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캐서린 대제
Catherine the Great(Yekaterina II Velikaya)
러시아의 세미라미스(Semiramis)
러시아의 세미라미스라고 불리는 카테리나 2세(캐서린 2세) 여제
대영제국에 빅토리아 여왕이 있고 오스트리아에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 여제가 있다면 제정 러시아에는 캐서린(카테리나) 여제가 있다. 세 사람에게서 다른 점이 있다면 빅토리아 여왕이 62년은 통치했고 마리아 테레자는 40년을 통치했지만 캐서린 대제는 34년(1762-1796)을 통치했다는 차이가 있다. 아무튼 여자로서 30년이 넘게 제정러시아의 군주로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제정러시아가 어떤 나라인가? 단일 국토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일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1819년에 태어났으므로 캐서린 대제와 서로 만난 일은 없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더더구나 대선배이다. 그래도 세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서로 비슷한 점이 더러 있다. 수십년 동안 여왕의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문화와 예술을 진흥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당대의 계몽주의자인 볼테르는 1786년에 고대 바빌론의 영웅적 왕비인 세미라미스(Seminamis)를 주제로 한 비극을 발표한바 있다. 볼테르는 이 비극에서 캐서린을 ‘러시아의 세미라미스’라고 부르며 찬양했다. 그로부터 캐서린은 ‘북부의 별’ 또는 ‘러시아의 세미라미스’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캐서린 대제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우선 가정환경부터 살펴보자.
결혼 전의 조피(캐서린)
캐서린은 1729년 5월 2일 프러시아 왕족으서 슈테틴(Stettin)에서 태어났다. 슈테틴은 현재 폴란드의 체체친(Szeczecin)이다. 캐서린은 독일 출신이므로 결국 독일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 러시아의 군주가 된 것이다. 캐서린의 업적은 크게 두가지로 정리할수 있다. 제정러시아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으며 행정을 개선하고 서구식의 현대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캐서린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세계의 강국으로 인정을 받을수 있었다. 그것은 캐서린의 뛰어난 외교정책에 힘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캐서린은 공포정치도 서슴지 않았다. 예를 들면 푸가체프(Pugachev)의 반란을 잔혹할 정도로 진압한 것이다. 위대한 군주인 것 같으면서도 폭정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캐서린의 순탄하지 않은 사생활과도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캐서린은 스캔들이 많았다. 아마 선천적으로 불륜적인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캐서린은 어떻게 하여 여자로서 제정러시아의 여제가 되었을까?
* 푸가체프 반란: 캐서린이 제정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정통성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여제가 될수 없다는 주장과 함께 페터2세의 아들인 이반을 황제로 옹립하려던 음모였다. 이반은 태어나자마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1740). 그 이듬해에 엘리자베트 여제에 의해 유배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가 23세의 젊은 나이로 죽임을 당했다. 푸가체프는 이반이 감옥에 있을 때 그를 구출하여 다시 황제로 옹립하자는 음모를 꾸몄다. 일설에 따르면 캐서린이 이반을 석방하지 않고 간수장을 시켜 이반을 살해 했다고 한다.
중년의 캐서린 대제
간단히 말해서 제정러시아의 황제(짜르)였던 남편 페터 3세가 음모에 의해서 폐위되었기 때문이었다. 야망을 가지고 있던 캐서린은 러시아 귀족들을 등에 업고 러시아의 새로운 여제로 추대되었다. 다시 말하여 귀족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리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결국은 귀족들의 기득권을 무시하지 못했다. 실제로 캐서린에 대한 귀족들의 영향력은 컸다. 귀족들은 이미 농민이나 노예계급은 고려하지 않고 그들을 착취하여 대단한 농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캐서린은 귀족들의 농토 보유를 어찌하지 못했다. 오히려 귀족헌장을 만들어 귀족들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귀족들은 캐서린과 함께 러시아를 통치한 셈이었다. 캐서린은 계몽사상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특히 페터 1세(1672-1725)가 관심을 갖고 추진하려던 계몽운동을 계속 유지코자 했다. 이와 관련하여 캐서린은 드니 디데로(Denis Dederot), 볼테르, 몽테스큐 등과 친분을 가졌다. 그러나 캐서린은 귀족들의 저항과 자기 자신의 방탕한 생활로 인하여 계몽운동을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했다. 캐서린은 처음에 가난한 농노들의 사정을 깊이 동정하여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했다. 특히 농노들에 강제 징병 문제를 개선코자 했다. 하지만 결국은 시늉만내고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다. 캐서린은 귀족들과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지냈기 때문에 그토록 오래 동안 여제로 있을수 있었다.
미네르바 스타일의 캐서린. 그는 스스로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와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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