산이 그나마 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유태인들을 모조리 가스실로 보냈다. 1943년 초에 바르샤바 게토에서 무려 10만명의 유태인을 기차에 태워 강제수용소로 보낸 것은 결과적으로 독일 군수산업에 타격을 준 엇이었다. 유태인들을 실은 화물열차의 운행은 비록 전시이지만 다른 모든 것에 우선했다. 전선의 지휘관들은 군수물자와 지원병력의 운송을 위해 열차의 배차를 줄기차게 요청했지만 SS에 의한 유태인 운송이 최우선이었다. 1942년말,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독일군이 패배를 목전에 앞두고 있어서 군수물자의 공급이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열차는 유태인들 수송에 우선 배치되었다. 게다가 연합군은 독일 군수시설에 대한 폭격을 열심히 하였다. 결과적으로 고도로 숙련된 유태인 기술자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군수품은 더 이상 생산되기 어려웠다.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1944년에 이르러서 독일 국민들은 자기들이 히틀러의 선전에 속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치에 대한 환상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만, 히믈러에 의한 나치의 최후의 발악만이 남아 있었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나치 SS가 유태인 부녀자들을 강제수용소에 보내기 위해 체포하고 있다. 2차 대전 홀로코스트 사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이었다. 왜냐하면 사진에 나오는 아이들은 천만다행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 남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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