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죽음의 행진

정준극 2009. 11. 16. 05:39

[죽음의 행진]

 

1944년 중반에 들어와서 유태인에 대한 ‘최종해결’(Endlösung: Final Solution)은 목적지에 거의 도달하였다. 나치가 점령하고 있던 지역의 강제수용소들에서는 거의 모든 유태인들을 가스실에서 처리하는 실적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에서만 목표치의 90%이상이 처리되는 실적을 거두었다. 가장 실적이 나쁜 지역은 나치 점령의 프랑스로서 25%를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그 즈음에 전선은 독일에게 불리하게 움직였다. 소련 서부지역과 발칸 반도,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독일연맹군은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유태인 대청소작전을 더 이상 효과적으로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1944년 6월 드디어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였다. 역사적인 노르망디 작전이었다. 연합군의 공중폭격과 빨치산들의 방해작전은 유태인의 철도수송을 어렵게 만들었다. 더구나 독일 야전군이 폴란드에서 철도를 우선 사용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에 그 요구를 더 이상 들어주지 않을수 없었다.

 

죽음의 행진. 소련군 포로들과 함께 무수한 유태인들이 행진하다가 죽어나갔다. 그림

                             

소련군이 동부지역에서 점차 전선을 죄어오자 독일은 폴란드에 있는 강제수용소들을 폐쇄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수감자들은 독일과 가까운 서부지역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아우슈비츠로 옮겼다가 얼마후에는 실레지아의 그로쓰 로젠(Gross Rosen)으로 옮겼다. 얼마후에는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도 소련군이 폴란드로 접근해 오자 문을 닫고 퇴각하였다. 아우슈비츠가 문을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유태인들을 처리한 것은 1944년 11월 25일이었다. 13명의 유태인 여자들을 가스실에서 처리했다. 나치는 사방에서 패전으로 후퇴를 해야 하는 절박한 순간이지만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여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도록 감추는 작업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가스실은 뜯어 없앴다. 화장 시설은 다이너마이트로 파괴했다. 시체들을 집단으로 파묻은 곳은 다시 파서 시체들을 모두 불에 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나치는 폴란드 농부들에게 집단 무덤이 있는 곳에 농작물을 심도록 하여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게 했다.

 

2차 대전중 독일군에 포로가 된 소련군 포로들의 야외수용소. 나치는 무려 2백80만명의 소련군 포로들을 학살했다.

                   

1944년 10월, 히믈러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각지의 가스실에 명령을 보내어 더 이상 포로들을 가스실로 보내지 말도록 했다. 당시 히믈러는 종전 후의 전범 처리와 관련하여 연합국 측과 비밀협상을 벌이고 있었다고 한다. 히믈러는 전쟁이 독일의 완전 패배로 끝날 것을 예견하고 독일의 가장 큰 죄악인 유태인 대학살에 대하여 연합국 측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동정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히믈러가 각지에서 가스실을 담당하는 SS에게 ‘이제 그만’이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대부분 SS는 워낙 유태인에 대한 혐오심이 강하여서 히믈러의 말을 무시하고 끝까지 유태인 대청소라는 사명을 완수코자 했다. 그래서 이들은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유태인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였다. 병들고 지쳤으며 굶주림에 시달린 유태인들은 10마일 떨어진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눈길을 걸어가야 했다. 그리고는 화물차에 실려 며칠에 걸쳐 다른 기차역에 도착하여 또 다시 새로운 수용소를 향해 행진을 해야 했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유태인들. 골고다로 향하여...

                

화물차에서는 사나흘 동안 한숨도 못 잤고 한 줌의 빵도 먹지 못했다. 나치는 행진하는 중에 뒤쳐진 포로가 있으면 가차 없이 총을 쏘아 죽였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이동하기 위해 행진을 하는 중에 25만명의 포로들이 죽었다. 과연 ‘죽음의 행진’이 아닐수 없었다. 가장 참혹한 ‘죽음의 행진’은 1945년 1월에 있었다. 소련군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 도달하기 9일전, SS는 아우슈비츠에 있는 6만명의 포로들을 55km 떨어진 보드치슬라브(Wodzislaw)수용소로 이동키로 했다. 행진 중에 1만 5천명이 죽었다. 얼마나 지옥과 같은 행진이었는지는 겨우 살아남은 엘리 뷔젤(Elie Wiesel)이라는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도록 하자.

 

“살을 에이는 듯한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옷을 입었지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꽁꽁 얼어붙은 길바닥을 걸어갔다. 사람들은 차라리 눈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찢겨지고 얼어붙은 발을 옮겼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새벽부터 걷기 시작했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잠시도 지체하지 못하고 계속 걸어야 했다.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총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뒤편에서 총소리가 자주 들렸다. 나치의 SS 병사들은 마치 즐기기나 하듯 방아쇠를 당기며 포로들을 죽였다. 잠시후 나의 옆에서 걸어가던 사람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곧 이어 총소리가 들렸다. 사방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기차로 강제수용소에 끌려온 유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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