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속성 역사 정복

10. 저맨 오스트리아와 1차 공화국

정준극 2010. 2. 6. 05:36

제국의 종말과

[저맨 오스트리아와 1차 공화국](1918-1934)

 

프란츠 요셉 1세 황제는 1916년에 68년에 이르는 파란많은 황제 생활을 마무리하고 영면하였다. 돌이켜 보면, 오스트리아 제국은 프란츠 요셉 황제의 뒤를 이을 루돌프 황태자가 1889년 비엔나 근교의 마이엘링에 있는 황실 사냥숙사에서 애인과 함게 자살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할수 없이 황위 계승자로 지명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도 1914년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자 사실상 제국의 앞날이 암울한 입장에 있었다. 프란츠 요셉 1세 황제는 페르디난트 대공 까지 세상을 떠나자 제국의 앞날을 맡을 후계자를 찾다가 조카의 둘째 아들인 칼을 후계자로 로 정했다. 그리하여 프란츠 요셉 1세 황제가 서거하고 칼이 칼 1세로서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대관식을 가졌다. 그런데 새로운 황제는 공화제로 가려는 오스트리아 백성들의 요구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칼 1세는 1918년에 자의에 의하지 아니한 퇴위를 할수 밖에 없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칼 1세는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되어 갈곳이 없다가 포르투갈의 후의로 저 멀리 대서양에 있는 마데이라 섬에서 절망 중에 지냈다. 그러다가 폐염에 걸려서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제국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칼 1세의 장남인 오토는 1961년에 비록 합스부르크의 후예이지만 더 이상 오스트리아의 왕관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오토를 비롯한 합스부르크의 남은 식구들은 당국의 허락을 받고 고향 땅인 오스트리아에 방문할수 있었다. 이로써 사회주의 정부와 일부 왕권주의 사이에서 살얼음판을 걷던 것과 같은 정치상황은 겨우 피할수 있었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국민들 중에서 상당수는 아직도 합스부르크에 대하여 비록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있지만 일종의 노스탈지아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심정으로서 족하였다. 이제 1차 대전 후의 오스트리아의 행로를 살펴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칼 1세가 황비인 치타, 그리고 황태자인 오토와 함께 헝가리 국왕으로서의 대관식을 가진 후 기념 사진을 찍었다.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것은 1918년이었으니 바로 1차 대전이 끝난 해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Austro-Hungary Empire)이 1차 대전에서 패하자 제국의 영향 아래에 있던 나라들은 너도나도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독립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비교적 넓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영토는 하루가 멀다하고 줄어들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오스트리아(이를 신오스트리아라고 부른다)의 국경선이 그나마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신(新)오스트리아는 독일 이외의 지역에서 독일어만을 사용하는 온전한 국가가 되었다. 스위스에서도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일부지역에 한한다. 폴란드의 일부 지역에서도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폴란드어가 국어이다. 오스트리아는 전국이 독일어를 사용한다. 제국의 시절에는 보헤미아어, 헝가리어, 폴란드어 등이 섞여서 사용되었었다. 1차 대전이 끝난지 얼마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칼 황제를 폐위시키고 공화국이 된 오스트리아는 1918년 11월 12일, 나라 이름을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는 뜻에서 ‘저맨 오스트리아’(German Austria)로 결정했다. 새로 구성된 의회는 신생 ‘저맨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통합할 것을 요구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이고 역사, 문화, 인종에 있어서도 상통성이 다대하므로 기왕에 합치자는 뜻이었다. 그리고 독일과 다시 통합하여 큰 나라가 되어야 과거처럼 무시당하는 일도 없고 경제가 발전하며 만일 전쟁이 나더라도 합심해서 대적할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신생 오스트리아공화국의 잠정헌법 2조에는 ‘저맨 오스트리아는 독일공화국의 일부이다(Deutscheötserreich ist ein Bestandtheil der Deutschen Republik)라는 조항까지 있다.

 

1938년 나치가 모라비아의 독일어 사용 지역인 주데텐란트에 진군하자 주민들이 '하일 히틀러'를 외치며 독일군을 환영하고 있다. 세 여인의 표정이 독특하다. 왼쪽 여인은 나치를 진정으로 환영하고 있고 가운데 여인은 무관심하다는 표정이며 오른쪽 여인은 다시 독일군의 장화에 짓밟히게 되어 슬픔을 참지 못하고 있지만 억지로 하일 히틀러의 표정을 짓고 있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티롤과 잘츠부르크에서는 아예 독일과의 합병여부를 묻는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티롤에서는 98%가 독일과의 통합에 찬성하였고 잘츠부르크에서는 99%가 찬성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가 최소한 앞으로 20년간 독일과 통합하지 않고 독자적인 국가로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1차 대전 전승국과 패전국간의 생제르망조약(Treaty of Saint Germain)에 따라 오스트리아를 ‘저맨 오스트리아공화국’에서 ‘오스트리아공화국’으로 부르도록 결정하였고 독일과의 통합은 꿈도 꾸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런 연후에야 오스트리아에서는 제1공화국이 출범하였다. 한편, 독일 국경에 있는 독일어 사용지방인 보헤미아, 모라비아(나중에 주데텐란트라고 부름)는 독일에 남지 말고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에 편입하도록 했다. 오스트리아의 남부 티롤은 이탈리아로 보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세력을 약화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윌슨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면서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패전국 신세여서 오스트리아의 주장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1927년 시위대에 의해 불에 탔던 법원(유스티즈팔라스트). 국회의사당인 팔라멘트 뒤편에 있다.

 

생제르망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국경이 그어 졌지만 헝가리 쪽에 있는 지방으로서 여기에도 가기 어렵고 저기에도 가기 어려운 지방이 한두 곳이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카린티아(Karinthia)였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는 각각 카린티아가 자기 영토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팔을 걷어 붙이고 주장하였다. 그런 분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이름도 거룩한 주민투표였다. 1920년 10월, 카린티아에서 주민투표가 시행되었다. 결과, 오스트리아에 남기로 결정하였다. 헝가리왕국에 속하여 있으면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 부르겐란트(Burgenland)도 오스트리아에 속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소프론(Sopron)의 주민들만이 오스트리아로 가지 않고 헝가리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오스트리아는 소프론의 주민투표가 날림이어서 그렇게 되었다면서 항의했다. 하지만 이미 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므로 더 이상 불평을 말하지 못했다. 제국의 땅이 서로 연고지를 찾아서 을 가자 오스트리아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지구의 대부분이 갈라져서 이제는 남의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식량은 헝가리에 크게 의존했는데 헝가리가 '나 몰라라'라면서 떨어져 나갔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헝가리의 소프론. 시청을 중심으로한 시가지. 소프론은 오스트리아로 가지 않고 헝가리에 소속키로 하였다. 

 

1920년 이후에 오스트리아는 여러 가지 사정상 좌우익으로 갈라 서서 날이면 날마다 싸움을 벌여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좌익노선으로서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를 추구하는 사회민주당(사민당)은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비엔나를 관장하였고 보수적인 우익정당들은 지방에서 영향력을 과시하였다.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기사당(기독교사회당)이 집권하고 있었다. 기사당은 로마가톨릭교회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당시 수상은 이그나즈 자이펠(Ignaz Seipel: 1876-1932)이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사제였다. 자이펠은 두 번이나(1922-1924, 1926-1929) 수상을 맡아했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좌우익 세력은 생제르망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가 정규군을 가질수 없기 때문에 편법으로 각기 자체 방위군(예비군)을 창설하였다. 좌익은 1921-23년에 하임베르(Heimwehr)라고 하는 향토방위군을 창설했고 우익은 1923년에 슈츠분트(Schutzbund)라는 민방위군을 창설했다. 나라는 하나인데 정치성향에 따라 서로 다른 두개의 군대가 생긴 것이다. 두 세력의 충돌은 예상된 것이었다. 군대가 생기면 전투를 해야했다.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없는 전투라도 만들어서 군대를 놀지 않도록 해야 했다.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가톨릭 사제인 그는 훌륭한 설교가였다.

 

1927년 1월 30일, 부르겐란트의 샤텐도르프(Schattendorf)라는 마을에서 하임베르와 슈츠분트가 충돌하였다. 남자 어른 한명과 어린이 한명이 죽었다. 범인들이 체포되었다. 우익 사람들이었다. 우익 사람들은 살인죄로 비엔나의 법원에 기소되었다. 그러나 배심원단은 이들을 무죄라고 하여 석방했다. 좌익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시위를 벌이던 좌익들은 급기야는 법원건물(Justizpalast)에 방화까지 였다. 비엔나 중심지역에 있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법원건물은 좌익들의 손에 화마에 휩싸이며 파손되었다. 날이 갈수록 시위가 격렬해 졌다. 7월에는 또다시 부르겐란트에서 반정부시위가 있었다. 이때의 시위로 경찰이 발포하여 89명이 죽었다. 1927년 7월 혁명이라고 불리는 사태였다. 정치불안이 극에 달했다. 1932년에 기사당(基社黨)의 엥겔버트 돌푸스(Engelbert Dolfuss)가 수상이 되어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했다. 돌푸스 수상은 대규모 도로공사와 같은 토목공사를 벌여 고용을 창출하는 등 국민들의 관심을 돌려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때에 생긴 비엔나의 도로 중의 하나가 회엔슈트라쎄(Hoehenstrasse)로서 칼렌버그를 넘어가는 총길이 14.9 km에 이르는 길이다. 엥겔버트 돌푸스는 나중에 나치주의자들에게 집무실에서 해되었다. 그를 추모하는 채플이 호브루브크 미하엘러토르(미하엘문) 앞의 미하엘러키르헤(성미하엘교회)에 마련되어 있다.

 

 

돌푸스 수상의 죽음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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