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속성 역사 정복

5. 종교개혁의 여파

정준극 2010. 2. 6. 05:32

[종교개혁의 여파](1526-1714)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얼마 후인 1526년 헝가리-보헤미아의 루이2세와 오토만제국의 술레이만이 모하츠(Mohacs)에서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였다. 전쟁의 결과 헝가리-보헤미아와 오토만제국 모두 지쳐 있게 되었고 그 틈을 타서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는 트란실바니아, 그리고 오토만터키가 점령하지 않은 헝가리의 나머지 영토를 재빨리 장악하였다. 이로써 합스부르크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상당부분을 통치하게 되었지만 오토만제국이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합스부르크는 오토만제국과 영토문제로 자주 다투게 되었다. 특히 1593년부터 1606년까지 무려 13년동안 심심하면 전투를 벌였던 것은 대표적이다. 이 기간 동안의 분쟁을 ‘긴 전쟁’(Long War)이라고 부른다. 그러는 사이에 1517년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여파가 오스트리아까지 밀려와서 합스부르크는 커다란 홍역을 치루게 되었다. 잘 아는 대로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신성로마제국의 우산 아래에 있는 많은 국가들이 개신교(주로 루터교)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독일의 여러 국가들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등 저지대국가들, 스웨덴 등 북구의 국가들, 그리고 보헤미아와 헝가리까지도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일종의 반감으로 개신교를 선호하였다.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국가들 중에서 상당수가 개신교로 방향을 선회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죽으나 사나 로마가톨릭에 남아 있어야 했다. 명색이 신성로마제국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국가들 중에서 상당수가 개신교로 돌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의 대공들도 공연히 개신교를 탄압하였다가는 큰 낭패를 볼수 있기 때문에 개신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유지하였다.

 

1526년의 모하츠 전투. 터키의 미니에이처

 

페르디난트1세의 후계자들인 막시밀리안2세, 루돌프2세, 마티아스(Mathias) 황제 등은 당연히 로마가톨릭이었지만 제국 내에서의 개신교를 묵인하다시피 했다. 유럽에서 루터교를 위주로 한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은 점차 확장되어갔다. 그러자 가뜩이나 위기감을 느낀 로마가톨릭은 개신교로 갔던 신자들을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오게 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이를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운동이라고 부른다. 로마가톨릭은 종교개혁에 편승하여 개신교도가 된 사람들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비록 개신교의 꼬임에 빠져 개신교로 개종했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면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했다. 예수회라는 단체가 로마가톨릭을 등에 업고 반종교개혁운동에 앞장섰다. 예수회(Society of Jesus)는 1540년 교황 바오로3세가 처음으로 공식승인한 종단이다. 당시 슈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놀리아(현재의 슬로베니아 일부) 등 오스트리아의 핵심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페르디난트 대공은 어린 시절부터 예수회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로마 가톨릭으로서 체면도 있고 해서 반종교개혁운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그는 우선 자기가 직접 통치하는 지역에서부터 반종교개혁운동을 열심히 펼쳤다.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그는 개신교도들을 이단으로 몰아 탄압하였다.

 

카르놀리아 의사당. 1919년부터 류블리아나대학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던 페르디난트가 1619년 사촌인 마티아스의 뒤를 이어 페르디난트 2세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기가 직접 관장하고 있는 지역뿐만 아니라 보헤미아, 그리고 합스부르크가 통치하는 헝가리에서도 개신교로 개종했던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다시 개종토록 하는 일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보헤미아의 개신교들은 그러지 않아도 페르디난트 2세인지 뭔지 하는 새로운 황제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개신교를 이단으로 몰아 탄압하자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수 없다고 하여 페르디난트 2세가 파견한 고위 관리들을 프라하성에서 만나자마자 창문 밖으로 내던져 쫓아냈다. 이를 계기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30년 전쟁이 일어났다. 30년 전쟁은 합스부르크가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황제의 권위는 상당히 높아졌다고 할수 있으나 세습영토를 다스리는 데에는 문제가 많았다. 예를 들어 헝가리의 가톨릭 복귀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레오폴드1세. 1672년. Benjamin von Block 작품

 

페르디난트 2세의 뒤를 이어 페르디난트 3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랐고 그 다음에는 페르디난트 3세의 아들인 레오폴드1세(1658-1705)가 황제가 되었다. 레오폴드 1세는 거의 50년동안 합스부르크를 통치하였다. 터키와의 분쟁이 정점에 오른 것도 레오폴드1세의 치하에서였다. 터키는 1863년에 두 번째로 비엔나를 공성하고 함락코자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와 함께 오스트리아는 유럽에서 프랑스와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1672-1679년의 제3차 네덜란드전쟁, 1688-1697년의 아우구스부르크 동맹 전쟁, 1701-1714년의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 휩싸여 프랑스와 전투를 벌여야 했다. 결과, 프랑스는 루이14세의 손자가 스페인을 통치토록 하는데 성공했지만 오스트리아는 스페인에 속했던 네덜란드(벨기에 포함)를 점유하게 되었고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북부의 밀라노공국, 남부의 나폴리공국과 사르디니아공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는 1720년에 사르디니아공국을 시실리와 교환하였다.

 

나폴리 항구. 나폴리는 당시에 공국이었으며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사르디니아는 지중해의 코르시카 아래에 있는 큰 섬이다. 사르디니아 공국도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