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신동 모차르트

모차르트와 프라하

정준극 2011. 6. 10. 08:47

모차르트와 프라하

 

'돈 조반니'가 초연을 가진 프라하의 에스테이트극장 오디토리움과 무대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당시의 프라하는 오스트리아제국의 보헤미아에 속하여 있었다. 비엔나의 모차르트는 프라하와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모차르트의 전기작가인 마이나르드 솔로몬(Maynard Solomon)은 “모차르트는 프라하를 고마운 도시, 좋은 도시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비엔나가 그를 무시하였으며 심지어는 조롱하였을 때 프라하는 그를 도와주고 이해해 주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모차르트 자신도 프라하에 대하여 ‘Meine Prager verstehen mich'(나의 프라하는 나를 이해한다)고 말하였다. 모차르트가 말한 이 말은 프라하 사람들은 물론 보헤미아 지방에서 유행어처럼 사용되었다. 프라하에 친구들이 많았던 것도 모차르트가 프라하를 사랑하게 된 이유중의 하나이다. 여러 친구들 중에서 소프라노 요제파 두셰크(Josepha Duschek: 1754-1824: 요제피나 두스코바)는 모차르트와 친구 이상의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요제파 두셰크는 모차르트가 1789년에 베를린을 가기 위해 라이프치히를 거쳐서 갔을 때에 일부러 라이프치히에 별도로 가서 모차르트가 주선한 음악회에 출연하기도 했다. 프라하에서 태어난 요제파 두셰크의 체코식 이름은 요세피나 두스코바(Josefina Duskova)였다.

 

요제피나 두스코바

 

[피가로의 프라하 초연]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은 1786년 5월 1일 비엔나의 궁정극장(Burgtheater)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박수는 받았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찬사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해 12월 초, ‘피가로의 결혼’은 프라하에서 공연되었다. 놀랄만한 대성공이었다. 프라하의 신문인 오버포스트암트차이퉁(Oberpostamtzeitung)은 “위대한 걸작이다. 그 어떤 오페라도 ‘피가로의 결혼’만큼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없다. 이미 프라하에서 몇 번이나 공연되었지만 ‘피가로의 결혼’은 공연을 거듭할수록 프라하로부터 무한정의 박수갈채를 받았다.”라고 보도했다. 프라하의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프라하에 와서 ‘피가로의 결혼’이 공연되는 것을 직접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피가로의 결혼’에서 오케스트라를 맡았던 사람들과 프라하의 몇몇 음악애호가들은 모금을 하여 비엔나의 모차르트를 프라하로 초청하였다. 모차르트는 이듬해인 1787년 1월 11일 프라하에 도착했다. 오늘날에야 약 5시간만 여행하면 되는 거리였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이틀이나 걸리는 먼 여행길이었다. 모차르트는 1월 17일의 공연을 지켜보았다. 관중들은 극장에 앉아 있는 모차르트를 뜨겁게 환영하였다. 모차르트는 1월 22일의 공연을 직접 지휘하였다. 관중들은 집으로 돌아갈 줄을 몰랐다.

 

'피가로의 결혼'과 '돈 조반니'가 초연된 프라하의 에스테이트극장(Stavovske divadlo)

 

1월 19일, 모차르트는 프라하에서 특별한 연주회를 가졌다. 그의 교향곡 38번 D 장조를 초연한 것이었다. 이 교향곡은 나중에 ‘프라하교향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날 연주회에서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아리아인 Non piu andrai(이제는 날지 못하리)를 즉흥변주곡으로 만들어 피아노로 연주하였다. 관중들은 모차르트에게 정말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모차르트는 사람들에게 ‘이번 프라하의 며칠은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프라하에서의 ‘피가로의 결혼’이 대성공을 거두자 '피가로의 결혼'을 제작했던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파스쿠알레 본디니(Pasquale Bondini)는 모차르트에게 또 다른 오페라의 작곡을 간절히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모차르트와 콤비인 로렌조 다 폰테의 새로운 대본으로 ‘돈 조반니’가 탄생하게 되었다.

 

프라하의 베르트람카 모차르트 기념관. 70석 규모의 콘서트홀도 있다.

 

[프라하의 돈 조반니]

모차르트/다 폰테의 합작인 ‘돈 조반니’의 역사적인 세계 초연은 모차르트가 프라하를 방문하여 ‘피가로의 결혼’을 직접 지휘하고 ‘프라하교향곡’을 초연한 바로 그해, 즉 1787년 10월 29일에 프라하의 에스테이트극장에서 있었다.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프라하의 오버암트차이퉁은 ‘프라하는 이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이같은 음악을 결코 들을수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돈 조반니’ 이후에 사람들은 모차르트에게 프라하에 더 머물면서 또 다른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비엔나로 돌아갔다. ‘돈 조반니’의 비엔나 초연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후 모차르트는 1790년, 즉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전에 프라하를 다시 방문하였다. 모차르트는 1790년 11월 레오폴드2세가 보헤미아의 왕으로 프라하에서 대관식을 가질 때에 이를 축하하기 위해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를 작곡하였다. 원래는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작곡해야 하지만 그가 사정상 못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모차르트에게 오페라 작곡의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모차르트는 ‘티토의 자비’를 지휘하기 위해 프라하를 방문했었다.

 

돈 조반니와 석상 그림

 

모차르트의 전기작가인 마이나르드 솔로몬은 모차르트가 오페라 한편을 더 작곡해 달라는 프라하 사람들의 간청을 들어주지 못하고 비엔나로 돌아간 것은 프라하의 음악수준이 비엔나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프라하는 비엔나와는 달리 뛰어난 성악가들도 부족하였고 오케스트라의 수준도 미약한 편이었다. 높은 수준의 음악을 만들어 내려면 역시 프라하보다는 비엔나였다. 또 하나 모차르트가 비엔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비엔나에 있는 모차르트의 후원자들 때문이었다. 당시 비엔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여서 부유하고 지체높은 귀족들이 많이 거주했다. 하지만 프라하는 말하자면 지방도시와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프라하의 귀족들도 비엔나에 가서 지내기를 선호하였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1787년에 크리스토프 글룩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모차르트는 글룩이 가지고 있던 궁정작곡가의 자리를 원했다. 모차르트는 어서 비엔나로 돌아가서 취직을 하기 위해 로비를 해야 했다. 결국 모차르트는 글룩의 자리를 얻게 되었지만 급여는 글룩이 받았던 것보다 훨씬 적었다. 글룩보다 나이가 젊기 때문이라는 이유였지만 실은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사람들의 견제때문이었다.

 

프라하의 도나우

 

[프라하의 모차르트 사랑]

프라하는 어찌하여 모차르트의 음악에 대하여 열광하였는가? 프라하는 보헤미아왕국의 수도였다. 그러다가 1620년 화이트 마운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 패배하여 오스트리아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프라하에 있던 체코의 전통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당국에 의해 적지않은 간섭을 받았고 심지어는 다른 곳으로 추방되기도 했다. 그리고 프라하에 남아 있게 된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변방의 다른 귀족들처럼 비엔나를 왕래하지 않고 프라하를 고수하였다. 프라하에 이주하여 온 오스트리아 또는 독일의 귀족들은 농노제도를 철저하게 지켰다. 결과 프라하의 주민들, 특히 농민들은 더욱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 독일어를 사용하는 타지 귀족들은 프라하에 와서 돈을 벌기 위해 공장들을 세웠다. 이들이 프라하의 경제를 장악한 것도 비엔나와 프라하의 격차를 벌이는 일이었다. 또 한가지 사항이 있다. 오스트리아가 보헤미아를 통치하게 되자 오스트리아는 개신교로 돌아섰던 체코 사람들에게 로마 가톨릭으로의 재개종을 강요하였다. 교회음악은 재개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오스트리아 당국은 체코의 모든 마을에 있는 학교의 교장들에게 지시하여 최소한 1년에 한번 이상은 가톨릭 미사를 드리기 위해 미사음악을 새로 작곡하거나 아니면 열심히 연습하도록 하였다.

 

그림과 같은 프라하의 구시가지

 

이렇게 되자 보헤미아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음악적인 지역이 되었다. 아무리 작은 시골 마을이라고 해도 종교음악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전국민의 가톨릭음악화였다. 새로운 재개종법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음악교육을 받았고 결국은 전문 음악인이 되었다. 체코의 젊은 음악가들은 귀족들의 가문에 고용되어 일했다. 더러는 프라하 이외의 지역으로 나가서 일자리를 구했다. 모차르트의 동료들중 상당수가 보헤미아 출신인 것만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었다. 한편, 프라하에 남아 있던 음악가들은 체코의 음악수준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모든 사항들이 프라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음악에 열중하게 만들었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프라하의 모차르트]

빌라 베르트람카(Villa Bertramka)는 모차르트와 친분이 두터운 두세크(Duschek) 가족의 저택이었다. 모차르트가 프라하에 오면 머무는 집이었다. 현재는 모차르트 기념관(Mozart Museum)이 되어 수많은 방문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모차르트는 프라하의 빌라 베르트람카에서 ‘돈 조반니’를 작곡하였다. 베르트람카 모차르트 기념관은 1956년에 문을 열었다. 여름철에는 베르트람카에서 정기적인 연주회가 열린다.

 

프라하의 모차르트 기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