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참담한 해방

정준극 2009. 11. 16. 05:40

[참담한 해방]

 

소련군이 말로만 듣던 강제수용소를 처음 발견했다. 폴란드의 마즈다네크(Majdanek)였다. 1944년 7월 23일이었다. 아우슈비츠는 1945년 1월 27일에 소련군이 점거하고 해방시켰다. 부헨발트(Buchenwald)는 1945년 4월 11일 미군이 해방했다. 버겐-벨젠(Bergen-Belsen)은 영국군이 4월 15일에 해방했다. 다하우(Dachau)는 4월 29일 미군이 해방했다. 같은날 소련군은 라벤스브뤼크를 해방했다. 5월 5일에는 미군이 마우타우젠(Mauthausen)을 해방했으며 5월 8일에는 소련군이 테레지엔슈타트(Theresienstadt)를 해방했다. 트레블린카, 소비보르, 벨체크는 해방시킬수 없었다. 나치가 1943년에 전부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미군 제7군의 윌리엄 쿠인(William Quinn)대령은 다하우를 보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병사들이 수용소 건물로 다가서자 안에서는 알수 없는 한숨소리와 웅얼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간 병사들은 도저히 온전한 정신으로는 바라볼수 없는 광경을 보고 눈을 돌렸다. 그야말로 산송장들이었다.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병사들이었지만 수용소 안을 들여다 본후 구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유태인 아이들

 

사실상 강제수용소에는 포로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모두 다른 지역으로 이송했기 때문이었다. 남아 있는 포로들은 그야말로 움직일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우슈비츠에는 7천명이 남아 있었다. 그중 180명이 어린아이들이었다. 나치 의사들이 생체실험을 했던 아이들이었다. 영국군이 발견한 버겐-벨젠에는 6만명이 남아 있었다. 그중에서 거의 1만명이 며칠 살지 못하고 장질부사로 죽어나갔다. 수용소를 처음 접수했을 때에 매장하지 않고 그대로 쌓아둔 시체들이 1만3천구나 있었다. 영국군은 미처 도망가지 못한 SS와 경비원들을 불러 시체들을 한데 모아 구덩이를 파고 매장토록 했다.

 

 

미군의 진주를 환영하는 아우슈비츠의 유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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