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제정러시아 카테리나 여제

쿠테타로 집권

정준극 2009. 12. 16. 11:39

[1762년의 쿠테타]

 

제정러시아는 페터 2세의 미망인인 엘리자베트가 여제로서 통치하였다. 엘리자베트 여제는 1762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캐서린이 33세 때였다. 엘리자베트 여제의 뒤를 이어 캐서린의 남편인 페터가 페터 3세로서 짜르(황제)가 되었다. 캐서린은 왕비가 되었다. 홀슈타인-코토르프에서 지내던 신임 짜르 페터와 신임 짜리나 캐서린은 생페터스부르크의 겨울궁전으로 들어왔다. 그때 캐서린은 이미 우리나라의 노사모나 박사모와 같은 지지 세력을 굳게 쌓아놓고 있었다. 페터 3세는 사생활에서도 기묘한 행동을 일삼았지만 정치에 있어서도 엉뚱한 면이 많았다. 그는 프러시아 국왕인 프레데릭 2세를 대단히 숭배했다. 페터 3세는 프러시아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저 양보의 미덕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러시아 황제로서 라이벌 관계에 있는 프러시아의 국왕을 존경한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캐서린의 지지 세력들은 페터의 이같은 온당치 못한 행동을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또한 페터는 슐레스비히(Schleswig)문제를 둘러싼 홀슈타인 공국과 덴마크 간의 분규를 중재코자 했다. 캐서린을 둘러싸고 있는 제정러시아의 귀족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도 거부반응을 보여주었다.

 

대관식 후의 페터 3세. 순하게 생겼다.

 

 

1756-1763년 프러시아와 러시아는 폴란드를 놓고 이른바 ‘7년전쟁’을 가졌다. 전쟁 중인 1760년, 러시아군은 프러시아의 수도인 베를린을 점령한 일이 있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는 병자호란과 같은 수모를 겪었다. 그런데 페터 3세가 황제에 오르자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는 1762년 폴란드를 프러시아와 러시아가 나누어 통치하자고 제안하였다. 페터 3세는 전쟁을 끝내고 싶은 심정에서 그같은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게다가 페터는 프레데릭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존경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폴란드 분할통치는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캐서린을 둘러싼 귀족들은 ‘페터가 정신 나갔다’면서 노골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1762년 7월, 페터는 짜르가 된지 겨우 6개월이 되었을 때에 정치적으로 큰 실수를 저질렀다. 페터는 고향인 홀슈타인으로 돌아가 친척들과 함께 지내겠다고 발표했다. 다만, 왕비인 캐서린은 그대로 생페터스부르크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너무 골치 아픈 일들이 많으므로 쉬겠다는 뜻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로부터 며칠 지난 7월 14일,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켜 페터를 폐위하고 캐서린을 제정러시아의 여제로 삼는다고 선포하였다.

 

드디어 러시아의 여제가 된 캐서린(카테리나)

 

 

무혈 쿠테타는 성공이었다. 나중에 캐서린의 막역한 친구인 에카테리나 다쉬코바의 말에 따르면 페터는 짜르에서 물러난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며 다만 필요한 영지와 좋아하는 정부(情婦)만 있으면 만족한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페터의 일생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이어서 그는 쿠테타가 일어나서 폐위된지 3일만에, 짜르가 된지 6개월만에 로프샤(Ropsha)에서 캐서린의 측근으로서 쿠테타에 참여했던 그레고리 올로프의 동생인 알렉세이 올로프(Alexei Orlof)의 손에 암살당하였다. 페터의 암살에 캐서린이 관여했는지의 여부는 아직까지 아무런 근거가 없어서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페터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그중에서도 여섯 살때부터 슐뤼쎌부르크에 감금되어 생활했던 이반 6세(1740-1764), 엘리자베트의 딸인 타라카노바(Tarakanova) 공주(1753-1775)가 캐서린의 자리를 넘보는 후보자로서 의심을 받았지만 역시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페터 대제의 손녀이며 페터 대제의 딸인 엘리자베트와 알렉세이 라주모브스키 사이에서 태어난 옐리자베타 타라카노바는 캐서린의 왕좌에 위험이 된다고 하여 캐서린의 정부인 그리고리 올로프의 동생 알렉세이 올로프를 시켜 이탈리아의 투스카니를 여행중이던 타라카노바를 체포하여 생페터스부르크의 베드로-바울 요새에 감금하였다. 타라카노바는 열악한 환경에서 폐염으로 22세에 세상을 떠났다.  

 

 

페터가 죽자 페터의 아들인 파울(Paul) 대공이 후계자로서 짜르가 되어야 했지만 너무 어리기 때문에 귀족들은 우선 캐서린을 섭정여제로 추대하였다. 다만, 귀족들은 캐서린이 선대 러시아 황제들의 혈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독일 출신이기 때문에 여제로 추대할수 없다고 하면서 파울 대공이 장성할 때까지 섭정의 지위만을 부여하였다. 그렇지만 캐서린은 어린 아들을 제치고 직접 여제가 되고 싶었다. 캐서린은 스웨덴 영토인 발트해 동부지역의 어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나중에 여제로 등극한 카테리네 1세(Catherine I)의 선례를 들어서 자기도 여제가 될수 있다고 주장하고 만일 이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차 없이 처단할 것임을 비쳤다. 귀족들은 자기들이 추대한 섭정이 그렇게 나오자 결국 1762년 캐서린을 페터 3세의 뒤를 이은 제정러시아의 여제로 삼고 카테리네 2세라고 불렀다. 캐서린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귀족들도 있었다. 이들은 캐서린을 왕위 찬탈자로 보고 다시 쿠테타를 일으켜 캐서린을 축출하고 파울을 짜르로 삼을 계획까지 꾸몄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제정러시아를 입헌군주국의 형태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사람이 나서지 않아서 이 계획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캐서린은 죽는 날 까지 34년 동안 여제로서 제정러시아를 통치하였다.

 

캐서린 1세(1687-1727)는 라트비아의 링겐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평범한 여인이었지만 페터 대제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그의 두번째 부인이 되었다. 캐서린은 남편 페터 대제가 1725년 세상을 떠나자  제정러시아의 여제로서 등극하여 172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2년 동안 여제로 있었다. 캐서린의 세상을 떠나자 페터 대제의첫째 부인의 아들인 페터 2세가 짜르가 되었다. 캐서린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첫 딸은 안나 페트로브나로서 그의 아들이 나중에 페터 3세로서 짜르가 되었으며 둘째 딸 엘리자베트는 이반 6세의 뒤를 이어 1741년부터 1762년까지 무려 20년간 여제로서 재임하였다. 엘리자베트가 세상을 떠나자 언니의 아들인 페터 3세가 짜르가 되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만큼이나 대단히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