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헨리 8세의 왕비들

1. 아라곤의 캐서린

정준극 2010. 2. 9. 01:56

첫 번째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 (Catherine of Aragon)

1485년 탄생, 14세 되던 해인 1509년 결혼, 같은 해 남편 아서(Arthur) 왕세자 사망. 헨리

8세와 결혼. 헨리보다 6년 연상. 48세 되던 해에 1533년 이혼, 1536년 51세로 사망.


헨리(헨리8세를 말함)의 복잡다단한 결혼 경력은 사실 당시 왕실의 관습을 따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헨리의 형인 아서(Arthur)는 태어나고 나서 얼마 후에 스페인 아라곤의 공주와 약혼하였다. 그 때 공주의 나이는 겨우 세 살이 지난 때였다. 영국과 스페인간의 관계를 더욱 굳건히 할 목적의 정책 결혼이었다. 아서의 아버지인 영국왕 헨리 7세와 캐서린의 부모인 스페인의 페르디난드(Ferdinand)왕-이사벨라(Isabella)여왕 사이에 이루어진 약혼이었다. 당시는 스페인이 대서양을 제패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영국으로서는 스페인과의 결혼으로 끈끈한 동맹을 맺어 마찰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서와 캐서린을 통한 영국과 스페인과의 정략결혼은 10여년이 흐른 후, 캐서린이 열다섯 꽃다운 나이일 때 성사되었다. 런던에 도착한 캐서린은 아서와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던가? 병약한 아서는 결혼한지 몇 달 후에 젊고 아름다운 신부를 남겨 두고 불귀의 객이 되었던 것이었다. 아서의 사망으로 영국의 왕위 계승권은 동생인 헨리에게 넘어갔다. 미리 말하지만 그가 곧 나중에 헨리 8세가 된 인물이다. 원래 아서와 캐서린의 결혼은 영국과 스페인간의 관계 강화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실제로 누가 신랑이 되고 누가 신부가 되느냐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두 왕실간의 정략적 결혼이었을 뿐이었다. 당시는 영국이나 스페인 모두 로마가톨릭 국가였으므로 왕실간의 결혼에 대하여는 교황의 칙령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당시 교황 율리우스(Jullius) 2세의가 발표한 칙령은 영국과 스페인간의 왕실 결혼이라는 점만 강조한 내용이었으며 ‘신랑은 아서이고 신부는 캐서린이다’ 등등의 구체적인 사항은 거론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 캐서린의 비운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캐서린 공주는 1485년 12월 16일,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왕과 이사벨라 여왕 사이의 다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실은 그 위로 자녀가 더 있었지만 어릴 때 사망하고 다섯 아이만 남았다. 당시는 신생아 사망률이 아주 높았었다. 캐서린이 신생아 사망의 문턱에서 벗어나자 곧 이어 유럽 왕가들 사이에서 결혼 후보자 리스트에 오르게 되었다. 결국 스페인은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하여 캐서린과 영국 황태자인 아더와의 약혼을 결정하였다. 물론 약혼은 약혼이고 정작 결혼까지는 몇 년을 더 보내야 했다. 아직 두세 살 밖에 안 된 아이들이 결혼한다는 것은 너무 조급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1501년, 캐서린은 16세 생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부모의 지시에 따라 아서 왕자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영국으로의 험난한 항해를 떠나게 되었다. 신랑 아서는 14세가 겨우 지난 때였다. 두 사람은 양가 대표와 하객들이 모인 가운데 결혼식을 올린후 웨일스 지방에 있는 루들로우(Ludlow) 저택에 신혼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전통적인 황태자 저택이었다. 그래서 영국의 황태자를 ‘Prince of Wales’라고 부르지 않던가. 그러나 신랑 아서가 결혼 6개월도 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으니 캐서린은 하루아침에 청상과부가 된 것이다. 아서가 무슨 병으로 사망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16세에 과수댁이 된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


머나먼 이국, 물설고 낯설은 영국 땅에서 뜻하지 않게 고작 소년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편을 여윈 캐서린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하여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캐서린은 아서에 대하여 겨우 이름난 들었을 뿐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영국에 왔다. 그러므로 아서가 병약했는지 어떠했는지 알수가 없었을 것이다. 캐서린이 병약한 아서를 남편이랍시고 마지하고 나서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시 아무런 기록이 없다. 하지만 캐서린은 나중에 아서와 자기와의 결혼이 말이 결혼이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고 말한 일이 있다. 말하자면 신혼 첫날밤도 제대로 치루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남편 아서가 죽자 캐서린의 운명은 다시 한 번 스페인의 부모, 그리고 시부모인 헨리7세의 손에 달려있게 되었다. 양가 부모들은 영국-스페인의 동맹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 캐서린과 영국의 차기 왕위 계승자로서 세상 떠난 남편의 동생인 헨리와의 약혼이 전격 발표되었다. 캐서린이 남편을 잃은 후 겨우 1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그 때 캐서린은 꽃다운 열일곱 이었으며 헨리는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으로서 고작 열두살이 지난 때였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약혼 후 결혼까지 몇 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결혼 약속은 되어 있지만 캐서린과 헨리의 결혼은 그다지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1505년 경, 헨리의 아버지인 헨리7세는 영국-스페인간의 동맹에 대하여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헨리7세는 앞으로 왕위를 계승할 아들 헨리(헨리8세)에게 캐서린과의 약혼을 파기해 버릴 것을 종용했다. 이유인즉 아무리 국가간의 결혼이지만 당사자인 헨리와 캐서린 두 사람은 생각치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느닷없이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헨리7세는 주선은 자기가 해놓고 이제와서 발뺌을 하였던 것이다. 영국인의 약삭빠른 장사치 성품을 고스란히 볼수 있는 장면이다. 영국에 남아 있던 캐서린의 운명은 헨리7세가 국왕으로 있는 한 한치 앞을 내다 볼수 없는 불안한 것이 되었다.


1509년, 헨리7세의 죽음은 이런 모든 불확실성을 해결해 주는 것이었다. 18세의 젊고 패기만만한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헨리는 이제 자기 인생을 자기가 개척하고 주관해야할 입장이 되었다. 헨리는 런던의 궁전에서 거의 8년 동안 혼자서 지낸 캐서린과의 결혼이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6년간 아무런 얘기도 없었다가 이제 와서 결혼 무효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헨리는 현실적이었다. 아직도 약관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헨리로서 캐서린은 지성적이고 교양이 있으며 흠 잡을데 없이 품위 있는 스페인의 공주가 아니던가. 더구나 참으로 신앙심이 돈독한 여인이 아니던가. 젊고 의욕에 넘쳐있는 헨리에게 있어서 이만한 배경의 왕비를 마지 한다는 것은 자기의 앞날에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왕비의 역할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지성과 교양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품위와 신앙심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왕비는 그저 후계자인 자녀를 생산해야 했다. 그것도 아들을 낳아야 했다. 다음 왕위를 계승할 아들만 낳으면 그 것으로 왕비의 역할을 다 했다고 할수 있다. 캐서린은 임무 수행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두 번이나 유산했고 한번은 딸을 사산했다. 이어 두 번이나 아들을 출산했는데 첫 번째 아들은 태어 난지 몇 시간 만에 죽었고 두 번째 아들은 그나마 몇 주를 살다가 죽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가 딸 메리였다. 1516년 태어났다. 캐서린이 31세 때였다. 메리가 태어 난지 2년 후에 캐서린은 또 임신하였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것이 마지막 기록이었다.


헨리는 점점 초조해 졌다. 초조하기도 했지만 실망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후계자를 얻지 못한 실망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캐서린과의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했다. 캐서린이 누구인가? 스페인 무적함대(Armada)의 주인인 이사벨라 여왕의 딸이 아니던가? 헨리는 메리가 태어난 이후 11년 동안 캐서린이 더 이상 자녀를 출산하지 못하였지만 캐서린에게 충실하였고 어찌 보면 헌신적이기까지 했다. 물론 결혼 생활 18년 동안 왕으로서 외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여러 명의 여인들과 정사를 가졌다. 그 중 에 잘 알려진 사람은 ‘엘리자베스 블라운트’와 ‘메리 볼레인’이다. ‘엘리자베스 블라운트’는 헨리와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두었다. 물론 사생아 신세였다. 나중에 아들이 없어 다급해진 헨리는 서자를 감히 왕자로 책봉하지는 못하고 아들은 아들이니 아들로서 인정한다는 조칙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또 하나의 여인인 ‘메리 볼레인’은 나중에 헨리와 결혼하여 두 번째 왕비가 된 ‘앤 볼레인’의 친 언니이다. 참으로 이상야릇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언니는 헨리의 정부였다가 나중에 바람맞았고 동생은 똘똘하여서 왕비까지 되었으나 런던탑에서 참수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동생 앤 볼레인의 위세는 나중에 자기의 딸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됨으로서 다른 어느 누구에 비하여 한껏 높아졌으니 자기에게 불어 닥친 운명을 고마워 해야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문제의 헨리8세


그러면 캐서린은 어찌 되었는가? 1527년,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른바 ‘국왕의 중대 사안’(King's Great Matter)이 발생하였다. 이때에 캐서린은 42세 였다. 이 나이쯤이면 이제는 더 이상 아이를 낳기 어려운 때였다. 반면 헨리는 아직도 정력이 왕성한 36세의 청년이었다. 헨리는 후계자를 얻지 못할까 해서 점점 초조해 졌다. 아들이 정 없으면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메리에게 법적 후계를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헨리로서는 괴로운 심정이었다. 당시 메리의 나이는 열한살이었다. 한편, 영국왕실에서 아들의 존재가 중요한 관건으로 부각되는 마당에 약 2년 전 부터 헨리와 ‘엘리자베스 블라운트’라는 여인 사이에 숨겨놓은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왕실에 퍼지기 시작했다. 아들을 얻지 못한 헨리는 이 아들이 사생아였지만 자기의 아들로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헨리는 이 아이에게 ‘리치몬드 공작’ (Duke of Richmond)이라는 작위를 주었다. 이것은 헨리가 그 아들, 즉 리치몬드 공작을 다음 왕위 계승자로 임명하겠다는 전주곡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일은 리치몬드 공작이 1536년 죽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헨리가 계속 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앞서 말한 1527년의 저 유명한 ‘국왕의 중대 사안’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 중대 사안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국왕 헨리가 젊은 아가씨 ‘앤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해 야기한 일대 세계적 사안이었다. 헨리는 앤 볼레인을 만나자 마자 단번에 사랑에 빠졌다. 캐서린과 아무런 열정이 없었던 헨리로서는 발랄한 아가씨 앤 볼레인을 정부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야심에 차 있는 앤 볼레인은 헨리가 자기와 정식으로 결혼해야 하고 왕비로 삼아주어야 헨리를 받아들이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헨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들을 낳아 줄수 있는 여인이었다. 헨리는 어떻게 해야 앤 볼레인과 결혼 할수 있을지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하려면 현재의 왕비와 이혼해야 한다. 하지만 가톨릭에서의 이혼은 절대 금지였으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내 성경 구절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마치 자기를 위해 기록된 성경 구절 처럼 생각했다. 레위기 20장 21절이었다. 기록된바 ‘만일 누구던지 자기 형수를 아내로 삼으면 이는 온당치 않은 일로서...자녀가 없으리라’는 내용이었다.

 

문제의 앤 볼레인


잘 아는대로 헨리와 캐서린 사이에 자녀가 없는 것이 아니다. 메리이다. 하지만 딸은 문제가 달랐다. 지금까지의 왕실 계보에서 여자가 왕위에 오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헨리는 ‘하나님은 영국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아시지만 아직 왕위를 계승할 남자 아이는 주지 않으셨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헨리는 형의 부인이었던 여인과 결혼했으므로 자기의 결혼이 근친상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야 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일이라고 해석했다. 그렇게 하여 오랜 기간 동안의 흙탕물처럼 더럽고 먹구름처럼 음울하며 유치하고 천박하기 까지 한, 그러면서도 어쩔수 없이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헨리8세의 결혼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캐서린과의 불합리한 결혼을 청산하기 위해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칙령이 부당하다는 것을 주장하여 폐지코자 하는 노력의 시작이었고 영국이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게 된 도화선이었다. 그리고 영국성공회(Anglican Church)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돌이켜보건대 헨리-캐서린의 이혼문제가 움트기 시작한 처음부터 캐서린은 상당히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캐서린은 현재 왕실에서 무슨 일이 진행 중인지 알지 못하도록 격리 되어 있었다. 나중에야 무슨 일이 진행 중인지 알았던 캐서린에게 캐서린을 변호해 주고 자문해 줄 사람이 배정되었지만 말할 필요도 없이 형식적으로 헨리가 임명한 헨리측 사람이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헨리는 이 문제가 영국 국내에서 조속히 해결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교황청 특별 대리인으로 임명되어 있는 월시 추기경 (Cardinal Wolsey)이 재판관이 되어 빨리 판결되기를 바랐다. 물론 월시 추기경도 헨리가 임명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캐서린은 이런 짜고 치는 고스톱 재판은 절대 받을수 없다고 주장하고 직접 로마 교황청에 이혼의 부당성을 호소하였다. 당시 교황인 율리우스2세는 스페인 황제 카를로스 5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처지였다. 카를로스 5세는 바로 캐서린과 사촌 간이었다. 그러므로 캐서린은 교황청이 자기 편을 들어서 변호해 줄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지나친 기대였다. 카를로스 5세와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겉으로는 캐서린에 대하여 동정하고 지지하는 척 했지만 실제로는 어떤 조치도 취하기를 꺼려했다. 자칫하다가는 영국과의 일대 분쟁에 휩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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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이 유폐의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킴볼턴 성


캐서린과의 이혼에 대한 법적이고도 정치적인 분쟁은 6년이란 기간 동안 온 영국 땅을 격랑으로 끌어 넣었다. 캐서린 왕비는 자기의 명예, 신분, 그리고 자기의 유일한 소생인 메리가 헨리의 적법한 딸로서 계속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그야말로 피눈물 나는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하지만 헨리에게는 마이동풍격이었다. 헨리는 끝내 자제심을 잃고 말았다. 1533년이었다. 헨리는 교황청의 권위를 거부하였다. 대신 자기가 임명한 대주교인 토마스 크란머(Thomas Cranmer)로 하여금 이혼 재판을 맡도록 했다. 크란머는 헨리가 그토록 갈망했던 캐서린과의 결혼 무효 판결을 내렸다. 재판에서 구약성경 레위기의 말씀이 인용되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신앙심이 독실하기로 이름난 캐서린으로서도 성경에 기본을 둔 판결이라는 데에 대하여는 할 말을 잊었다. 하지만 캐서린이 누구인가? 캐서린은 정신을 차리고 이를 악 물었다. 딸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 거렸다. 캐서린은 이혼 판결에 복종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와 함께 왕비 타이틀의 포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판결은 판결이었다. 캐서린은 법원에서 내린 새로운 타이틀을 받아야 했다. ‘미망인 왕세자비’ (Princess Dowager of Wales)라는 칭호였다. 왕비도 아니고 왕세자비라는 칭호를 주었던 것이다. 아서 부인으로서의 타이틀이었다. 이로써 헨리의 부인이었다는 자취는 사라졌다.

 

 후덕하게 보이는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


궁정에서 살지 못하고 쫓기어 나와야 했던 캐서린은 딸 메리와도 함께 살 권리를 박탈당했다. 캐서린은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킴볼튼(Kimbolton)이란 곳에 있는 축축하고 어두컴컴한 고성에서 여생을 지내야 했다. 밖으로 연결된 길은 모조리 막힌 그런 고성이었다. 궁정에서 함께 지내던 그 많던 하인과 시녀들은 거의 모두 쫓겨났고 이 어두운 고성에는 다만 몇 명의 충성스런 시녀들만 캐서린을 지켜주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캐서린은 자기의 비참한 운명에 대하여 불평이나 저주의 말을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 오로지 기도에만 매달렸다. 헨리를 용서한다는 내용의 기도를 했는지, 또는 딸 메리의 앞날을 위한다는 내용의 기도를 했는지는 모른다. 캐서린은 이곳 킴볼튼에서 1536년 1월 7일 세상을 떠났다. 50세 생일을 마지하기 불과 몇 주 전 이었다. 캐서린은 ‘피터보로 수도원’ (Peterborough Abby)에 매장되었다. 왕자였던 아서의 부인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장례식이었을 뿐 왕비로서의 장례식은 아니었다. 헨리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블라디 메리'라고 알려진 캐서린왕비의 딸 메리 여왕. 스페인의 필립2세와 결혼하였으나 얼마후 소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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