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속성 역사 정복

7. 요셉2세와 레오폴드2세

정준극 2010. 2. 6. 05:33

[요셉2세와 레오폴드2세의 통치](1780-1792)

 

1780년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세상을 떠나자 큰 아들 요셉이 요셉2세로서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를 전적으로 통치하였다. 요셉2세는 1765년에 아버지 프란시스1세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랐으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모든 실권이 있었으므로 사실상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가 세상을 떠나자 명실상부하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의 대공으로서 정치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요셉2세는 개혁자였다. 여러 분야에서 개혁에 착수하였다. 요셉의 개혁은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와 함께 요셉은 과거에 왕권보다도 강력한 권세를 누렸던 로마 가톨릭 교회를 장악코자 했으며 또한 지방 귀족들의 권세를 약화시키고자했다. 수도원을 개혁한 것은 그 중의 하나였다. 왕권을 무시하고 민폐만 끼치던 오스트리아 전국의 수도원들을 통폐합하여 우선 아무리 로마 가톨릭의 비호아래에 있다고 하더라고 왕권의 막강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요셉 2세는 계몽군주였다. 계몽이란 것이 무엇인가? 민주주의를 실현코자 하는 노력이라고 볼수 있다. 요셉 2세의 계몽정책으로 제국내의 이곳저곳에서 저항이 일어났다. 특히 그때까지 비록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자유롭게 살던 네덜란드와 헝가리가 온전한 자유를 보장하라면서 만만찮게 저항하였다.

 

요셉 2세. 마리아 테레자의 큰 아들. 계몽군주. 1775년. 안톤 폰 마리온 작품

 

요셉의 대외정책은 계몽주의 사상을 실현하는 것만큼 야심찬 것이었지만 미안하게도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여담이지만 요셉은 유언에서 자기가 죽으면 관에 ‘모든 것에 실패만 했던 요셉’이라고 적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렇지만 정작 그가 죽고 나자 관에 그렇게 써달라고 해서 진짜 그렇게 적어 넣을 사람은 없었다. 그의 동생으로 황제가 된 레오폴드2세는 형님을 추모하여서 아주 근사한 문구를 관에 새겨 넣었다. 요셉2세는 자녀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요셉의 외교정책의 기조는 러시아의 카테리나 여제와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1787년 그동안 와신상담하던 오토만 제국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불사하고 침공해 왔다. 오토만 제국과의 전쟁은 신통한 결과도 없이 돈만 퍼 붓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전비(戰費)를 대느라고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결국 백성들만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각지에서의 저항이 당연히 뒤를 이었다. 요셉 황제는 그 바쁜 중에도 별별 민생개혁안들을 내놓았다. 재사용 관(슈파르조르그)을 사용토록 한 것도 요셉2세의 개혁정책 중 하나였다. 호이리거에 솔나무가지를 꺾어서 달아놓아야 한다는 규칙도 요셉2세가 만든 것이다.

                                    

1790년 요셉 2세가 서거하자 그의 개혁안들은 대부분 허사가 되었다. 헝가리와 네덜란드는 ‘때는 바로 이때다’라면서 공공연하게 오스트리아에 항거하였다. 발칸반도에서의 전쟁은 언제 다시 촉발될지 모르는 불씨를 안고 되었다. 곰 같은 러시아는 백년이 걸려도 좋으니 발칸반도에서 전쟁을 하여 합스부르크의 관할을 몰아내겠다는 태도였다. 이러한 때에 요셉의 죽음은 오히려 오스트리아에게 다행이었다. 요셉의 뒤를 이은 동생 레오폴드2세는 형보다 나은 아우가 없다는 속담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했다. 레오폴드는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았다. 레오폴드는 소모적인 전쟁은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이어 헝가리 및 네덜란드와 협상을 시작했다. 레오폴드는 1791년(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 터키와 평화협상을 맺었고 프러시아와도 동맹협상을 시작하였다. 프러시아는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과 대적하는 오토만을 은근히 지지했었다.

 

요셉2세와 동생 레오폴드(나중에 레오폴드2세). 1769년. Pompeo Batoni 작품.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두 아들이 모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딸 중에서 하나는 프랑스 왕비(마리 앙투아네트)가 되었으므로 과연 대단한 여인이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레오폴드 시대라고 해도 유럽에서 도도히 흐르는 시대의 변화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프랑스 혁명이었다. 레오폴드는 프랑스 혁명주의자들의 입장을 상당히 동정했지만 그 역시 마리 앙뚜아네트의 친오빠였다. 레오폴드로서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루이 왕조를 지지할 것인지가 애매했다. 그러한 때에 1791년 후반에 레오폴드는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빌헬름2세와 합동으로 필니츠 선언(Declaration of Pillnitz)을 만들었다. 내용인즉 프랑스의 루이16세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정부 내에서는 레오폴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당장 한바탕 결말을 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레오폴드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여러 노력을 기울이는 중에 갑자기 1792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는 레오폴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무경험의 프란시스2세를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다. 정치와 군사에는 아무런 경험이 없는 프란시스2세는 그저 먹고 잠만 자는 일에만 익숙하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프란시스2세는 신성로마제국이 문을 닫아야한다는 생각에 신성로마제국의 종말을 공표하고 대신에 오스트리아제국을 출범시켰다. 프란시스 2세는 오스트리아제국의 출범과 함께 프란시스1세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후 프란시스 1세는 더 무능한 페르디난트1세에게 양위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인물이 청년 프란츠 요셉1세이다.

 

페르디난트1세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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