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속성 역사 정복

13. 제2공화국과 그 이후

정준극 2010. 2. 6. 05:38

[제2공화국과 그 이후](1945년 이후)

미영불소 4대 강국이 통치

 

쇤브룬 궁전과 비엔나 도시

 

미, 영, 불, 소의 4대국 협정에 따라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7월 4일 연합국위원회(Allied Commission)가 설치되었고 이들이 1955년 7월 27일까지 사실상 오스트리아를 관리하였다.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선언하는 오스트리아 국가조약은 1955년 5월 15일에 체결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1955년 7월 27일까지 연합국이 오스트리아를 관리했다고 했냐하면 실은 오스트리아 국가조약이 7월 27일부터 발효되었기 때문이다. 전후의 독일과 마찬가지로 전후의 오스트리아도 4개 지역으로 나뉘어 4대 강국이 각각 통치하였다. 미국은 오베르외스터라이히, 잘츠부르크, 도나우 남부를, 영국은 카린티아, 슈티리아, 동부 티롤을, 프랑스는 북부 티롤과 포아아를버그를, 그리고 소련은 니더외스터라이히와 부르겐란트, 그리고 뮐피어르텔을 통치하였다. 비엔나는 4개 지역으로 분할되어 따로 통치를 받았다. 다만 1구만은 4개국이 매달 교대하여 통치했다. 이를 존 스와프(Zone swap)라고 불렀다.

 

전후의 오스트리아는 경제난을 겪었으나 마샬 플랜의 도움으로 서서히 경제가 회복되었다. 이를 '도나우강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1945년 4월, 나치로부터 비엔나를 탈환한 소련은 아직 독립적인 정부가 구성되지도 않았는데 마치 선심이나 쓰듯 오스트리아에 자체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승인했다. 단, 사회주의자, 보수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공존하는 정부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하여튼 이에 따라 정부가 구성되었으니 이를 제2공화국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정부는 사회주의자 노정치인인 칼 렌너(Karl Renner)박사가 책임 맡도록 했다. 1945년 말에 새로운 정부는 서방의 각국으로부터도 승인을 받았다. 새로운 정부는 비록 오스트리아가 4대 강국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지만 외교문제 등에 있어서 독자적인 행동을 할수 있었다. 다만,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는 사전에 4대 강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비엔나의 의사당(팔라멘트)

 

제2공화국은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정치 그룹들 간의 격렬한 분규로 날을 지새웠던 제1공화국과는 달리 안정적인 민주주의 정부로서 착실하게 발전되어갔다. 양대 정당인 가톨릭보수주의인 오스트리아국민당(ÖVP)과 사회민주당(SPÖ)이 연정을 이루고 정부를 운영하였다. ÖVP는 1966년까지 연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공산당(KPO)은 선거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1950년까지 연정에 남아 있었다. 제2공화국에서 유일한 야당은 FPÖ(Freedom Party of Austria)였다. 범독일주의자들과 진보성향의 정치인들이 주축을 이룬 정당이었다. FPÖ는 1955년에 설립되었다. 양대정당인 ÖVP와 SPÖ는 서로 연합하여 연합국의 점령기간 동안 오스트리아의 발전을 위해 슬기롭게 대처하였다.

 

비엔나는 세계의 관광 1번지가 되었다. 사진은 링슈트라쎄를 한가롭게 운행하는 피아커

 

1955년 5월 15일 오스트리아 국가조약(Austrian State Treaty)이 비엔나의 벨베데레궁전에서 체결되었다. 이 조약의 독일어 풀네임은 Staatsvertrag betreffend die Wiederherstellung eines unabhängigen und demokratischen Österreich, unterzeichnet in Wien am 15. Mai 이다. 4대강국의 외무장관들이 모여서 서명했다. 소련은 이바체슬라브 몰로토프 외무장관, 미국은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 영국은 해롤드 맥밀란 외상, 프랑스는 앙투안 피네이(Antoine Pinay) 외상이 서명했다. 오스트리아를 대표하여서는 레오폴드 휘글(Leopold Figl) 외상이 서명했다. 이로써 미, 소, 영, 불의 4대 강국에 의한 통치가 종결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을 선언하였다. 1955년 10월 26일에는 헌법에 중립국임을 명시하였다. 중립국 오스트리아의 정치 시스템은 이른바 프로포르츠(Proporz)로서 설명된다. 프로포르즈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정부의 직책을 양대 정당이 균등하게 차지한다는 것이다. 노동자, 사업가, 농부 등 이익집단의 대표는 입법과정에 골고루 참여할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폭넓은 합의가 아니면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였다. 이를 콘센서스 시스템(Consensus System)이라고 한다. 프로포르즈와 콘센서스 시스템은 연정이 아니었던 기간인 1966년부터 1983년까지도 준수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ÖVP와 SPÖ의 연정은 1966년에 끝났다. ÖVP가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70년에는 ÖVP가 의석을 잃었다. SPÖ의 리더인 브루노 크라이스키가 FPÖ를 포용하여 소수정부를 구성하였다. 1971년, 1975년, 1979년 선거에서 크라이스키는 절대 다수를 획득하였다. 그리하여 1970년대는 사회정책에서 진보적 개혁을 이룩한 기간이었다. 오늘날 크라이스키 시대의 경제정책이 간혹 비판을 받기도 한다. 국가 부채가 축적되어 갔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수익성이 없는 사업도 국가사업이라는 미명아래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을 받았다.

 

1955년 5월 15일 오스트리아 독립과 영세중립국임을 규정한 오스트리아국가조약이 체결된 비엔나의 벨베데레궁전

 

SPÖ는 1983년 선거에서 대패하였다. 그리하여 프레드 시노봐츠(Fred Sinowatz)가 이끄는 SPÖ는 어쩔수 없이 FPÖ와 연정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1986년 봄, 쿠르트 봘트하임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나치정권에 동조했다는 의구심으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봘트하임 대통령을 전범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이러한 소란 때문에 결국 시노봐츠 수상은 사임하였고 프란츠 브라니츠키(Franz Vranitzky)가 수상의 자리에 올랐다. 1986년 가을, 독일국수주의와 진보 좌익간의 대결 결과로 FPÖ의 외르크 하이더(Jörg Haider)가 FPÖ의 리더가 되었다. 브라니츠키는 FPÖ와 SPÖ간의 연정 협약을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 새로운 선거이후 SPÖ는 알로이스 모크(Alois Mock)가 이끄는 ÖVP와 연정을 만들었다. 외르크 하이더는 프로포르즈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인기를 끌어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983년에는 겨우 4%의 지지율이었으나 1999년에는 27%까지 올라갔다. 한편 녹생당은 1986년부터 의회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SPÖ-ÖVP 연정은 1999년까지 지탱되었다. 오스트리아는 1995년에 EU에 가입하였다. 2002년에는 유로 존(Euro Zone)에 참여하여 쉴링을 폐기하고 유로화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스트리아가 유로를 받아 들이기 전까지는 쉴링을 사용했다. 사진은 모차르트의 초상화가 들어 있는 5천 쉴링 지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