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속성 역사 정복

9. 1차 세계 대전

정준극 2010. 2. 6. 05:35

[1차 세계 대전](1914-1918)

 

1차 세계대전은 탱크가 동원되고 비행기가 동원된 전쟁이었지만 아직도 전통적인 보병에 의한 전투가 주류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오스트리아제국의 메테르니히 재상에 대하여 ‘오스트리아 역사상 참으로 훌륭한 외교관이며 위대한 정치가’라는 선입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가 지독한 언론탄압을 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져지지 않고 있다. 메테르니히 시대에 오스트리아는 검열중심의 국가가 되었으며 아울러 경찰국가로서 백성들과 언론을 낱낱이 감시하였다. 정부와 황실을 비판하는 사람은 곧바로 체포되기가 일수였다. 당시 황제는 약간 모자란 두뇌의 페르디난트1세였다. 그런고로 메테르니히의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트릴수 있을 정도였다. 메테르니히에 의한 1815년부터 1848년간의 기간을 검열기간, 경찰국가의 기간이라고 부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더마이어(Biedermeir) 또는 포아매르츠(Vormärz)기간이라고도 부른다. 포아메르츠는 3월 이전이라는 의미로 여기에서는 1848년 3월 혁명의 이전 기간을 말한다. 다시 말하여 포아매르츠는 1848년 3월 혁명 이전의 관료적이고 탄압적인 시기를 말한다. 비더마이어는 단순하지만 경직된 건축이나 예술의 한 형태이지만 실상은 정부와 사회가 경직되고 고루하다는 뜻이다.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 암살 장면. 1914년

 

19세기 말에 세계는 바야흐로 자유민주주의 시대로 향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공화국이 되었고 영국이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검열국가, 경찰국가, 비더마이어국가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상황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사회의 일각으로부터 자유진보주의, 국가민족주의를 갈구하는 함성이 터져 나오지 않을수 없었다. 지성의 상징인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1848년 3월 혁명이었다. 혁명이 일어났다고 해서 프랑스처럼 왕국이 공화국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메테르니히 수상이 실각하였고 좀 모자란 페르디난트1세는 결국 '짐은 아무래도 ....'라면서 황제의 자리를 젊은 조카인 프란츠 요셉에게 넘겨주었을 뿐이었다. 젊은 프란츠 요셉이 무려 68년 동안 오스트리아제국(나중에는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을 통치한 인물이며 그의 부인이 바바리아 출신의 씨씨라는 애칭의 엘리자베트이다.

 

사라예보에서 피살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1848년에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된 젊은 프란츠 요셉(1830-1916)은 오스트리아제국의 영화를 되찾자는 의미에서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한편 제국에 속한 영토에서 제국에 대한 저항운동을 무력으로 억압하였다. 특히 헝가리와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가 제국에서 분리하여 독립하려는 것을 강력히 방지하였다. 이와 함께 프란츠 요셉은 나라와 국민들을 위한 여러 과감한 정책들을 추진하여 민심을 추스렸다. 프란츠 요셉이 1848년의 혁명 이후에 획기적으로 새로운 정책을 추진한 것은 농노제도의 폐지였다. 이에 따라 도시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졌다. 많은 농민들이 산업화의 여파로 직업을 찾아 도시로 몰려 나왔다. 농업위주의 오스트리아에 공업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보헤미아, 슈티리아, 남부오스트리아가 오스트리아 산업화의 선두에 있었다. 사회가 개혁되고 생활이 변화되자 다민족이 함께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인종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대체로 오스트리아 이외의 지역에서 비엔나에 온 사람들은 배운 것도 없고 배경도 없어서 막노동이나 하며 지내야 했다. 그리고 비엔나 토박이들로부터 은근한 차별을 받아야 했다. 이로 인하여 국수주의 또는 민족주의 운동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1866년 7월 31일의 쾨니히그래츠 전투. 게오르크 블라이브트로이 작품

 

사회의 변화와 함께 찬란했던 대제국은 서서히 저물어가는 징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1859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사르디니아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와 투스카니를 사르디니아왕국에 넘겨주었다. 당시 사르디니아의 국왕은 유명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였다. 베르디가 이탈리아 통일운동(리소르지멘토)에 참여한 것도 이 당시였다. 결국 오스트리아의 약화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앞당겨주는 발판이 되었다. 그러는 중에 1866년에 견원지간인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프러시아는 독일국가연합에서 빠지려고 하였고 오스트리아는 바로 얼마전 까지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이었던 독일국가연합을 유지하려고 했다. 대화로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벌여야 했던 것이 당시 군주들의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러시아와의 쾨니히그래츠(Königgrätz)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비엔나의 새로운 도시계획을 실천하였고 이에 의해 링슈트라쎄가 조성되였고 그 센터에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가 들어섰다. 신축 슈타츠오퍼는 대로에 비하여 푹 꺼진 아래쪽에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그런 슈타츠오퍼를 보고 쾨니히그래츠의 전투와 같다는 핀잔의 말을 했다. 그 정도로 쾨니히그래츠 전투는 오스트리아에게 망신살이 뻗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함으로서 오스트리아는 그나마 연관을 가지고 지내던 독일국가연맹(German Conferderation)이 '이젠 그만 나가시오'라고 하는 바람에 불명예 제명되었다.

 

이탈리아 독립의 영웅 비토리오 에마누엘2세

 

프란츠 요셉 황제의 오스트리아제국은 내부적인 문제로도 골치가 아팠다. 제국의 한 주축을 이루고 있던 헝가리가 '우린 당신네 오스트리아와 비교해서 민족 자체부터 다르며 말도 다르고 모두 다르다'라며 끈질기게 독립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프란츠 요셉은 헝가리 귀족들과의 협상을 통하여 1867년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을 출범시켰다. 이를 아우스글라이히(Ausgleich)라고 부른다. ‘타협’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하나의 제국, 두개의 정부체제였다. 이로써 프란츠 요셉은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 겸 헝가리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헝가리가 제국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그나마 제국의 테두리 안에 있게 된 데에는 프란츠 요셉의 부인인 엘리자베트(일명 씨씨)의 기여가 컸다고 한다. 헝가리의 귀족들을 비롯한 백성들은 엘리자베트를 지극히 사랑하였기 때문에 엘리자베트를 생각해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분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하나의 제국 안에 들어 있지만 별개의 정부를 가지고 운영했다. 다만, 공동의 군주를 가지며 외교와 군사에 대한 통치권은 공동 군주 한 사람이 갖도록 했다. 지금의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한 제국의 서쪽은 시슬라이타니아(Cisleithania)라고 불렀고 제국의 동쪽인 헝가리는 트란스라이타니아(Transleithania)라고 불렀다. 라이타는 헝가리에 있는 강의 이름이다. 

 

프란츠 요셉과 엘리자베트의 헝가리 국왕 및 왕비 대관식. 부다페스트. 1867. 6. 8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제국의 오스트리아 쪽은 입헌국가로 향하여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헌법이 마련되었고 제국의회(Reichsrat: 라이히스라트)가 구성되었다. 이와 함께 이미 1867년에 영국의 권리장전(Bill of the Rights)과 비슷한 공민법이 통과되었다. 라이히스라트(제국의회)는 상하원으로 구성하였으며 오스트리아 국민이면 누구나 하원의원으로 입후보할수 있는 법이 1907년에 통과되었다. 때를 맞추어 모든 남성 시민들은 참정권(투표권)을 가지는 법도 마련되었다. 다만, 의회주의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다양한 민족분포로 인하여 서로 대표하는 이익집단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1차 대전의 기간(1914-1918)에는 하원이 열리지도 못했다. 따지고 보면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10년은 오스트리아로서 바쁜 시기였다. 도시계획으로 곳곳에서 건축공사가 진행되었고 철도가 놓아져 교통이 혁신되었으며 산업이 발전한 시기였다. 이 시기를 그륀더차이트(Gründerzeit)라고 부른다. 국가의 기초를 다진 시기라는 뜻이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산업국가가 되었다. 물론, 알프스 지역에서는 계속 농업이 위주였다.

 

비엔나 소재의 오스트리아 제국의회(라이히스라트) 내부

 

1878년 프란츠 요셉은 아버지 프란츠 카를 황제가 세상을 떠나는 등 여러 가지로 바쁜 와중에서도 발칸반도에서 주인이 없는 듯이 보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ia-Hercegovina)를 재빨리 점령하였다. 이 지역은 오토만제국이 발칸반도를 정리하면서 나라들을 세울 때에도 주목을 받지 못했던 곳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07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제국에 편입하고 오스트리아정부와 헝가리정부가 공동으로 통치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소수민족의 국가들에서 민족주의의 불길이 솟아오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잘 아는 대로 프란츠 요셉 황제에게는 루돌프라는 황태자가 있어서 당연히 황위를 계승할 입장이었다. 그러나 루돌프는 스캔들을 일으키고 자살하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제국의 황위 계승자로서 동생의 아들인 페르디난트를 지명하지 않을수 없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었다. 그런데 후계자로 임명된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를 방문했을 때 어떤 세르비아 국수주의자가 쏜 총탄에 사망했고 이로 인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18년 오스트리아를 주축으로 한 군사연맹이 전쟁에서 패배하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분리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가 서거한 1916년부터 제국을 통치하던 칼(Karl)황제는 1918년에 국외로 추방되었다. 여기까지가 대단히 간략한 1차 대전까지의 오스트리아 역사이다.

 

바드 이슐에 있는 카이저빌라. 이 저택에서 프란츠 요셉 황제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문에 서명함으로서 역사적인 세계 제1차 대전이 포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