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속성 역사 정복

12. 나치 독일에 합병

정준극 2010. 2. 6. 05:37

[나치 독일에 합병](1938-1945)

 

뉘른베르크 제국의회에서 오스트리아와의 통합을 주장하는 연설을 한 히틀러가 만장의 지지를 받고 있다. 1937년 1월 30일.

 

1938년 3월 12일, 나치 독일군은 군화소리도 요란하게 오스트리아에 진군하였다. 베르사이유조약과 생제르망조약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통합하는 것을 극도로 금지하였으나 나치독일은 이를 무시하고 마침내 오스트리아를 무혈 점령하였다. 그런데도 겉으로의 명칭은 '합병'(Anschluss: 안슐르쓰)이라고 했다. 히틀러는 한술 더 떠서 '오스트리아는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다'면서 자못 감개스러워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독일과의 통합을 열렬히 찬성하였기 때문에 마지못해 합병한다고 설명했다. 나치주의자들은 사실상 1930년대 초반부터 히틀러의 의중에 따라 오스트리아에서 비밀 작업을 추진하여 왔다. 슈슈니그 정부가 나치주의자들의 활동을 억제할수록 이들은 지하에서 세력을 키워왔다. 히틀러의 지원을 받은 오스트리아의 나치주의자들이 독일과의 합병을 노골적으로 요구하자 슈슈니그 수상은 이 문제를 국민투표를 통하여 결정하자고 제안하였다. 국민투표는 1938년 3월 13일에 치룬다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나치독일군이 하루 전날인 3월 12일에 생각지도 못했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오스트리아에 진군하였다. 이미 나치분자들은 내무성을 비롯한 오스트리아의 요소요소를 장악하고 있었다. 나치의 괴뢰에 불과한 아르투르 자이쓰-인크바르트(Arthur Seyss-Inquart)가 수상에 임명되었다. 3월 13일에 치룬다는 국민투표는 4월 10일에 실시되었다. 전국민의 99.73%가 독일과의 합병을 찬성하였다. 물론 조작된 투표였지만 국민투표는 국민투표였으니 어쩔수 없었다.

 

비엔나에 입성한 히틀러가 나치에 의해 임명된 수상인 아르투르 자이쓰-인크바르트의 영접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2차 대전 중에 독립된 국가로서 존재하지 못했다. 마단, 독일 제3제국에 속한 하나의 지방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은 내용적으로는 나치군의 침공에 의한 합병이었다. 하지만 나치주의자들은 표면적으로나마 오스트리아 국민의 절대다수가 원하기 때문에 합병했다고 내세웠다. 나치는 합병 후에 우선적으로 유태인들에게 고통을 가했다. 당시 비엔나에는 약 20만명의 유태인들이 살았다. 유태인들은 오스트리아의 경제, 과학, 문화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병 이후 대부분이 추방당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수많은 사회주의자들과 가톨릭 정치인들도 희생당하였다. 오스트리아 저항세력이 있었지만 별로 효과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 (오스티라아 레지스탕스는 전쟁의 막바지에 슈테판스돔에 연락본부를 두었다. 이들은 암호는 O5였다. O은 독일어 알파벳의 O이며 5는 알파벳에서 다섯번째의 글자, 즉 E를 의미했다. 두 글자를 합치면 OE가 된다. 이것은 Oesterreich(오스트리아)의 첫글자가 된다. 그래서 슈테판스돔의 앞쪽 벽면에 지금도 O5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이 있다.)

 

1938년 3월 15일 비엔나의 헬덴플라츠(영웅광장)에서 합병에 대한 연설을 하는 히틀러. 20만명의 비엔나 시민들이 운집하여 합병을 환영하였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오스트리아는 연합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1945년 3월 28일 미군이 처음으로 오스트리아 영토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틀후 러시아의 적군(Red Army)이 동부 국경을 넘어왔다. 적군은 4월 13일에 비엔나에 입성하였다. 미군과 영국군은 오스트리아의 서부와 남부를 장악하였다. 이로써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수중에 넣는 것을 방지할수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통치가 끝나고 연합국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미, 영, 불, 소가 오스트리아 전 영토를 적당히 4분할하여 다스렸다. 비엔나는 비엔나대로 네 지역으로 분할하여 미, 영, 불, 소가 다스렸다. 하지만 소련이 동부로부터 밀고 들어와서 비엔나 탈환에 막강한 기여를 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비엔나에서는 사실상 소련군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오스트리아 영토에서 미국은 오버외스터라이히주의 대부분(북부 제외)와 잘츠부르크, 영국은 슈타이어마르크와 캐른텐, 프랑스는 포아아를버그와 티롤, 소련은 니더 외스터라이히와 부르겐란트, 그리고 오버외스터라이히의 북부를 통치하였다. 비엔나의 경우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통치하였다. 미국은 7구 노이바우, 8구 요제프슈타트, 9구 알저그룬트, 17구 헤르날스, 18구 배링, 19구 되블링을 통치하였으며 영국은 3구 란트슈트라쎄, 5구 마르가레텐, 11구 짐머링,12구 마이들링, 13구 히칭, 23구 리징의 일부를 통치하였고 프랑스는 6구 마리아힐르프, 14구 펜칭, 15구 루돌프스하임, 16구 오타크링을 통치하였으며 소련은 2구 레오폴드슈타트, 4구 뷔덴, 10구 화보리텐, 20구 브리기테나우, 21구 플로리드스도르프, 22구 도나우슈타트를 통치하였다. 1구는 네 나라가 공동으로 통치하였다. 이러니 서로 구역을 지키느라고 난리도 아니었다.

 

1945년 비엔나를 점령한 4대국의 헌병들이 비엔나 시내를 합동으로 찰하고 있다. 사진은 모르친광장 부근. 영화 제3의 사나이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