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스웨덴의 빅토리아

참고자료 6 비운의 구스타브 아돌프

정준극 2010. 1. 16. 06:42

참고자료 6

비행기 사고로 서거한 구스타브 아돌프

빅토리아 공주의 할아버지, 현 국왕인 구스타브16세의 아버지

 

구스타브 아돌프 (황태자 시절)

 

구스타브 아돌프(Gustav Adolf: 1906-1947)는 현 국왕인 구스타브16세의 아버지이며 빅토리아 공주의 할아버지이다. 구스타브 아돌프의 아버지의 이름도 구스타브 아돌프이다. 아버지 구스타브 아돌프는 나중에 구스타브6세가 되었다. 다시 반복되는 얘기지만 구스타브6세는 황태자 시절인 1926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경주의 서봉총을 발굴한 인물이다. 그의 아들인 구스타브 아돌프는 왕위계승 서열 1번이었으나 1947년, 41세의 한창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태어난지 1년 밖에 안되는 아들 칼 구스타브가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며 나중에 현 국왕인 구스타브16세가 된 것이다. 운명은 그렇게 하여 오늘날 빅토리아 공주가 차기 국왕이 되도록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이제 스웨덴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비행기 사고에 대하여 조금 더 알아보자.

 

시빌라 황태자비. 독일 작세-코부르크-고타의 공주. 현국왕인 구스타브16세의 어머니. 위로 딸만 넷을 낳고 이어 막내로 아들 칼 구스타브(현국왕)을 낳았는데 낳은지 1년후에 남편 구스타브 아돌프 황태자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스웨덴의 왕비가 되려다가 되지 못했다.

 

1947년 1월 26일 오후, 황태자인 구스타브 아돌프는 수행원 2명과 함께 네덜란드를 방문하고 스톡홀름으로 돌아오는 KLM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스톡홀름으로 가는 KLM 비행기는 기종이 소형 더글라스 DC-3이었다. 구스타브 아돌프는 네덜란드의 왕위계승자인 율리아나 공주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네덜란드에서 왕실 사냥행사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스톡홀름행 KLM은 암스테르담에서 출발부터 지연하였다. 비행기는 스톡홀름으로 가기 전에 덴마크 코펜하겐의 카스트루프(Kastrup)공항에 잠시 착륙하였다가 떠나는 일정이었다. 카스트루프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지상에서 50미터 정도 상승했을 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앞부분이 수직으로 떨어져 땅에 닿자마자 폭발하였다. 비행기에 탑승했던 구스타브 아돌프 황태자를 비롯한 22명 전원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승객 16명과 조종사를 포함한 승무원 6명이었다.  승객 중에는 미국의 인기 가수인 그레이스 무어(Grace Moore)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톡홀름에서의 공연차 가던 길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추락의 이유는 승강타의 돌풍 잠금장치(Gust lock)를 조종사가 깜빡 잊고서 잠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조종사는 암스테르담에서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비행시간이 촉박하여 제대로 체크리스트를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종사의 부주의로 스웨덴의 역사가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구스타브 아돌프 황태자가 탔던 것과 같은 기종인 DC-3

 

구스타브 아돌프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2차 대전을 일으킨 때에 스웨덴의 황태자였다. 당시 나치는 스웨덴을 나치의 깃발 아래에 두고자 노심초사하였다.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스웨덴은 끝까지 나치에 협조하지 않고 버티었다. 얼마후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유럽에서 전화의 불길이 치솟기 시작할 때에 스웨덴의 일부 저널리스트와 역사가들은 구스타브 아돌프 황태자가 나치에 협조적이며 특히 히틀러 및 헤르만 괴링과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주장으로 당시 스웨덴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태자가 그럴수 있느냐?’면서 거센 논란이 일어났었다. 사실상 구스타브 아돌프는 스웨덴의 공식대표로서 히틀러와 괴링을 포함한 나치 핵심인사들과 몇 번 만난 일이 있었다. 더구나 괴링은 2차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스웨덴에 별장을 두고 스웨덴의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를 가진바 있다. 구스타브 아돌프 황태자는 정치문제에 대하여는 거의 말이 없었고 또한 무슨 메모같은 것을 남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가 과연 나치에게 협조적이었는지의 여부는 입증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스웨덴 왕실로서는 뜻하지 아니한 소문에 휩싸인 셈이었다. 나중에 괴링의 양자(養子)라는 사람이 증언하기를 ‘황태자 전하가 아버지(괴링)를 만나러 온 일이 있지만 만나지 못했으며 그 이후로도 황태자 전하와 아버지(괴링)는 대단히 불편한 관계였다’고 말하는 바람에 구스타브 아돌프 황태자의 나치 협조론은 신빙성이 없는 소문으로 마무리 되었다. 또한 스웨덴 왕실도 성명서를 내고 ‘황태자가 나치를 동정했다는 내용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아는바가 없다’면서 소문을 일축했다.

 

구스타브6세 국왕(양복입은 노인)과 나치독일의 헤르만 괴링, 그리고 구스타브 아돌프 황태자. 1939년 스톡홀름 왕궁에서

 

구스타브 아돌프 황태자는 1932년 10월 20일, 독일의 코부르크(Coburg)에서 작세-코부르크-고타(Saxe-Coburg-Gotha)의 시빌라(Sybilla)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시빌라 공주는 작세-코부르크 및 고타의 영주인 칼 에두라르트 공작의 딸로서 구스타브 아돌프와는 6촌간(double cousin)이 된다. 그리고 시빌라공주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고손녀가 된다. 구스타브 아돌프 황태자와 시빌라는 어느새 다섯 자녀를 두었다. 위로부터 네 아이는 모두 딸이고 다섯째 막내가 아들로서 바로 현 국왕인 구스타브16세(1946-)이다. 구스타브16세의 누이 4명은 2010년 현재 모두 생존해 있다. 첫째인 마르가레타는 76세이며 둘째인 비르기타는 73세이고 셋째인 데지레는 72세이며 넷째인 크리스티나는 67세이다. 

 

칼스보리(Karlsborg)섬에 있는 구스타브 아돌프 황태자와 시빌라 황태자비의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