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속성 역사 정복

8.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정준극 2010. 2. 6. 05:34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1792-1814)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드 황제가 프랑스의 루이 16세를 지지함으로서 야기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쟁은 무려 6년이나 끌었다. 유럽은 땅 덩어리도 좁은데 한번 전쟁을 시작했다 하면 보통 5년이 넘으며 어떤 경우에는 30년을 끈 전쟁도 있고 100년을 끈 전쟁도 있으니 전쟁이 아니면 할 일들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797년에 겨우 막을 내린 오스트리아-프랑스 전쟁은 오스트리아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처음 몇 번은 오합지졸과 비슷한 프랑스 혁명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얼마후에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정규군이 투입되었다. 역시 싸움도 해본 사람이 잘 한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군인들은 수많은 전쟁터를 누빈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어느 틈에 프랑스 군은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을 몰아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와의 전선에 붙잡혀 있는 틈을 타서 동맹이라고 믿었던 프러시아가 등 뒤에서 비수를 꽂았다. 제2차 폴란드분할이었다. 프러시아는 폴란드를 재차 분할하면서 오스트리아를 철저히 제외하였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시스 황제는 대노하여서 수석장관인 필립 폰 코벤츨(Philipp von Cobenzl)을 해임하고 후임으로 프란츠 마리아 투구트(Franz Maria Thugut)를 임명하였다.

 

1812년 오스털리츠 전투 후에 나폴레옹과 만나는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시스2세(후에 오스트리아제국의 프란시스 1세). Antoine-Jean Gros 작품.

 

이러한 때에 프랑스의 혁명운동은 점차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영국을 비롯하여 스페인과 더치공화국은 프랑스의 지나친 행동을 두려워하였다. 더구나 프랑스가 저지대 국가에서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을 물리치고 점령하자 프랑스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높아졌다. 영국은 이미 다른 나라들과 연맹을 맺었기에 프랑스와의 전쟁에 이끌려 들어가지 않을수 없었다. 이렇듯 확대된 전쟁을 제1차 연맹전(War of the First Coalition)이라고 부른다. 연맹군은 과거에 오스트리아군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 몇 번은 승리를 거두었다. 연맹군은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손으로부터 구출해냈다. 그러나 1794년 대세는 다시 바뀌었다. 네덜란드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또 다시 쫓겨났다. 그러는 한편, 폴란드 문제가 재차 문제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1795년의 제3차 폴란드분할이 그것이었다. 다행히 오스트리아는 제3차 폴란드분할에서 지난번처럼 철저히 배제되지 않았다. 유럽의 동쪽에서는 폴란드 분할로 서로 신경이 날카로운 때에 서쪽에서는 전쟁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연맹국들은 평화협상을 갈망했다. 오스트리아의 동맹으로서는 영국과 이탈리아의 피에드몽-사르디니아(Piedmont-Sardinia)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프랑스혁명의 한 장면. 1792년 8월 10일 혁명군들이 튈러리궁전을 공격하여 함락하다. 장 뒤플레시스-베르토 작품

 

오스트리아가 점차 고립되어 가고 있는 것을 지켜본 프랑스는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펼쳤다. 물론 프란시스 황제의 동생인 샤를르대공(비엔나 헬덴플라츠에 있는 기마상의 주인공)이 선전분투하여 프랑스군을 곤경에 빠트렸지만 이탈리아로 진군한 프랑스군은 코르시카 출신의 젊은 장군인 나폴레옹이 승승장구하는 바람에 결국 피에드몽이 전쟁에서 발을 빼게 만들었으며 아울러 롬바르디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냈고 만투아(Mantua)를 공성 끝에 점령하였다. 도니체티의 오페라 '연대의 딸'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는 것이다. 베르디도 이때에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그건 그렇고 만투아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내친 김에 알프스를 넘어 비엔나로 진격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평화를 호소하지 않을수 없었다. 1797년 캄포 포르미오 조약(Treaty of Campo Formio)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와 롬바르디를 포기했으며 베니스 공화국은 프랑스와 공동으로 영토를 나누었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라인 좌안의 영토들을 합병하는 것을 비록 임시이지만 인정하였으며 라인의 서안에 있는 독일의 영주들은 영토들을 조금씩이라도 보상받아야 한다는 것을 합의하였다.

 

만투아(만토바)대성당. 베르디의 리골레토로 유명한 만투아도 오스트리아의 지배아래에 있었다.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독일의 재편성에 대한 견해가 달랐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영국, 나폴리공국과 연합하여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1799년의 제2차연맹전(War of the Second Coalition)이었다. 처음에는 오스트리아 연맹군이 승기를 잡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후 전세가 뒤바뀌었다. 러시아가 취리히에서 프랑스군에게 대패하고 정신없이 후퇴하였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무기력함 때문에 패배했다고 하면서 다시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지 않겠다고 말하고 떠났다.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에게 대패하였다. 오스트리아는 1801년 뤼네빌(Luneville)에서 평화협정을 맺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프랑스가 내건 조건이라는 것이 상상 외로 특별하지 않았다. 종전의 캄포 포르미오 협정의 재탕이었다. 다만, 한가지 특기사항이 있다면 신성로마제국을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이 첨가된 것이다. 합스부르크가 관장하던 신성로마제국을 그림자도 없이 분해하자는 의도였다.

 

1804년 12월 2일 파리 노트르담 사원에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 왕비 조세핀의 대관식도 함께 진행되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작품

 

1804년 기고만장한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프란시스는 가만히 있을수 없었다. 자기야 말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유럽에서 유일한 황제인데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니 무슨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렇다고 나폴레옹에게 ‘당신 말야, 내가 황제인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황제라고 부르는 거야?’라고 말할 처지도 아니었다. 프란시스는 나폴레옹의 코를 꺾기 위해서는 자기가 황제의 타이틀을 하나 더 가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얼마후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선포하고 초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프란시스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면서 동시에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였다.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나폴레옹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폴레옹은 당분간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넓히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제노아공국, 파르마공국을 합병하였다. 나폴레옹을 가만히 두고만 볼수 없다고 생각한 오스트리아는 영국, 러시아, 스웨덴과 연맹하여 프랑스에 대항키로 했다. 이를 제3차 연맹전(War of the Third Coalition)이라고 한다. 오스트리아군은 바바리아를 침공함으로서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바바리아는 독일에 있는 프랑스의 동맹 중에서 가장 핵심 되는 나라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뛰어난 전술가인 나폴레옹에게 패배하였다. 울름(Ulm)에서의 항복이다. 오스트리아-러시아 연맹군이 오스털리츠(Austerlitz)에서 패배하기 직전이었다.

 

도나우강변의 울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프레스부르크협정을 체결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 협정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여러 영토를 잃었다. 달마티아(Dalmatia: 현재의 크로아티아 지역)는 프랑스에게 넘겨주었고 베니스는 이탈리아의 나폴레옹왕국에 넘겨주었으며 티롤은 바바리아에 넘겨주었다. 다만 프란시스 황제의 동생이 통치하던 잘츠부르크는 일종의 보상으로서 오스트리아에 병합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전쟁의 패배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신성로마제국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었다. 1806년 여름, 독일에 있는 나폴레옹의 여러 위성국가들이 신성로마제국의 우산에서 탈퇴하여 라인연맹(Confederation of the Rhine)을 결성하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프란시스는 생각다 못하여 7백년 역사의 신성로마제국의 해산을 선포하였다.

 

호프부르크에 있는 프란시스2세(오스트리아제국의 프란시스1세)황제 기념상.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신성로마제국이 종말을 고한후 오스트리아제국의 정부는 필립 슈타디온(Philipp Stadion) 수상이 이끌었다. 프라터의 슈타디온 경기장은 필립 슈타디온 수상을 기려서 붙인 명칭이다. 슈타디온은 프랑스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808년에 부르봉 왕조가 무너지자 오스트리아는 곤경에 빠졌다.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대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1809년, 오스트리아는 난처한 국제정세에서 탈피키 위한 방안으로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건곤일척을 겨루는 전쟁을 벌였다. 이번에는 유럽 대륙에서 어느 누구와도 동맹을 맺지 않은채 단독으로 대결하였다. 반면,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친선을 유지하는 입장에서 오스트리아에게 부담을 주었다. 샤를르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처음에 아슈페른-에쓸링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군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패배한 오스트리아는 비엔나의 쇤브룬궁전에서 쇤브룬조약을 맺고 프랑스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잘츠부르크를 바바리아에 넘겨주었고 폴란드에 남아 있던 영토는 러시아에게 주었고 카린티아, 슈티리아와 같은 아드리아해 연안의 영토는 나폴레옹에게 내어주었다. 그러니 백성들만 하루 아침에 나라가 바뀌는 등 고통을 당하는 셈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와의 아슈페른 전투. 1809년 5월 20-21일. Fernand Cormon 작품.

 

새로 외상이 된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는 친프랑스적인 정책을 견지하였다. 프란시스2세 황제의 딸인 마리 루이제가 나폴레옹과 결혼한 것은 메테르니히가 추진한 대표적인 결혼정책이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할 때에 프랑스에 군대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도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과 마찬가지로 1812년 말에 러시아에서 돌이킬수 없는 패배를 경험하였다. 차이코브스키의 서곡 ‘1812년’은 이때의 상황을 표현한 작품이라는 것은 달 알려진 사실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바로 1812년의 사건을 다룬 것이다. 이듬해 초에, 우방이라고 생각했던 프러시아가 러시아에 등을 돌렸다. 그러므로 프랑스와 러시아는 모두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메테르니히는 이틈을 타서 탈프랑스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처음에 메테르니히는 프랑스와 유럽의 다른 나라와의 평화협정을 체결토록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바섬에서 교묘하게 탈출한 나폴레옹은 프러시아, 러시아 등과의 평화에 흥미가 없었다.

 

독일 코블렌츠 태생이지만 오스트리아의 재상이 되어 나폴레옹 실각이후 유럽의 판도를 그리는데에 주역을 맡았던 클레멘스 메테르니히(1773-1859).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메테르니히는 어쩔수 없이 1813년에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오스트리아의 결단은 효과적이었다. 독일에 주둔해 있던 나폴레옹군은 1813년 8월 유명한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나폴레옹은 잔여병력을 이끌고 프랑스로 퇴각하였다. 1814년에 들어서자 유럽의 열국들은 손을 잡고 프랑스로 진군하였다. 나폴레옹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메테르니히는 고민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황제의 딸인 마리 루이제, 그리고 마리 루이제가 나폴레옹과 결혼하여 태어난 나폴레옹 2세를 생각하면 나폴레옹에게 야박하게 대할 입장이 못되었다. 당시 나폴레옹 2세는 비엔나에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유럽 여러 나라의 감정을 고려하면 나폴레옹을 왕좌에 그대로 앉아 있게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루이의 부르봉 왕조를 다시 부활시킬수도 없었다. 결국 나폴레옹을 영원히 축출한다는 영국 외무장관 캐슬레아 경(Sir Castlereagh)의 입장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1814년 4월 3일 폐위되었고 루이18세가 복구되었다. 나폴레옹의 실각 이후 유럽의 판도를 어떻게 그리느냐를 가지고 1814년부터 1815년에 이르기까지 비엔나에서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주로 호프부르크 회의실에서 열렸다. 유명한 ‘회의는 춤춘다’(Die Kongress tanzt)라는 말이 나온 ‘비엔나 회의’였다.

 

1815년의 비엔나 콩그레스

 

[독일연맹](German Confederation) - Deutscher Bund - 1815-1866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신성로마제국이 막을 내리게 되자 이를 대체하는 기구로서 독일연맹이 발족되었다. 비엔나회의의 결과에 의한 조치였다. 독일연맹은 1815년에 출범하여 1866년까지 지속되었다. 독일연맹은 39개 국가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 주권국가는 35개이며 4개는 자유도시이다. 독일연맹의 궁극적인 목적은 독일의 평화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연맹에 가입되어 있는 어떤 국가가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으면 다른 국가들도 상호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어떤 군주들은 연맹에서 제외되었다. 예를 들면 영국왕이다. 영국왕은 하노버 공국의 왕까지 겸하고 있었으므로 굳이 영국 왕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 또한 네덜란드 왕, 룩셈부르크 대공, 덴마크 왕도 제외되었다. 덴마크 왕은 홀슈타인과 라우엔부르크의 대공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연맹의 의사결정 기구는 중앙의회였다. 중앙의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회합을 가졌고 오스트리아가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중앙의회는 상호방위에 대한 사항에 대하여는 그다지 강제적 집행권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저 외교적인 회합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중앙의회의 의사결정은 다수결 또는 3분의 2 찬성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회의 대표들은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에 이들 스스로 결정권이 없기 때문에 거의 모두 본국에 문의해서 지침을 받은 후에 의사결정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중앙의회는 허울만 좋을 뿐 비효율적이었다.

 

중앙의회는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재상이 주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뛰어난 정치가였지만 아무래도 39개나 되는 회원국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간헐적으로 오스트리아의 리더쉽이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던중 1866년 6월 15일부터 그해 8월 23일까지 7주간에 걸쳐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간에 피치못할 전쟁이 벌어졌다. 프러시아는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었고 오스트리아는 바바리아, 뷔르템부르트, 작소니, 하노버, 바덴 등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전쟁에서는 프러시아가 주도권을 잡아 결국 독일연맹은 와해되고 대신 북독일연맹(North German Confederation)이 설립되었다. 북독일연맹은 1867년부터 1871년까지 존속하였고 22개 독일 국가로 구성되었다. 주로 마인강 북부지역의 국가들이었다. 북독일연맹은 당연히 프러시아가 주도권을 잡았다.

 

나폴레옹이 1809년 비엔나시를 대표하는 사람으로부터 비엔나 열쇠를 받는 장면

 

독일연맹의 회원국들은 다음과 같다.

 

1. 오스트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 리토랄(Littoral), 잘츠부르크, 슈트리아, 티롤, 포아아를버그

2. 보헤미아 왕국(Lands of the Bohemian Crown)

3. 프러시아(Prussia)

4. 바바리아(Barvaria)

5. 작소니(Saxony)

6. 하노버(Hannover)

7. 뷔르템버그(Wurtemburg)

8. 바덴(Baden)

9. 헤세 선제후(Electorate of Hesse)

10. 헤세 대공국(Grand Duchy of Hesse)

11. 덴마크 점령의 홀슈타인, 라우엔부르크(Lauenburg)

12. 룩셈부르크(당시 네덜란드 소속)

13. 브룬스비크(Brunswick)

14. 메크렌부르크-슈베린(Mechlenburg-Schwerin)

15. 나사우(Nassau)

16. 작세 봐이마르 아이제나하(Saxe-Weimar-Eisenach)

17. 작세 고타(Saxe-Gotha)

18. 작세 코부르크(Saxe-Coburg)

19. 작세 마이닝겐(Saxe-Meiningen)

20. 작세 힐드부르크하우젠(Saxe-Hildburghausen)

21. 메클렌부르크 슈트렐리츠(Mecklenburg Strelitz)

22. 홀슈타인 올덴부르크(Holstein-Oldenburg)

23. 안할트 베른부르크(Alhalt-Dessau)

24. 안할트 베른부르크(Alhalt-Bernburg)

25. 안할트 쾨텐(Alhalt-Kothen)

26. 슈봐르츠부르크 존더스하우젠(Schwarzburg-Sondershausen)

27. 슈봐르츠부르크 루돌슈타트(Schwarzburg-Rudolstadt)

28. 호엔촐레른 헤힝겐(Hohenzollern-Hechingen)

29.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ein)

30. 호엔촐레른 지그마링겐(Hohenzollern-Sigmaringen)

31. 발데크(Waldeck)

32. 로이스(엘더 라인)(Reuss, elder line)및 로이스(영거 라인)(Reuss, younger line)

33. 샤움부르크 리페(Schaumburg-Lippe)

34. 리페 데트몰트(Lippe-Detmonld)

 

1820년 협약이 재차 체결되었을 때에는 다음 5개국이 포함되었다.

1. 헤세 홈부르크(Hesse-Homburg)

2. 뤼베크(Lubeck)

3. 프랑크푸르트(Frankfurt)

4. 브레멘(Bremen)

5. 함부르크(Hamburg)

 

1839년에 룩세부르크가 벨기에에 종속되는 바람에 림부르크 공국이 설립되어 독일연맹에 가입하여 1866년 해산때까지 함께 했다.

 

베를린에서의 북독일연맹 의회(Norddeutschen Reichstag) 개원 모습. 1867년 2월.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가 주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