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유태인들의 저항

정준극 2009. 11. 16. 05:33

[유태인들의 저항]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나 다큐를 보면 ‘아니, 유태인들은 왜 저렇게 무기력한가? 기왕 죽을 것이면 나치들에게 반항이나 한번하고 죽지 그러는가? 그저 양처럼 하라는 대로 하고 죽으니 참 딱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감시병 몇 명만 덮쳐서 무기를 빼앗고 꼼짝 못하게 한 후에 어디든지 도망가면 될 텐데 그러지를 않는다. 종교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여호와의 섭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여호와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의지한다는 생각에서 반항을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또한 언젠가는 메시아가 나타나서 자기들을 구해줄 것으로 믿고 참고 기다리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더구나 과거 유태의 역사를 보았을 때 저항하면 목숨만 잃는다는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저항을 주저하였다는 것이다. 게토의 지도자들인 랍비들은 저항을 하면 죽음뿐이라는 생각에 쌓여 있어서 그나마 저항하려는 사람들의 손길을 막았다. 그런데 실제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43년 바르샤바 게토에서의 저항은 대표적이었다. 수천명의 유태인들이 SS(친위대) 사무실을 점거하고 4주 동안이나 나치와 대치했던 사건이었다. 유태인들은 수백명의 독일인들을 죽였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저항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군대가 동원되는 바람에 결국은 모두 살해되었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봉기한 유태인들을 체포하는 SS 요원들. 유태 여인들의 자세가 의연하다. "그래, 이놈들아! 어디 죽일려면 죽여 보렴! 이 나쁜 놈들! 너희들도 인간이냐? 나중에 여호와의 심판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했을 것이다.

 

같은 해 5월에는 트레블린카(Treblinka) 수용소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소비보르(Sobibor)수용소에서는 약 2백명의 유태인들이 봉기하여 경비병들을 쓰러트리고 탈주하였다. 2주 후에는 비알리스토크(Bialystok)게토에서 저항이 있었으며 9월에는 비록 단기간이었지만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Vilnius)에서 저항이 있었다. 10월에는 다시 소비보르 수용소에서 600여명의 유태인 및 러시아 포로들이 탈주하였으며 그중 60여명은 살아남아 러시아 빨치산이 되었다. 1944년 10월에는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 특별부대(존더콤만도)가 저항을 했다. 특별부대는 가스실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유태인들이다. 이들은 유태인 여자노동자들이 군수공장에서 훔쳐온 화약으로 유태인을 화장하는 시설 중 하나를 폭파하고 집단 탈출을 기도하였으나 얼마후 출동한 나치 친위대에 의해 250명 전원이 사살되었다.

 

바르샤바 게토에서의 봉기에 참여한 유태인들을 체포하여 총살에 처하기 전에 담벽에 일렬로 세워 놓은 장면. 나치는 무기를 색출한다고 세워 놓고 그대로 총을 쏘았다.

 

동유럽에서는 2만-3만 명의 유태인 빨치산(유격대)이 나치에 저항하여 싸웠다. 영국령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약 5천명의 유태인들은 영국군에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독일에서 살다가 탈출한 유태인들 중에는 연합군 특별 조사단에 합류하여 독일군 포로들을 심문하는 일에 통역으로서 종사하였다. 이들은 또한 독일군 후방에서 사보타쥬를 일으키는 일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에서는 유태인 빨치산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수천명의 유태인을 구출한 일도 있었다.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와 러시아에 있던 유태인들은 늪지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빨치산에 합류하여 나치를 괴롭혔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네덜란드 저항군이 대단한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저항군에 합류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자유의사에 맡겼지만 유태인들은 되도록 가족과 떨어져서 사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죽더라도 함께 죽는 것을 선호했다.

 

부다페스트에서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유태인 여인들. 일반 시민들은 그저 구경만 하고 있을수 밖에 없었다. 이들이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 열심히 청소하고 음식 만들고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하고 안식일을 지킨 죄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들에게 이같은 고통을 주시는지요?

 

나치는 조직적으로 유태인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나치는 유태인들에게 ‘좁아빠진 게토를 떠나 넓은 동부로 가서 재정착토록 하는 것’이라고 속였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유태인들은 가스실이라는 것이 있는줄도 모르고 기차에 실려왔다. 유태인들은 그저 막연한 기대로 강제수용소에 도착할 뿐이었다. 멋도 모르고 강제수용소의 가스실에 도착하면 '며칠 동안 기차를 타고 오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느냐? 며칠 동안 샤워를 하지 못했을 것이니 우선 위생을 위해 목욕부터 해야한다'거나 또는 ‘이를 잡기 위해 소독한다’고 속이고 가스실로 들여보냈다. 어떤 곳에서는 '여러분, 얼마나 목이 마르십니까? 저 건물 안에 따듯한 커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해서 유태인들을 속였다. 유태인들은 자기 물건을 잘 챙기라는 안내방송에도 속았다. 나치는 안내방송으로 자기 물건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니 짐마다 자기 이름을 잘 써놓으라'고 말했다. 모두 거짓말이었다. 샤워를 한다고 비누를 주는 것도 속임수였다. 설마 샤워실(가스실)에 들어가서 수백 명, 수천 명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할 줄을 상상도 못했다. 가스실의 실상을 외부로 전달하는 것은 극히 어려웠다. 나치가 철저하게 검열하고 단속했다. 폴란드 저항군의 얀 카르스키(Jan Karski)가 천신만고 끝에 가스실의 참상을 담은 사진을 서방에 전달하였으나 연합군은 도저히 그런 일은 있을수 없고 사진은 조작된 것이라고 하며 믿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그런 일을 저지를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실상은?

 

바르샤바 게토에서의 봉기를 진압하는 SS. 게토내의 대부분 건물들이 불길에 쌓였다. 수많은 유태인들이 그나마 잠자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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