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신동 모차르트

잘츠부르크 대주교 콜로레도(Colloredo)

정준극 2010. 1. 20. 23:00

잘츠부르크 대주교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백작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의 고용주

 

콜로레도 대주교

                            

모차르트와 관련된 사항을 점검하다보면 잘츠부르크의 대주교에 대한 얘기가 심심찮게 뒤따른다. 당시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는 한 나라의 군주와 같은 위치였다. 모차르트가 활동할 때는 합스부르크가 신성로마제국을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비엔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다. 오스트리아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하나의 공국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판도는 지금과는 달리 여러 작은 나라로 갈라져 있었다. 잘츠부르크 지역은 지금은 오스트리아에 속하여 있지만 당시에는 대주교가 통치하는 별도의 독립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대주교는 군주와 같았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활동할 때의 대주교는 콜로레도(Colloredo: 1732-1812)라는 사람이었다. 콜로레도의 풀 네임은 상당히 길다. Hieronymus Joseph Franz de Paula Graf Colloredo von Wallsee und Melz이다. 번역하기도 힘든 긴 이름이다. 여기에 Prince-Archbishop of Salzburg(잘츠루브크 대주교공자)라는 공식 타이틀이 붙는다. 그는 1771-1803년에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로서 군주행세를 하였다.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 레지덴츠플라츠

 

콜로레도 대주교는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의 고용주였다. 당시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는 군주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다른 군주(국왕)들과 마찬가지로 별도의 오케스트라를 가지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가 잘츠부르크에 와서 처음으로 일자리를 구한 것이 대주교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였다. 레오폴드는 처음에 제4 바이올리니스트였으나 나중에 제2 바이올리니스트로 승진하였고 그후에는 부악단장(부음악감독)까지 되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당시에 음악인들은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취급을 받았다. 연봉을 받는 고용인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군주에게 고용되면 그의 자녀들도 군주의 녹을 먹고 산다고 생각하여 군주에게 종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레오폴드가 대주교에게 고용되어 있으므로 모차르트도 대주교의 고용인처럼 취급을 받았다. 실제로 콜로레도 대주교는 모차르트도 고용하여 월급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드와 함께 집을 떠나 유럽의 산지사방을 다니며 순회연주를 자주했다. 파리에도 가고 비엔나에도 갔으며 이탈리아에도 갔다. 콜로레도는 모차르트가 그저 밥만 먹으면 어디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대단히 화가 났다. 감히 고용인 주제에 허락도 받지 않고 출장만 다니는 것이 못마땅하여 혼을 내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비엔나의 독일기사단 건물(구 콜로레도 대주교 궁전)에 부착되어 있는 모차르트 기념 명판. 비엔나에 온 모차르트가 1781년 3월 16일부터 5월 2일까지 기거했던 장소라는 내용이다.

                              

어느날 콜로레도는 마침내 모차르트에게 Mai er verlassen, ich brauche ihn nicht!(떠나려면 떠나라, 너같은 것은 필요없다!)고 말하면서 해고했다. 결국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지만 취직자리가 어려운 때에 그나마 자리도 해고당한 것은 타격이었다. 모차르트는 그를 기화로 비엔나로 진출하였다. 레오폴드는 해고당하지 않고 잘츠부르크에 계속 남아 있었다. 하지만 도무지 승진이 되지 않았다. 만년 부악장이었다. 부악장의 업무 중에서 한가지는 단원이 사퇴하거나 사망했을 때 충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주교는 아마도 레오폴드를 밉게 보아서인지(모차르트 때문에) 도무지 충원을 해주지 않았다. 오케스트라는 비틀거렸으며 따라서 레오폴드의 입장도 비틀거렸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비엔나의 중심지역에 별도의 시내궁전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슈테판성당 뒤편에 있는 독일기사단(Duetsches Ordens) 건물이다. 비엔나로 무작정 상경한 모차르트는 마땅히 거처할 곳도 없었다. 그래서 콜로레도의 비엔나 시내궁전에서 당분간 하인들과 함께 지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콜로레도는 대노하여서 ‘아니, 모차르트가 내 집에 머물고 있다고? 당장 내보내시오!’라고 지시했다. 모차르트는 ‘더러워서 나간다!’라며 보따리를 싸 들고 하숙집을 구하러 다녀야 했으며 그래서 예전에 독일 만하임에서 만났던 베버여사를 우연히 다시 만나 그 집에 하숙을 정했고, 그래서 그 집 셋째 딸인 콘스탄체와 결혼하게 되었던 것이다. 콜로레도 대주교가 어떤 배경의 사람인지, 어떻게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되었는지, 그의 정책은 어떤 것이었는지 등에 대한 것은 별로 흥미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략코자 한다. 다만, 모차르트를 쫓아내고 신경질을 부린것만 보면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라고 생각할수 있지만 계몽사상을 존중하고 개신교에 대하여도 관대한 정책을 베풀었던 것을 생각하면 반드시 못된 인간이라고 볼수만은 없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요셉2세 황제와 흡사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콜로레도는 성지순례와 미신적인 기복행위를 금지하였으며 탄원기도를 하면서 행진하는 것을 제한하였고 교회에 대한 지나친 장식을 억제하였다. 그는 또한 미사를 보는 중에 라틴어 음악을 축소하고 대신 독일의 찬송가 형태를 도입하였다. 물론 반발도 많이 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콜로레도를 ‘비밀 루터교인’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비엔나의 도이체스 오르덴스 하우스 통로

 

대주교가 통치하는 독립된 공국 형태의 잘츠부르크가 어느 때에 어떻게 해서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약간 중요한 사항이다.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될 때에 잘츠부르크는 콜로레도의 소관이었다. 1801년 12월, 나폴레옹의 군대가 잘츠부르크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해 왔다. 콜로레도는 대군과 맞설 여력이 없기 때문에 잘츠부르크를 도망쳐 나왔으며 그후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1803년 잘추부르크는 장기간의 대주교 통치로부터 탈피하여 일반화되었다. 콜로레도는 군주의 자리를 내놓았다. 잘츠부르크는 그후 1805년에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다가 1809년부터는 잠시 바바리아 공국에 합병되었으며 1816년부터 다시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콜로레도는 잘츠부르크의 군주 자리는 내놓았지만 181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잘츠부르크교구장으로서는 계속 남아 있었다. 1812년이라면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오욕을 무릅쓰고 철수한 해이다.

 

뒤에서 바라본 잘츠부르크대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