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비유태인 희생자

정준극 2009. 11. 16. 05:45

[비유태인 희생자]

 

나치는 유태인들만 박해한 것이 아니다. 비유태인도 박해하였다. 여기에는 슬라브인, 폴란드인, 유고슬라비아인, 동부 슬라브족, 소련 전쟁포로 들이 포함된다. 나치는 이들도 인종청소의 대상으로 삼았다.

 

- 슬라브족: 히틀러는 슬라브족을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청소하여 그 땅에 독일인이 살도록 할 야심을 품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25-30년의 장기에 걸쳐 추진한다는 것이었지만 독일이 전쟁을 일으킨지 5년 만에 패전함으로서 수포로 돌아갔다.

 

- 폴란드인: 폴란드의 역사는 주변 강대국들에 의한 고난의 역사였다. 특히 독일은 폴란드의 이웃으로서 기회만 있으면 영토를 넘보았다. 히틀러의 나치는 유럽의 지도에서 폴란드를 없애고 독일의 영토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하여 독일인들을 폴란드 땅에 재정착 시킨다는 생각이었다. 폴란드인에 대한 인종청소는 폴란드의 유태인만큼 완벽하지는 않았다. 폴란드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90%이상이 죽임을 당하여 사라졌지만 폴란드의 기독교인들은 잔인한 독일 점령 하에서도 94%가 살아남았다. 1939년 11월, 나치 독일은 폴란드에 대한 인종청소 정책을 수립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폴란드인을 완전히 말살한다는 정책이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폴란드인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하기 까지했다.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서부지역의 괴뢰정부(일반정부라고 부름)는 폴란드인을 완전히 제거하고 그 땅을 독일의 식민지로 만드는 책임을 맡았다. 계획에 의하면, 1952년까지 폴란드 서부지역에는 3-4백만 명의 폴란드인만을 남겨놓아 독일인들의 노예로 삼아 부려 먹는다는 계획이었다. 다만, 이들 폴란드인들은 자녀를 갖지 못하도록 결혼을 금지하며 또한 독일로부터 의료지원을 중지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폴란드인들이 종적을 감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1주일 앞두고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 “동부지역(폴란드를 말함)에서 폴란드 민족의 후손이거나 폴란드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남자, 여자, 아이들을 구분하지 모두 제거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군대는 이들에게는 절대로 자비를 보일 필요가 없다. 그래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땅을 얻을수 있을 것이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 1의 정문. 이 문을 지나면 다시는 살아서 걸어나올수가 없었다.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인을 가장 많이 처리한 곳이다.

 

전쟁 기간 중에 도합 1백80만에서 2백10만명에 이르는 비유태계 폴란드인이 독일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중 5분의 4가 폴란드 민족이었으며 나머지는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의 소수민족이었다. 거의 모두 민간인들이었다. 이들 중 최소 20만 명은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되었고 그중 14만 6천명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나머지 폴란드인들은 여러 경로로 집단 학살되었다. 예를 들면 바르샤바 봉기 때에 12만에서 20만의 폴란드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독일은 폴란드인을 자연소멸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하였다. 예를 들면 철저한 식량배급으로 많은 사람들을 굶주려 죽게 만들었으며 위생시설을 개선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서 전염병 등에 걸려 죽게 만들었고 의료서비스를 중단함으로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게 만들었다. 결과,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1천 명당 13-18명이었다. 2차 대전의 희생자중 5백 60만 명이 폴란드인이었다. 이에는 물론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도 포함되지만 비유태인도 포함되어 있다. 폴란드는 2차 대전으로 인하여 16%의 인구를 잃었다. 전체 유태인 3백30만 명중 3백 10만 명이 희생되었고 비유태인의 민간인은 3천1백70만 명중 2백만 명이 독일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이들 희생자중 90%는 전쟁과는 관련 없이 죽임을 당하였다. 나치 독일도 폴란드인의 청소에 앞장섰지만 후방의 소련도 폴란드인의 제거에 많은 기여를 했다.

 

나치 집단수용소의 시체 화장시설(아우슈비츠)

 

- 유고슬라브인: 나치는 히틀러의 의중에 따라 발칸에서 58만 1천명의 유고슬라브인을 학살했다. 이에는 크로아티아의 파치스트 동맹으로 반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자인 유스타세(Ustase)가 합세하였다. 히틀러는 발칸에서 유고슬라브인을 모두 학살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세르비아인들은 인간이하(Untermensch)’라고 표명함으로서 간접적인 학살명령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세르비아인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나치의 동조자인 유스타세는 별별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나치의 유고슬라비아 점령지역 괴뢰정권으로서 세르비아인들을 체포하는데 앞장섰다.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도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주로 야세노바크(Jasenovac)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우스타세 당국은 1941년부터 45년 사이에 크로아티아에 여러 곳의 강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 무슬림(보스니아인), 그리고 가톨릭교도가 아닌 소수민족들이 끌려와 죽임을 당하였다. 물론 크로아티아의 정치범들과 반종교인들도 희생되었다.

 

야세노바크 집단수용소 자리에 공원을 조성하고 기념조형물을 설치했다.

 

니아드 할릴베고비치(Nihad Halilbegovic)가 주도한 최근 연구인 ‘야세노바크 강제수용소의 보스니아인’(Bosniaks in Jasenovac Concentration Camp)에 의하면 약 10만 3천명의 보스니아 무슬림 슬라브인들이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나치와 크로아티아 분리주의운동인 유스타세에 의해 야세노바크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되었다고 한다. 보스니아인들은 집시라는 명목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 동부 슬라브인: 벨로루시(Belarus)가 가장 큰 희생자였다. 나치는 벨로루시에 괴뢰정부를 세우고 이들로 하여금 온갖 만행을 자행토록 부추켰다. 결과, 9천개의 마을에 불에 탔으며 38만명이 강제노동을 위해 이송되었고 수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카틴(Khatyn)과 같은 마을은 마을을 불태울 때에 주민들도 모두 불에 타서 죽었다. 그런 마을이 벨로루시에 6백개나 있었다. 동구에서 벨로루시로 이전한 슬라브인들이 만든 정착촌은 5,295개소가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들 정착촌의 주민들은 거의 모두가 살해되었다. 그리하여 도합 1백 67만명의 민간인이 3년 동안의 독일 점령기간에 죽임을 당했다. 이는 전체 인구의 18%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24만 5천명은 유태인으로서 벨로루시 시민들로 구성된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에 의해 살해되었다.

 

벨로루시의 카틴 마을에 있는 나치의 만행 기념 조형물. 1943년 3월 22일 나치가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나치 협조자들과 함게 카틴 마을에 불을 질러 주민 149명 중 한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생존자는 유지프 카만스키(Yuzif Kamansky)로서 그런 참담함 중에서도 살아났기 때문에 '불사조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카틴 마을은 카만스키가 죽은 아들을 안고 비통해 하는 모습을 기념상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카만스키를 모르면 벨로루시 국민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벨로루시 국민들은 나치의 만행을 잊지 않고 있다.

 

- 소련 전쟁포로(POWs): 독일은 소련과의 전투에서 초기에 승승장구하여 수많은 소련군 포로들을 잡았다. 독일에게 잡힌 소련군 포로들은 대략 2-3백만 명으로 보고 있다. 전체 포로들의 57%가 1941-45년간에 굶주림과 학대로, 또는 처형당하여 죽었다. 다니엘 골드하겐(Daniel Goldhagen)은 소련군 전쟁포로 중 2백 80만 명이 1941-42년간의 8개월 동안에 죽었으며 1944년 중반까지는 3백3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모두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생명을 잃었다. 1943년에는 독일군에게 잡힌 소련군 포로들의 사망률이 감소하였다. 이는 상당수 소련군 포로들이 강제노동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영국군이나 미군에게 잡힌 소련군 전쟁포로는 도합 23만 1천명이었는데 그중에서 여러 사정으로 8천3백 명만이 죽었다.

 

소련군 포로들. 많이도 잡혔다.

 

- 집시(Romani people): 로마니와 신티(Sinti)라고도 불리는 집시들은 전통적으로 기록문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집시들이 희생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나치는 집시들이 위생상 불결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더구나 섹스에 있어서도 문란하다고 생각하여 혐오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집시들은 아우슈비츠에 끌려 와서도 불결하고 불건전한 생활을 했다. 나치는 이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순수 아리안들이 피해를 입을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청소키로 결정했다. 나치가 점령한 유럽에서 집시의 수는 약 1백만에 달했다. 그중 13만명이 홀로쿠스트 기간 중에 희생되었다. 하지만 미국 홀로코스트기념박물관의 역사학자였던 시빌 밀튼(Sybil Milton)은 희생당한 집시의 수가 22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마틴 길버트(Martin Gilbert)는 유럽에 70만 명의 집시가 있었으며 그중에서 나치에 의해 희생된 수는 22만 명이 훨씬 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집시에 대한 통계자료가 없기 때문에 과연 얼마나 많은 집시들이 죽임을 당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심지어 오스틴의 텍사스대학교 집시문제연구소장인 이안 핸코크(Ian Hancock)는 '모르면 몰라도 집시희생자의 수가 유태인희생자의 수와 맞먹을 것'이라고 보았다.

 

폴란드 동남부에 있는 벨제크(Belzec)에 끌려와서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에 나치의 설명을 듣고 있는 폴란드의 집시들. 평소 헐벗고 굶주린 생활을 해온 이들 중에는 수용소에 오면 빵이라도 먹을수 있다고 생각하여 아무 군소리 없이 왔다는 경우도 있다. 나치는 이들을 인간쓰레기로 보고 청소키로 결정했다.

 

집시들은 집단으로 강제수용소에 끌려오거나 요행으로 게토로 집어넣어 지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인자츠그루펜(현지인 나치 동조자)들이 집시들의 야영지를 급습하여 현장에서 모조리 학살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나치 점령지의 괴뢰정부들도 집시말살에 한몫을 거들었다. 예를 들면 크로아티아의 괴뢰정부인 우스타세는 집시들을 대거 야세노바크 강제수용소로 끌고 와서 집단 학살하였다. 1942년부터 집시들은 유태인들과 동등한 법적 처우를 받았으며 동등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SS 책임자로서 나치 인종청소의 설계자인 하인리히 히믈러는 ‘집시 잡종(Mischlinge), 로마니(Romani: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집시), 독일 혈통이 아닌 발칸 출신의 종족들은 이들이 독일 국방군에 복무하지 않는한 모두 아우슈비츠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1943년 1월에는 독일에 있는 모든 로마니를 색출하여 아우슈비츠로 보내라는 명령이 발표되었다. 독일의 일부 학자들은 집시(로마니)들이 원래는 아리안족이었으나 비(非)아리안족들과의 교합으로 불순한 혈통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전쟁이 끝난후 아우슈비츠에서의 운구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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