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속성 역사 정복

11. 오스트리아피치슴

정준극 2010. 2. 6. 05:37

[오스트리아피치슴](1934-1938)

 

비엔나의 정치1번지인 발하우스플라츠에 있는 브루노 크라이스키 수상 기념 조형물. 가운데 보이는 건물이 연방수상집무실

 

돌푸스의 기독교사회당 통치 아래에서 오스트리아 정부는 점차 중앙집권적인 파치스트 모델로 발길을 옮겨갔다. 그러한 시점에서 이상한 곳에서 사태가 확산되었다. 1933년 3월 돌푸스 내각은 의회가 어떤 법안에 대한 찬반을 투표하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었음을 파악하고 이를 기화로 의회를 무기력하게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의회에서 투표가 박빙으로 진행되자 세명의 국가위원회(상임위원회) 위원장들은 모두 단상에서 내려와 투표를 지켜보도록 했다. 위원장들은 투표에 직접 참가할수 없었다. 위원장들은 투표에 참여할수 없으므로 자리를 지키고 있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위원장석에서 모두 단하로 내려올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위원장들이 단하로 내려오는 모습을 본 돌푸스의 내각은 마치 의회가 기능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여 의회의 기능포기를 선언하고 국가위원회가 재소집되는 것을 실력으로 저지하였다. 그리고 내각은 의회가 없는 비상사태로서 입법권을 넘겨받는 형식을 취했다. 사태가 이렇게 이상하게 돌아가는데도 사회당은 사태를 해결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주저하고만 있었다.

 

발하우스플라츠에 있는 오스트리아 연방대통령 집무실. 비엔나의 청와대이다.

비엔나 발하우스플라츠에 있는 연방수상 집무실. 연방대통령 집무실 옆에 있다. 대단하다.

 

1934년 2월, 돌푸스의 오스트리아파치스트 정권은 반정부활동에 대한 증거물을 확보코자 사회당 본부에 대한 수색영장을 발부하였다. 당시 사회당의 조직은 약화된 상태였고 반정부 활동이 있으면 당장 저지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돌푸스내각은 이참에 사회주의 운동을 아예 근절할 생각이었다. 결국 사회당과 산하의 단체들은 돌푸스내각에 의해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해 5월, 돌푸스내각은 언론자유를 중지하는 신헌법을 승인했다. 이와 함께 오스트리아 의 단일당(애국전선)을 설립하였다. 또한 노사관계는 국가의 전면통제 아래에 두었다. 이같은 조치는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합병된 1938년까지 지속되었다. 애국전선 정부는 오스트리아에서 히틀러에 동조하는 세력들을 무조건 타파코자 했다. 히틀러주의에 동조하는 세력들은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나치주의자들은 돌푸스 수상을 그대로 놓아두었다가는 아무 일도 못한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1934년 7월 25일, 일단의 나치주의자들이 돌푸스 수상실에 난입하여 돌푸스 수상을 살해했다. 후임으로 선출된 슈슈니그(Schuschnigg)는 전임수상의 유지를 받들어 오스트리아에서의 친히틀러 활동을 금지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위협으로 1938년 3월 11일 수상직에서 사임하였다. 슈슈니그의 사임 이후 독일 국방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였다. 나치는 이를 안슐르쓰(Anschluss)라고 불렀다. 합병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블로그의 ‘나치의 안슐르쓰’편을 참고하기 바람.

 

 

2004년에 연방대통령으로 선출된 피셔 하인츠(Fischer Heinz).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던 해인 1938년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2008년에 임명된 현재의 연방수상 베르너 화이만(Werner Faymann). 1960년에 비엔나에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