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집단처리 캠프(Extermination Camps)

정준극 2009. 11. 16. 05:32

집단처리 캠프(Extermination Camps)

 

가스실이 설치되어 있어서 유태인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할수 있는 수용소를 독일어로는 페어니히퉁스라거(Vernichtungslager)라고 부른다. 페어니히텐(vernichten)은 전멸시켜서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다. 영어로는 엑스터미네이션 캠프(Extermination Camp)인데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아서 일단 ‘집단처리 수용소’라고 붙여 보았다. ‘처리’(Process)라는 것은 물론 사람을 집단으로 독가스로 죽인다는 의미이다. 어떤 수용소에서는 가스실에서 죽은 사람들을 화장하여 재로 만들기도 하지만 어떤 수용소에서는 그냥 구덩이를 파고 던져 넣거나 또는 한쪽에 야적해 놓기도 했다. 나치에게 있어서 유태인과 집시들은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만도 못한 존재였다. 전쟁 전까지 나치독일은 7개소의 집단처리 가스실을 운영하였다. 이름만 들어도 역겨운 곳들이었다. 그중에서 아우슈비츠(Auswitz)가 가장 규모가 컸다. 그래서 강제수용소, 또는 가스실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을 연상하게 마련이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한가운데에 기념 조형물이 놓여 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무려 1백40만명이 처리되었다. 대전시 전체인구보다 많은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한 셈이었다. 두 번째는 트레블린카(Treblinka)로서 87만명, 세 번째는 벨체크(Belzec)와 야세노바크(Jasenovac)로서 각각 60만명, 다음이 마이다네크(Majdanek)로서 36만명, 다음이 헬름노(Helmno)로서 32만명의 순서이다. 소비보르(Sobibor)는 25만명을 처리했으며 가장 규모가 작은 곳은 벨라루스의 말리 트로스티네츠(Maly Trostinets)로서 6만5천명을 처리했다. 시설용량을 넉넉하게 마련했지만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합 약 5백만명 이상이 가스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야세노바크 수용소는 주로 세르비아의 소수민족을 처리한 곳이었다.

 

집단처리 수용소(Extermination camp)와 집단수용소(Concentration camp)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둘은 성격이 다르다. 주로 독일 내에 있는 다하우(Dachau) 또는 벨젠(Belsen) 수용소가 집단수용소이다. 나치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 또는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는 동성연애자들을 잡아 가두는 곳이 집단수용소였다. 이곳에서는 그냥 감금만하였다. 간혹 강제노동을 시켰지만 가스실로 보내어 인종청소를 당해야 하는 경우는 없었다. 물론, 굶주림과 질병과 노이로제로 죽어나가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가스집단처리의 대상은 아니었다. 집단처리 수용소는 SS 장교들이 운영했다. 그러나 경비원들은 주로 우크라이나인이거나 발트 연안국가(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에서 자발적으로 돕겠다고 나선 별도인력이었다. 이들을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이라고 불렀다. 대체병력이란 뜻이다. 독일의 정규군은 수용소와는 관계가 없었다.

 

다하우의 화장시설 

 

[가스실의 실상]

 

나치가 가스실에서 사용했다는 청산가리 독가스 물질과 유태인 시체의 지방질을 이용하여 만들었다고 하는 비누. 그 앞에 촛불을 켜놓았으며 벽에는 사연이 적혀 있다. 

 

유태인들이 화물열차에 실려 강제수용소(집단처리수용소)에 도착하면 보통은 모두 차에서 내려 간단한 건강검진을 받아 일할수 있는 사람과 일할수 없는 사람으로 구분하여 일할수 없는 사람은 곧바로 가스실로 보냈다. 어떤 경우에는 화물열차 곳간을 직접 가스실 앞에 대어 곧바로 가스실로 들어갈수 있도록 했다. 수용소 의사들이 하는 건강검진이라는 것은 형식적인 것으로 그냥 겉으로 보아 일할수 있게 생겼으면 노동력으로 남도록 하는 조치였다. 하지만 운좋게 노동력으로 남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나치는 아무 것도 모른채 끌려온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밀어 넣으면서 위생을 위해 목욕을 해야 한다고 말하거나 이를 잡기 위해 소독을 해야 한다고 속였다. 더구나 진짜 목욕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비누 한개씩이나 타월 한장씩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비누라는 것은 유태인들을 죽이고 나서 시체에서 짜낸 기름성분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비통한 처사인지 모르겠다. 오랜 화물열차 여행으로 피곤한 유태인들은 화물칸에서 내려오자마자 목이 너무 말라서 마실 물부터 찾는다. 그리고 며칠동안 비좁은 화물칸 안에서 세수도 못했으므로 우선 얼굴이라도 씻었으면 하고 원하다. 그러면 나치는 ‘저 안의 샤워시설에 따끈한 커피가 준비되어 있다. 서둘러 들어가야 한다. 커피가 식으면 곤란하다’고 친절하게 얘기해 주었다. 유태인들은 커피가 준비되어 있다는 말에 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했다. 나치는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들여보내기 전에 모든 소지품을 그 자리에 놓고 옷도 완전히 벗도록 했다. 그러면서 ‘각자 자기의 소지품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어디다 두었는지 잘 기억하라’는 안내방송까지 했다. 참으로 교활한 처사가 아닐수 없었다. 잠시후 유태인들이 두고 간 물건들은 나치의 차지가 된다. 실제로 가스실 입구에는 마치 목욕이나 소독을 진짜로 하는 것처럼 Bad(바드: 목욕) 또는 Sauna(사우나: 이를 잡음)라고 적은 안내등에 불이 들어오도록 해 놓았다.  

 

우크라이나의 카르파티안 루테니아에서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태인들은 수용소에 등록도 하지 않은채 가스실로 끌려갔다. 멀리 화장장의 굴뚝들이 보인다. 이들은 설마 도착하자마자 당장 죽임을 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새로운 수용소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걱정했다.

 

가스실에는 보통 800명에서 1,200명이 들어갈수 있다. 가스실에 들어간 사람들은 목욕시설이 너무 비좁은데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더구나 샤워물이 나오는 수도 꼭지는 있지만 물이 나왔던 흔적은 찾지 못하자 공포에 떨게 된다. 모두 위장이었다. 이윽고 나치는 자이클론 B(Zyklon-B)라는 약품을 닥트를 통해 던져넣는다. 바닥에 떨어진 자이클론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며 청산가리 독가스가 뿜어 나온다. 20분이면 끝난다. 그 20분간의 상황이 어떠했는지에 대하여는 차마 설명할 필요가 없다. 얼마후 환풍기를 통해 가스실 안에 남아 있는 독가스를 빨아 내고 맑은 공기가 통하도록 한다음 시체들을 들어 낸다. 보통 4시간이 걸린다. 보조원들이 시체에서 금이빨을 집게로 모두 빼낸다. 여자들의 머리칼은 잘라놓는다. 가스실 바닥을 청소한다. 그러면 끝난다. 이런 일들은 유태인들로 구성된 특별부대(존더콤만도: Sonderkommando)가 맡았다. 다만 몇 달만이라도 더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원해서 맡는 일이었다. ‘특별부대’는 화장시설의 다락방에 살았다. 매일같이 회색의 연기를 마시며 살아야 했다. ‘특별부대’가 모든 작업을 마치면 SS가 개별체크를 하였다. 만일 금이빨의 용량에 차이가 난다든지 하면 ‘특별부대’의 책임자가 책임을 져야 했다. SS는 유태인 특별부대 책임자가 일을 잘못했다고 해서 산채로 용광로에 던져 넣은 일도 있다.

 

아우슈비츠 기차역에 도착한 헝가리의 유태인들은 그 자리에서 가스실로 보낼 팀과 강제노동을 시킬 팀으로 구분되었다. 대부분 여자들과 아이들이 우선 가스실로 보내졌다. 가운데 줄무늬 옷을 입고 있는 자가 존더콤만도이다. 현지인으로서 가스실로 들어갈 유태인의 물건을 정리하여 나치에게 바치는 일을 한다. 헝가리인 존더콤만도는 카나다(Kanada)라고 부른다. 이들은 나치의 주구 역할을 하면서도 대단한 권세를 가진듯 설쳐 댔다.

'오스트리아와 유태인 > 홀로코스트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홀로코스트의 클라이맥스  (0) 2009.11.16
유태인들의 저항  (0) 2009.11.16
백조의 호수 회의  (0) 2009.11.16
T4 작전과 독가스의 등장  (0) 2009.11.16
죽음의 분대  (0) 2009.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