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스웨덴의 빅토리아

참고자료 7 구스타브6세

정준극 2010. 1. 16. 06:48

참고자료 7

67세에 국왕이 된 구스타브6세

빅토리아 공주의 증조할아버지

 

 

구스타브6세는 현 스웨덴 국왕인 구스타브16세의 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6세인데 손자는 16세라고 하것은 무언가 계산이 맞지 않는 것이 아니잖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왕실 문제이므로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구스타브6세가 현 국왕인 구스타브16세의 할아버지이므로 구스타브6세는 차기 왕위계승 1순위에 있는 빅토리아 공주에게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구스타브6세는 그의 아버지인 구스타브5세가 하도 오래 왕의 자리에 있는 바람에 67세의 양로원 나이에 국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6.25 사변이 일어난 1950년의 일이었다. 스웨덴은 6.25사변 때에 UN군의 일환으로 160명 규모의 야전의무부대와 병원선을 파견하였다. 그같은 결정은 구스타브5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내린 결정이다. 스웨덴 의무부대가 한국에 와서 부상병들을 돌봐주고 메디컬 센터(서울 을지로 5가)를 지어주는 등의 고마운 일을 하고 철수한 것은 1957년 4월이었다. 새로 국왕이 된 구스타브6세가 이들의 귀환을 환영하였다.

 

1950년 9월에 국왕의 자리에 오른 구스타브6세(구스타브 아돌프) 역시 오래 살아서 무려 23년 동안 국왕으로 있다가 1973년에야 겨우 요단강을 건너갔다. 향년90세였다. 물론 재직기간 23년은 그다지 장기집권도 아니다. 현재의 국왕인 구스타브16세로 말하자면 1973년에 국왕이 되어 2010년으로 36년을 건재하고 있으니 이에 비하면 약과이다. 현재의 국왕인 구스타브16세가 90세 할아버지인 구스타브6세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사연은 앞에서도 누차 언급하였으므로 재탕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기억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잠깐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구스타브6세에게는 4남 1녀가 있었다. 큰 아들은 이름도 똑 같은 구스타브 아돌프였다. 2남은 시그바르드(Sigvard), 3남은 베르틸(Bertil), 4남은 칼 요한(Carl Johann)이었고 딸은 잉그리드였다. 큰 아들 구스타브 아돌프(1906-1947)는 아버지인 구스타브 아돌프에 이어 왕위계승 2순위가 되었다. 당시 아버지 구스타브 아돌프는 황태자로서 언제 국왕이 될지 그저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아들인 구스타브 아돌프로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그저 세월만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중 아들 구스타브 아돌프가 41세가 되는 해에 비행기를 타고 코펜하겐 부근의 어떤 비행장에 착륙하려는데 추락하여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왕위계승 순위 2번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 다음은 누구를 2번으로 택해야 할 것인가? 이때 구스타브5세 국왕은 용단을 내려 아직 1살밖에 되지 않은 칼 구스타브를 왕위계승 2번으로 선정하였으니 그가 빅토리아 공주의 아버지요 현재의 국왕인 구스타브16세이다. 1950년,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터진 해에 구스타브5세가 세상을 떠났고 이어 오래 기다렸던 구스타브 아돌프가 67세로서 국왕이 되었으니 그가 구스타브6세이다. 구스타브6세는 그후 23년동안 국왕의 자리에 있다가 1973년에 향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뒤를 이어 현재의 국왕인 구스타브16세가 대관식을 가졌다는 것은 이미 소개한바와 같다.

 

구스타브6세와 루이스왕비. 두분은 1926년 경주에서 서봉총 발굴작업에 참여하였다.

 

구스타브6세는 황태자 시절부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가 국왕이 되자 과거의 왕실 규범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자꾸 변하는데 옛날 생각만 고집하고 있을수가 없어서이다. 근자에 우리나라에서 정부가 수도이전은 불가하다는 세종시 수정안을 제시하자 정치인이라고 자인하는 어떤 여자는 ‘과거에 약속된 것은 변경하면 안된다’는 내용의 주장을 하여 사태를 괴롭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 과거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국민의 동의를 얻어 고쳐야 할것이지 노모씨가 선거에서 재미 보기 위해 뱉은 약속을 무슨 진리나 되는 것처럼 집착하여 과거에 약속한 것은 변경하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구스타브6세는 오래 동안 기다리던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우선 ‘국왕 홀로 나라를 통치한다’(The King alone shall govern the realm)라는 개념을 개정하여 국민이 나라를 통치한다는 개념으로 바꾸고자 했다. 당시 일각에서는 스웨덴도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완전히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구스타브6세를 사랑하는 백성들은 1975년에 군주제를 유지하되 군주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통치하는 내용으로 개헌을 완성 하였다.

 

구스타브6세는 진정한 학자였다. 그는 건축과 식물학의 권위자였으며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다. 식물학에 있어서는 철쭉(Rhododendron)꽃의 권위자였다. 소피에로(Sofiero)에 있는 그의 여름별장에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철쭉꽃 콜렉션이 있었다. 그는 8만권의 장서를 보유하였다. 중요한 것은 비록 주요 부분에 한하지만 그 모든 장서를 실제로 다 읽어보았다는 것이다. 정말 대단한 학자였다. 그는 중국문학과 동양역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학술원(British Academy)은 구스타브6세를 정규회원으로 가입시킬 정도였다. 그는 전문가를 능가하는 고고학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여러 역사적 지역에 대한 발굴 작업에 직접 참여하였다. 1926년에 우리나라까지 와서 경주 고분을 발굴하고 금관을 찾아낸 것은 그의 빛나는 업적 중의 한가지였다. 그는 살아있는 백과사전이었다. 무궁한 지식은 당대의 석학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는 스포츠에도 재능이 많았다. 테니스는 프로급이었으며 골프 솜씨도 대단했다. 또한 릴낚시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그는 겸손한 성격이었으며 화려하거나 의식적인 것을 피하였다. 모든 일을 국가를 위해, 백성들을 위해, 그리고 학문의 발전을 위해 전념하였다. 백성들은 구스타브6세를 대단히 존경하고 사랑했다.

 

구스타브6세가 황태자 시절에 조선을 방문하여 경주에서 발굴한 서봉총 금관. 보물399호.

 

이제 구스타브6세의 가족에 대하여 알아보자. 알아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스웨덴의 역사에 대하여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도록 하기 위해 설명코자 한다. 구스타브6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마가렛(Margaret)이었다. 1905년 윈저성의 성조지채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윈저성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은 마가렛이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공의 셋째 아들인 아서(Arthur)공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구스타브6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사위가 되며 현재의 국왕인 구스타브16세는 손녀사위의 손자가 된다. 황태자인 구스타브와 마가렛은 슬하에 다섯 자녀를 두었다. 첫째가 구스타브 아돌프(1906-1947)로서 현 국왕인 구스타브16세의 아버지가 되는데 잘 알다시피 현재의 국왕이 1살 때인 1947년에 비행기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둘째는 시그바르드(1907-2002)왕자이고 셋째는 잉그리드(1910-2000)공주며 넷째는 베르틸(Bertil)왕자(1912-1997)이고 다섯째는 칼 요한(1916-)왕자이다. 마가렛은 1920년 5월 1일 참으로 안타깝게도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수술을 받는 중에 병균에 감염되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마가렛은 8개월째 임신 중이었다. 구스타브는 마가렛을 하가(Haga)의 왕실묘역에 안장하고 시간만 있으면 찾아가 애도하였다.

 

구스타브 아돌프(훗날 구스타브6세)와 마가렛 왕비와 자녀들

 

구스타브는 마가렛을 잃은후 3년후인 1923년 황태자비가 없으면 안된다는 주위의 권고에 따라 영국의 왕족인 루이스 마운트배튼(Louise Mountbatten)과 재혼하였다. 결혼식은 1923년 11월 3일 런던의 성제임스궁에서 거행되었다. 루이스는 마운트배튼경의 누이동생이며 현재의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부군인 필립공의 숙모가 된다. 루이스는 또한 빅토리아 여왕의 고손녀(great great-child)가 된다. 구스타브와 루이스 사이에는 생존한 자녀가 없다. 결혼후 아이를 임신하였으나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사산하였다. 1925년의 일이었다. 구스타브는 상심한 루이스 왕비를 위로하기 위해 이듬해에 루이스와 함께 아시아 여행을 떠났으며 우리나라의 경주에까지 와서 서봉총을 발굴하였다. 구스타브는 그로부터 25년후인 1950년에 구스타브5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1973년 90세의 나이에 폐렴이 악화되어 헬싱보리(Helsingborg)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어서 현재의 국왕인 구스타브16세가 27세로서 왕위에 올라 오늘에 이르렀음은 잘 아는 사항이다. 구스타브6세는 스톡홀름의 리다르홀름교회(Riddarholmskyrkan)에 안치되는 전통을 따르지 않고 하가(Haga)라는 곳에 있는 왕실묘역에 이미 세상을 떠난 두 부인의 묘소 옆에 매장되었다. 순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