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속성 역사 정복

6. 마리아 테레지아

정준극 2010. 2. 6. 05:32

[샤를르6세와 마리아 테레지아](1711-1780)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샤를르6세

 

샤를르6세(1711-1740)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로는 딸만 셋을 두었다. 큰 딸이 마리아 테레자(독일어로는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셋째 딸은 여섯 살때 세상을 떠났다. 샤를르6세는 결혼한지 10년이 다 되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샤를르 6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자기의 시대에 대가 끊어진다고 생각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샤를르6세는 드디어 단안을 내렸다. '아들이 없으면 딸이면 어떠냐? 딸이라고 해서 황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면서 국사조칙(Pragmatic Sanction)을 만들었다. 딸도 황제가 될수 있다는 내용의 조칙이었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그런 조칙을 만든 것이다.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칙은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들 뿐만 아니라 인근의 강대국들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얼마후 하늘이 점지하셨는지 아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였던지 생후 7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샤를르 6세의 마음은 비통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듬해에 딸 마리아 테레자가 태어났다. 샤를르 6세는 훗날 세상을 떠나면서 큰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대제국의 후계자로 삼을 것이니 그렇게 알라고 다시한번 다짐하였다. 샤를르6세는 제후들의 협조를 받아야 했다. 샤를르6세는 제후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금까지 합스부르크가 차지했던 영토들을 조금씩 넘겨주기 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오스트리아가 나폴리와 시실리를 스페인의 왕자인 돈 카를로스에게 넘겨주었으며 대신 파르마공국이라는 작은 영토를 받은 것이다. 샤를르6세는 말년에 터키와의 전쟁을 치루었지만 오히려 손해만 보았다. 오스트리아는 터키와의 전쟁으로 베오그라드와 기타 국경지대의 영토를 잃었다.

 

샤를르6세의 가족. 부인은 독일 브룬스비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공주였다. 샤를르6세는 크리스티네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다. 첫째는 아들 레오폴도 존(Leopold John)이었다. 그러나 생후 7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큰 딸이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 둘째 딸이 마리아 안나(1718-1744), 셋째 딸이 마리아 아말리아(1724-1730)이었다. 둘째 딸 마리아 안나는 결혼하여 첫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26세였다. 셋째 딸 마리아 아말리아는 6세의 어린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나중에는 샤를르6세의 자녀로서 마리아 테레지아 한 사람만 남았다. 샤를르6세는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었지만 제후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프랑스의 프란시스(프란츠)와 결혼토록 하여 비록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는 프란시스가 갖도록 했으나 실질적인 통치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맡아 했다.

 

마침내 1740년 샤를르6세가 세상을 떠났다. 샤를르6세는 평소에 스페인, 프러시아, 프랑스가 후원해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후계자가 되는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 가기 전과 갔다온 다음의 사정이 다르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로 이들 강대국들은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난후 마리아 테레지아 문제에 대하여 안면을 바꾸었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2세가 먼저 문제를 일으켰다. 합스부르크의 산하에 있는 실레지아를 침공한 것이다. 이어 다른 나라들도 오스트리아의 약점을 찾아내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바리아의 선제후는 합스부르크의 세습영지와 보헤미아를 바바리아가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복잡한 사연이 있다. 본 블로그의 마리아 테레지아 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프랑스왕은 무슨 속셈인지 바바리아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나중에 프랑스왕은 합스부르크가 차지하고 있는 저지대국가(네덜란드 등)을 프랑스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 스페인과 사르디니아는 이탈리아에 있는 합스부르크의 영토를 원대복귀 시키라고 요구하였다. 작소니는 작소니에 인접하여 있는 영토를 요구하였고 나아가 폴란드왕국을 작소니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에 있는 영국, 홀란드, 러시아는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의 입장에서 다른 나라들을 비난하더니 점차 ‘나 몰라라’하고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공연히 분규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하여 어쩔수 없이 ‘오스트리아 후계 전쟁’(1740-1748)이 일어났다.

 

마리아 테레지엔 플라츠의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상. 뒤에 있는 건물은 미술사박물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은 별로 성과도 없으면서 8년이나 질질 끌었다. 유럽 역사에 있어서 이만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실속도 없으면서 허세만 부린 전쟁이었다. 전쟁은 결국 영토싸움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는 비록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이런 저런 요구를 하며 압박했지만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다만, 프러시아에게 실레지아의 대부분을 양보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은 뼈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은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아래에 계속 있게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투스카니의 대공인 로레인의 프란시스와 결혼하였고 프란시스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성로마제국이 합스부르크에 의해 유지되었다기 보다는 합스부르크-로레인 가문에 의해 존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로써 오스트리아의 후계 전쟁을 마무리되었다.

 

마리아 테레자 여제. 1759년. Martin von Meytens 작품.

 

비록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은 형식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당사자인 마리아 테제지아의 마음은 부글부글했다. 프러시아에 대하여 극도로 감정이 나빴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와는 평생 철천지원수처럼 지냈다. 처음에는 자기를 도와줄 것처럼 말하더니 나중에는 오히려 실레지아만 빼앗아 간 형국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러시아에 대하여 복수를 다짐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국과 네덜란드도 동맹국에서 제외하였다. 자기를 돕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모두 꽁무니를 뺀 나라들이기 때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대신 평소의 적대국이던 프랑스를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그러자 불현듯 위기를 느낀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이 선제공격에 나서서 작소니를 침범하였다. 7년동안의 지지부진한 전쟁이 또 다시 시작되었다.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가 실레지아를 다시 찾아 나누기 위해 프러시아를 압박했지만 프러시아는 잘 버텼다. 프러시아의 협조자로서는 하노버공국이 있었을뿐, 다른 나라들은 프러시아를 경계하였다. 7년전쟁의 결과는 무엇인가? 별것도 없다. 오스트리아가 무척 지치게 되었다는 것이 결과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동맹의 정신을 강화한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유대강화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인 마리 앙뚜아네트와 프랑스의 왕세자(나중에 루이16세)가 결혼함으로서 더욱 굳건하게 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 1783년. 마리아 테레자여제의 막내 딸. 엘리사베스 비데 르 브륀 작품

 

유럽에는 잠시 평화가 오는듯 했으나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와 러시아의 카테리나 여제가 손을 잡고 주변국가들을 위협하는 바람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걱정스러운 사태에 돌입하였다. 때마침 러시아-터키전쟁(17868-1774)이 터졌다. 하루라도 전쟁이 없으면 심심해서 견디지 못하는 것이 당시 유럽의 정세였던것 같다. 러시아는 발칸 반도에서 터키가 차지하고 있던 영토를 상당히 확보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가 이미 차지하고 있던 영토도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는 러시아에 대하여 영토를 내놓으라고 요청했고 이에 따라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마리아 테레지아는 갈리시아(Galicia)를 가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동안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관계는 개선되기는 것처럼 보였다. 1777년에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간에 바바리아 왕위 계승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종전의 동맹이었던 프러시아를 지원하기를 거부하여 전쟁은 별로 유혈충돌이 없이 오스트리아의 승리로 끝나는 일도 생겼다. 전쟁 후의 평화협상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바바리아로부터 인피어르텔(Innviertel)을 넘겨 받았다. 당시 평화협상이라는 것은 말이 평화협상이지 실은 영토를 주고받는 상거래나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여러 백성들은 나라 간의 협상에 따라 하루아침에 이 나라에서 저 나라의 백성이 되며 영토도 이 나라에 속하다가 저 나라로 속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기야 불쌍한 백성들로서는 어느 나라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든지 세금은 죽어라고 바쳐야 하니 주소지변경에 대하여 감각이 무디게 될 지경이었다.

 

오스트리아 서남쪽에 있는 인피어르텔의 석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