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신동 모차르트

프라하의 베르트람카 모차르트 기념관

정준극 2011. 6. 10. 08:52

프라하의 베르트람카 모차르트 기념관

Mozart Museum of Villa Bertramka - Muzeum W.A. Mozarta a manzelu Duskovych

 

빌라 베르트람카의 모차르트 기념관

 

베르트람카(Bertramka)는 프라하에 있는 빌라의 명칭이다. 프라하 구시가지에서 약 1.5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18세기에는 아직 프라하 성문 밖이었다. 체르니 브르츠(Cerny vrch: 검은 언덕)이라는 곳의 포도밭 사이에 있었던 저택이었다. 베르트람카는 모차르트가 프라하를 방문하여 머물던 집이었다. 지금은 모차르트 기념관으로 되어 있다. 모차르트 당시 이 빌라의 주인이었던 두세크(Duschek: Dusek) 가족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베르트람카를 누가 지었는지는 모른다. 원래 이 곳의 저택과 포도원은 성브루노(St Bruno)회에 속한 카르투시아 수도원이 수세기 동안 소유하고 있었다. 현재의 빌라는 대략 1700년경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가운데 건물에는 양쪽으로 커다란 층계가 있어서 위층으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당시 프라하의 부유층들은 교외에 별장을 두고 휴식도 하고 심심풀이로 농사도 지었다. 베르트람카도 그런 용도로 지은 빌라이다. 베르트람카라는 명칭은 아마도 18세기 중반에 이 곳을 소유했던 베르트람 가문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본다.

 

빌라 베르트람카. 모차르트 기념관

 

베르트람카는 1784년 체코의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인 프란티세크 두세크(Frantisek Dusek: 1731-1799)가 매입하였다. 그의 부인인 요제파 두스코바(Josefa Duskova: 1754-1824)는 당대의 소프라노였다. 이 두 부부는 모두 모차르트와 절친한 사이였다. 두세크 가족이 베르트람카를 매입한 이래 이 집은 15년 동안 유명 예술가들과 귀족들의 사랑방이었다. 저녁에는 간단한 음악회가 열렸고 간혹 시낭송회도 열렸다. 여름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콘서트도 열렸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인 요한 네포무크 훔멜(Johann Nepomuk Hummel: 1778-1837)도 이 곳의 단골 손님이었다. 모험가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을 가진 자코모 카사노바(Giacomo Casanova: 1725-1798)도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1799년에 프란티세크 두세크가 세상을 떠난 후에 이 집은 몇 사람의 손을 거쳐오다가 1838년에 람베르트 포펠카(Llambert Popelka)라는 사람이 소유가 되었다. 그는 모차르트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모차르트의 아들인 칼 토마스 모차르트와 연락하여 1856년에 모차르트의 흉상을 빌라의 정원에 설립하였다. 1887년에는 '돈 조반니'가 초연된지 1백 주년을 기념하는 모임도 주선하였다. 안토닌 드보르작도 참석한 모차르트 추모회였다. 포펠카는 모차르트가 묵었던 방 두 개를 이후 어느 누구도 사용하지 못하며 대신 모차르트의 기념관으로 만들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모차르트를 기억하는 영묘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베르트람카는 1차 대전이 끝난 해인 1918년까지 포펠카 가문의 소유였다. 그후 여러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가 1929년에는 체크공화국의 모차르트협회 소유가 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전쟁으로 파괴된 부분을 복구하는 공사가 점진적으로 추진되었고 1956년에는 드디어 모차르트기념관이 오픈하게 되었다.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서였다.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로지나) 그림

 

[모차르트와 베르트람카]

모차르트는 모두 다섯번 프라하를 방문했다. 그중에서 두번은 다른 곳으로 가다가 들린 것이다. 첫번째 방문은 1787년 1월이었다. 다 아는대로 '피가로의 결혼' 공연 때문이었다. 그 전 해인 1786년 4월에 '피가로의 결혼'의 비엔나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한 해가 지나자 비엔나 사람들은 모차르트에 싫증을 느끼고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돌렸다. 대표적이 사람은 안토니오 살리에리였다. 그때 쯤해서 모차르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모함과 질투도 받고 제대로 돈벌이도 하지 못했다. 모차르트는 돈이 필요했다.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피가로의 결혼'을 가지고 프라하를 찾아온 것이다. 프라하에서 '피가로의 결혼'은 놀랄만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프라하의 사람들은 변치않고 모차르트에 열광하였다.

 

모차르트는 1787년 1월 11일에 프라하에 도착하였다. 그의 이름은 이미 프라하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프라하 성문의 세관원도 모차르트의 여권을 보자 '아, 선생께서 그 피가로를 만드신 분이군요'라면서 극진하게 대우하여 주었다. 요제파와 프란티세크 두세크 부부는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를 만난 일이 있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프라하를 처음 방문하였을 때 두 사람은 여행 중이어서 모차르트를 환대하지 못하였다. 프라하에서 '피가로'가 대성공을 거두자 오페라 매니저인 파스쿠알레 본디니는 모차르트에게 프라하를 위해 새로운 오페라를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다. 비엔나로 돌아갔던 모차르트는 그해 가을, 아마 9월 쯤해서 '돈 조반니'를 가지고 프라하를 다시 방문하였다. 이 때 모차르트는 프라하 중심지역에 있는 '세마리 황금 사자의 집'이라는 여관에 여장을 풀고 있었다. 이 여관 역시 두세크의 소유였다. 오늘날 이 여관이 있던 건물에는 '이 집에서 모차르트가 1787년에 머물렀었다'(V tomto dome ydlel Mozart v roce 1787)이라고 쓴 명판이 붙어 있다. 모차르트는 이 여관과 베르트람카 저택에서 '돈 조반니'를 마무리하였다. 베르트람카 저택은 조용하고 안락하였다. 모차르트는 골치 아픈 모든 일을 잊고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수 있었다.

 

'돈 조반니'의 한 장면

                         

'돈 조반니'의 서곡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는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에스테이트 극장에서 막이 오르기 직전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서곡이 시내의 여관에서 만들어졌는지, 또는 베르트람카 저택에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10월 29일의 '돈 조반니' 초연은 대단한 갈채를 받은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생애의 마지막 시기를 '돈 조반니'에 대한 프라하 시민들의 환호를 생각하며 행복하게 보냈다. 그렇다고 해서 재정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모차르트는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1791년 여름에 프라하를 다시 방문하였다. 레오폴드 2세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레오폴드2세 이전의 황제인 요셉2세는 모차르트를 상당히 지원하였으나 레오폴드2세는 특별히 모차르트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모차르트로서는 새로운 황제인 레오폴드2세의 눈에 들어야 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티토의 자비'는 레오폴드 2세의 대관식 축하행사의 일환으로 작곡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모차르트의 이름이나 '티토의 자비'라는 오페라의 타이틀은 대관식을 소개하는 브로슈어에 기록조차 되지 않았다. 이에 속이 상한 모차르트가 궁정의 담당관리에게 항의하는 뜻에서 편지를 보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다만, 프라하의 사람들은 '티토의 자비'에 대하여 열광하였다. 아무튼 모차르트가 '티토의 자비'를 위해 프라하에 갔을 때 베르트람카에서 머물렀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어서 알수가 없다.

 

체코 소프라노 요제파 두세크

 

모차르트의 60곡 아리아 중에서 소프라노를 위한 것이 35곡이나 된다. 모차르트는 베르트람카의 여주인인 요제파를 위해 2-3개의 아리아를 작곡하였다. 1787년에는 요제파를 위해 Bella mia fiamma -- Reste, o cara 를 작곡했다. 이 아리아와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어느날 요제파는 모차르트가 자기를 위해 아리아를 작곡토록 하기 위해 모차르트를 어느 방에 들어가도록 하고 문을 잠구었다. 모차르트는 할수 없이 아리아를 작곡해야 했다. 하지만 대단히 어렵게 작곡하여 요제파를 골탕먹였다고 한다. 1791년에는 Io ti lascio, o cara, addio 를 작곡하였다. 또 다른 아리아인 Non piu di fiori 도 요제파를 위해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제파는 콘서트 때에 이들 아리아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모차르트가 1791년 12월 세상을 떠난후 두세크 부부는 모차르트의 두 아들에 대하여 여러 모로 돌보아주었다. 칼 토마스 모차르트는 베르트람카에서 5년을 지냈다.

 

베르트람카 저택의 정원에 있는 모차르트 흉상

 

[모차르트 기념관](Bertramka Mozart Museum)

베르트람카 저택의 일부를 모차르트 기념관으로 만들어 1956년에 오픈하였다. 모차르트의 프라하 방문, 베르트람카 체류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두 대의 피아노는 아마도 모차르트가 작곡할 때에 사용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기념관에는 모차르트의 머리칼도 보관되어 있다. 가든에는 모차르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여름에는 베르트람카에서 각종 연주회가 열린다. 모차르트의 향취를 느낄수 있는 귀중한 연주회들이다. 연주회는 날씨가 좋으면 가든에서 열린다. 그렇지 않으면 저택내의 살라 테레나(Sala Terrena)에서 열린다. 70석 규모의 홀이다. 기념관은 2009년 11월 1일 문을 닫은 일이 있다. 모차르트 협회가 베르트람카 저택을 협회에 기증하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협회의 회장은 이트카 스니츠코바 여사였다. 여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기증문제는 잠잠해 졌지만 실은 반환 소송에 걸려 있어서 문을 열지 못하였다. 프라하 시장이 개입되었고 프라하의 유지들도 개입된 소송이었다. 결국 법원은 모차르트협회의 손을 들어주어 모차르트기념관은 2010년 7월 6일 다시 오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