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또 다른 희생자들

정준극 2009. 11. 16. 06:16

[또 다른 희생자들]

 

나치는 유태인들과 집시들 뿐만 아니라 정신질환자, 신체불구자, 동성연애자, 여호와의 증인 신도, 프리메이슨 멤버, 그리고 정치범들과 공산주의자들도 모두 제거키로 한다.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다른 사람들을 처치하는 것은 정말 반인류적 행위가 아닐수 없었다.

 

- 불구자 및 정신질환자: 나치의 주장은 간단했다. 건강해야 세계를 제패할수 있으므로 불구자(요즘으로 말하면 장애우) 또는 정신병자들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나치는 ‘우리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줄 의무가 없으며 목마른 자들에게 마실 것을 줄 필요가 없고 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옷을 줄 책임이 없다’는 독특한 논리를 주장하였다. 우리도 먹고 살 것이 넉넉하지 않은 판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사람들까지 먹여 살릴 필요는 없다는 얘기였다. 1939년에 마련된 ‘악치온 T4'(Aktion T4)라는 프로그램은 독일민족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불구자들이나 정신병자로 판정된 자들을 죽이거나 거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이로 인하여 1939-1941년간에 8만 내지 10만명의 성인 정신질환자들이 수용기관에서 살해되었고 어린이는 5천명이나 살해되었다. 정신병원에 있던 1천명의 유태인들도 제거되었음은 물론이었다. 정신병자 수용소 이외의 장소에서 죽임을 당한 정신질환자들도 상당히 많다. 안락사를 전문으로 하는 슐로스 하르타임(Schloss Hartheim)의 원장인 게오르그 렌노(Georg Renno)박사에 의하면 이곳에서만도 2만명이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나치는 '이같은 정신질환자 1명을 평생 보살피자면 최소한 6만 마르크의 비용이 든다. 친애하는 독일인들이여, 그것은 그대들의 돈이다'라는 내용의 선전을 통해 정신질환자(유전적 장애자)를 안락사 시켜서 새로운 국민들로서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우타우젠(Mauthausen) 강제수용소장인 프랑크 차이라이스(Frank Zeireis)에 의하면 나치 점령 지역에서 총 40만명이 정신질환자로 판정을 받아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강제로 거세당한 사람들은 3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약 30만명의 정신질환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이같은 대량학살은 어찌된 일인지 별다른 역사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정신병자 수용소나 병원의 정신과 의사들은 비록 공식적으로 홀로코스트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정신질환자들의 제거를 위한 계획수립 및 집단처리에 관여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유태인 집단학살과 기타 ‘소용없는 인간’들의 제거에도 관여하였다. ‘악치온 T4프로그램’에 대하여 독일내의 가톨릭과 개신교가 강력히 반대하자 히틀러는 마지못하여 1941년 8월 ‘악치온 T4프로그램’의 취소를 지시하였다. T4라고 하는 것은 불구자 및 정신질환자의 사회적 제거를 구상한 ‘일반 복지 및 수용기관 재단’(Gemeinnützige Stiftung für Heil und Anstaltspflege: General Foundation for Welfare and Institutional Care) 본부가 베를린의 티어가르텐슈트라쎄(Tiergartenstrasse: 동물원로) 4번지에 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을 붙였다. 이 재단의 대표인 칼 브란트(Karl Brandt)는 히틀러의 주치의였으며 또 다른 대표인 필립 불러(Philipp Bouhler)는 히틀러의 개인 자문관이었다. 칼 브란트는 1946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1948년 6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칼 브란트의 재판은 당시 ‘의사들의 재판’(Doctors' Trial)이라고 하여 세계의 관심을 끌었었다.

 

'악치온 T4'가 구상된 베를린 티어가르텐슈트라쎄 4번지의 길 위에 설치한 '잊혀진 희생자들 추모 명판'. 다음과 같이 써있다. "1940년부터 나치는 이곳 티어가르텐슈트라쎄 4번지에서 이 주소를 따온 명칭인 악치온 T4라는 대량학살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로써 1939년부터 1945년까지 20만명의 무방비한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이들의 생명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나치는 이들을 살해하는 행동을 '안락사'라고 불렀다. 이들은 브란덴부르크의 그라페네크, 하텔름, 피르나, 베른부르크, 하다마르의 가스실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어떤 경우에는 총살대의 앞에 서서 죽임을 당했으며 또는 굶주림으로 죽었고 또는 독약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가해자들은 과학자, 의사, 간호원, 법원 직원, 경찰, 보건과 노동부처 당국자 들이었다. 희생자들은 가난하고 절망에 넘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정신병원에서, 어린이병원에서, 유아원에서, 보육원에서, 군 병원에서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엄청나지만 가해자는 극소수였다."

 

- 동성연애자: 독일 시민권을 가진 동성연애자 중 5천명 내지 1만 5천명이 강제수용소에 이송되었다. 독일에서는 범죄행위도 문제가 되었지만 범죄적 의도 또는 범죄적 성격도 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독일에서는 건강한 분별력(감수성)이 사회를 이끈다고 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공공의 적으로서 간주되었다. 이에 의하여 동성연애와 낙태는 반사회적 행위로 지탄을 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1936년 히믈러는 ‘동성연애 및 낙태 투쟁 제국중앙국’을 신설하였다. 히믈러는 동성연애를 ‘독일 혈통을 더럽히는 행위’로서 범죄로 간주하였다. 게슈타포는 게이 바들을 급습하여 게이들을 체포하였으며 심지어는 게이 잡지 구독자 명단을 입수한후 게이들을 일일이 추적하여 체포하였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게이 의심자를 고발토록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수만명의 게이 용의자들이 체포되어 재활원이나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들은 노란색의 완장을 차고 다니도록 했으며 나중에는 핑크 빛 삼각형 패치를 상의 왼편과 오른편 바지에 부착토록 하여 사회와 격리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학대하여도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다.

 

게이로 체포된 사람들중에서 수백명은 법원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거세를 당하였다. 상당수는 고문을 당하여 불구가 되었으며 일부는 SS 의사들의 홀몬 실험에 이용된후 살해되었다. 결론적으로 독일의 동성연애자 중에서 약 2%가 나치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러나 확실한 통계는 모르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나치에 의해 박해를 받았던 게이들은 자기들의 신분이 밝혀지는 것을 꺼려서 잠적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전후에도 동성연애를 범죄로 간주하였다.

 

암스테르담의 길에 만들어 놓은 동성연애자 희생 추모물

 

- 프리메이슨(Freemason): 프리메이슨은 기본적으로 로마가톨릭의 전횡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비밀결사운동이었으나 나중에는 사회계몽적 차원의 활동을 했던 단체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프리메이슨이 유태인과 결탁되었다고 주장하여 이들을 혐오하였다. 이에 따라 게슈타포는 프리메이슨 멤버들을 추적하여 체포하고 강제수용소로 이송하였다. 프리메이슨 포로들은 빨간 역삼각형 패치를 가슴에 달고 다니도록 했다. 그런데 프리메이슨의 상당수 멤버는 유태인이었으며 또한 반체제 인사였기 때문에 유태인으로서 끌려가기도 했고 정치범으로서 수감되기도 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프리메이슨 멤버들이 나치에 의해 희생되었는지는 모른다.

 

벨기에의 에스터베겐(Esterwegen) 집단수용소가 있던 곳에 설치된 프리메이슨 추모비. Liberte Cherie는 프리메이슨 협회를 말한다.

  

-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나치에 대한 충성맹세를 거부하거나 군대복무를 거절하였다. 대략 1만 2천명의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자색 삼각형의 패치를 달고 있어야 했다. 이들은 신앙을 부인하고 국가당국에 복종할 것을 강요당했다. 그리하여 나치에게 순종한 사람들은 목숨만은 건졌다. 그렇지 않은 2,500-5,000명의 '여호와의 증인' 교인들은 처형되었다. 독일에 있는 다른 어느 종교단체도 ‘여호와의 증인’처럼 나치에 무언저항하지는 않았다.

 

- 정치범(Political activists): 독일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조운동가 들은 일찍부터 나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강제수용소에 우선적으로 입주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유태적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였으며 나치는 공산주의를 ‘유태-볼쉐비즘’(Judeo-Bolshevism)이라고 부르며 증오하였다. 독일에 처음 세워진 강제수용소인 다하우(Dachau)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조운동가들을 수감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이들은 빨간 삼각형 패치를 달고 다녀야 했다. 헤르만 괴링은 나중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즉각적으로 탄압하게 된 것은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독일 엘리트들의 권고에 의해서라고 증언했다.

 

뮌헨 북서쪽 16Km에 있는 다하우(Dachau)집단수용소. 주로 정치범들을 수용하였다. 철문에는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롭게 만든다)는 나치의 선전표어가 붙어 있다. Arbeit Macht Frei라는 말은 아마 중세에 독일에서 유행했던 용어인 Stadtluft macht frei(슈타트루프트 마하트 프라이: City air brings freedom)에서 가져온 표현이라고 한다. 관람객들이 방문하여 홀로코스트를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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