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테너

알프레드 피케이버(Alfred Piccaver)

정준극 2010. 2. 3. 08:05

가장 이상적인 로돌포 알프레드 피케이버(Alfred Piccaver)

 

 

역사상 가장 인기 있었던 로돌포는?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테너 알프레드 피케이버(1884-1958)이다. 그는 영국계 미국인이었다. 피케이버는 미국인이면서도 비엔나를 마치 자기의 고향처럼 사랑하여 생애를 마치는 순간까지 비엔나에 머물렀다. 피케이버는 라 보엠의 로돌포(Rodolfo)로서 특히 유명했던 오페라 테너였다. 피케이버는 1884년 영국 롱 서튼(Long Sutton)의 링컨셔(Lincolnshire)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으나 두 살도 되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미국시민이 되었다. 피케이버는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노래를 좋아하는 천성을 버릴수 없어서 아버지를 졸라 1905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오페라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이던 하인리히 콘리트(Heinrich Conried)는 피케이버의 재능을 당장 알아보고 피케이버에게 뉴욕에서보다는 유럽으로 가서 본격적인 성악공부를 하라고 권장하고 당시 유명한 성악교사인 오스트리아제국의 루드밀라 프로하츠카-노이만(Ludmila Prochazka-Neumann)를 소개해 주었다. 이에 따라 피케이버는 1907년 프라하로 가서 프로하츠카-노이만 여사에게 사사하기 시작했다.

 

프라하에서 피케이버의 재능은 당장 빛을 발산했다. 피케이버는 프라하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프라하의 독일극장(Deutsches Landes-Theater)과 출연계약을 맺고 그해에 오토 니콜라이의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에 출연함으로서 오페라에 처음 데뷔하였다. 이후 피케이버는 프라하에서 플로토우, 베르디, 바그너, 모차르트, 푸치니, 구노의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으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매력적인 그의 리릭 음성은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이었다. 1910년 피케이버는 마침 프라하를 방문한 마티아 바티스티니(Mattia Battistini) 오페라단의 제안에 따라 이 오페라단과 함께 유럽순회공연의 길을 떠났다. 첫 기착지는 비엔나였다. 비엔나의 궁정오페라(현 슈타츠오퍼의 전신)는 피케이버의 아름답고 맑은 음성과 그의 지성적인 용모에 관심을 가졌다. 비엔나의 궁정오페라는 피케이버에게 당장 계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피케이버로서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피케이버는 마티아 바티스티니 오페라단과의 계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궁정오페라의 제안을 사양했다. 그로부터 2년후, 피케이버는 마티아 바티스티니 오페라단과의 계약이 끝나자 비엔나의 초청에 응답했다. 그로부터 피케이버는 평생을 비엔나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피케이버는 따듯하고 비로도와 같으며 서정적인 테너음성을 가졌으며 레가토(legato)와 딕션(가사)에 특히 훌륭했다. 그의 음색은 이탈리아 칸타빌레 스타일에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자 피케이버의 음성은 바리톤에 가까운 것으로 변화되었지만 초기의 음성은 ‘프라하의 카루소’라고 불릴 만큼 아름답고 힘찬 것이었다. 피케이버가 주로 맡은 역할은 로돌포였다. 푸치니는 피케이버의 공연을 보고 ‘가장 이상적인 로돌포’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피케이버는 비엔나에서 로돌포 이외에도 카바라도씨, 카니오, 라다메스, 플로레스탄, 렌스키, 발터(Walther)를 맡아 인기를 끌었다. 피케이버는 비엔나를 사랑했다. 비엔나 사람들의 생활스타일과 그들의 예술을 사랑했다. 그래서 어느때 메트로의 음악감독인 줄리오 가티-카사짜(Giulio Gatti-Casazza)가 뿌리치지 못할 정도의 제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피케이버는 이를 사양하고 비엔나에 계속 머물렀다. 물론 그 이후 메트로로부터 다시 제안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당연히 사양할 것이므로 공연히 헛수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비엔나 사람들은 뉴욕보다 비엔나를 택한 피케이버를 더욱 사랑하여 ‘피치’(Picci)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1914년 세계 1차대전이 일어나서 비엔나가 소란에 빠졌지만 미국시민권을 가진 그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미국이 세계 대전에 참전키로 하자 피케이버의 입장은 난처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당국은 사람들의 미국행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피케이버가 미국으로 떠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만일 비엔나에서 계속 오페라에 출연한다면 아무런 제약 없이 지내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피케이버는 계속 비엔나에 머물렀다. 전쟁이 끝나자 피케이버는 비로소 미국공연을 가지기 시작했다. 1923년 이후 주로 시카고에서 오페라에 출연했다. 시카고에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피케이버의 로돌포는 언제나 대환영을 받았다. 피케이버의 런던 코벤트 가든 진출은 1924년이었다.

 

1931년 12월 31일로서 피케이버의 비엔나 궁정오페라와의 계약은 종료되고 재계약되지 않았다. 급료문제로 극장측과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궁정오페라를 떠난 피케이버는 오스트리아의 지방도시에서 무대에 섰고 간혹 다른 나라에서도 공연했다. 1937년 오스트리아의 국내정치 상황이 앞뒤를 가늠할수 없을 정도로 혼란에 빠졌다. 오스트리아 나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으며 곧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위해 모종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피케이버는 잠시 비엔나를 떠나 있기로 결심했다. 피케이버는 런던으로 가서 레코딩을 하며 지냈다. 영국은 그가 영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들어 영국 시민이 될것을 종용했지만 피케이버는 지금까지 미국시민으로서 살아왔기 때문에 사양한다고 말했다. 전쟁이 끝나자 피케이버는 1955년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재개관에 초청을 받고 비엔나로 돌아왔다. 3년후인 1958년 9월, 피케이버는 그가 사랑했던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국장의 형태로 피케이버의 장례식을 정중하게 치루었다. 알프레드 피케이버는 유명예술인들과 함께 비엔나 중앙공동묘지(Zentralfriedhof)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