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헨리 8세의 왕비들

4. 클레브스의 앤

정준극 2010. 2. 9. 01:59

네 번째 왕비 클레브스의 앤 (Anne of Cleves)

1515년 출생. 25세 때에 헨리와 결혼. 헨리와는 24세 차이. 같은 해에 이혼. 42세로 1557년

사망.

 

클레브스의 앤


세 번째 왕비 제인 세이무어가 세상 떠나고 나서 2년동안 헨리는 독신으로 지냈다. 이제 왕자가 태어났으니 조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간에도 영국 왕실에는 신경 쓰이는 일이 그칠 새 없이 일어났다. 그 중의 하나가 유럽의 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은밀한 종교재판 건이었다. 그 종교재판이란 다름 아니라 영국 왕 헨리의 탈가톨릭을 정죄하는 것이었다. 덧붙여서 헨리의 엉터리 성경해석으로 인한 신성 모독, 불미스런 혼인관계 등등에 대한 일종의 성토행사였다.


당시 헨리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 제1장관은 저 유명한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이었다. 크롬웰은 국정의 대부분은 스스로 처리하고 나중에 헨리에게 보고하는 정도의 권세가 있었다. 물론 중요한 국정에 대하여는 미리 국왕인 헨리와 협의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 지경에 영국은 유럽에서 상당히 고립되어 있었다. 대부분 유럽의 국왕들은 헨리를 영국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Reformation)으로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개신교의 정신을 지지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를 중심으로하는 국가들은 로마가톨릭을 계속 신봉하고 있었다. 어느 경우에든 교회의 수장은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가 지명한 사도 베드로였지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영국만이 국왕이 종교의 수장이 되는 성공회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교회의 예배 의식에 있어서도 개신교 스타일도 아니고 가톨릭 스타일도 아닌 복합 형태였다. 


유럽이라는 하나의 기치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영국으로서 언제까지나 독거노인으로서만 남아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기회만 생긴다면 유럽의 어떤 나라든지, 특히 되도록이면 강대국과 동맹관계를 맺어야 했다. 개신교가 되었던 가톨릭이 되었던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개신교의 세력보다는 가톨릭의 세력이 현저하게 컸던 때였다. 헨리가 유럽의 왕국들로부터 영국의 국왕으로서 인정받으려면 각국의 종교재판을 통하여 판결을 받아야 했다. 영국으로서는 로마 가톨릭 국가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제 헨리의 결혼은 종전처럼 연애 감정을 앞세운 것이 될 필요가 없었다. 왕궁에서 눈에 맞는 여인을 선택하여 결혼하고 후사를 기대하는 그런 식의 개인적인 결혼은 의미가 없게 되었다. 유럽 강국과 우호 동맹 관계를 맺는 입장에서의 결혼이 되어야 했다. 영국으로서는 그런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음 배우자를 고르는데 있어서 헨리의 전통적인 취향까지 무시할 는 없는 노릇이었다. 못생겨도 좋으니 아무라도 관찮소 라는 말은 헨리의 취향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 일이었다. 헨리는 종전부터 ‘왕비는 왕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못생기면 그렇게 할수 없으니 안 된다’라는 주장을 해온바 있다. 그래서 제인 사후, 차기 왕비 간택 운운 할 때에 헨리는 제1장관에게 후보자를 선택하기 전에 우선 자기가 채점하여 어느 정도 합격선에 들은 다음에 공식적으로 혼사를 추진토록 당부한 일이 있다.


헨리의 채홍사들은 각국을 다니면서 배우자 후보들을 은밀히 조사평가 하였다. 생김새, 행동거지, 교양정도, 가족사항등을 자세히 조사했다. 그러나 말로만 이리저리 생겼다고 설명 듣는 것으로는 부족하였다. 헨리는 훌륭한 화가 몇 명을 각국에 보내어 후보 규수들의 초상화를 그려 오도록 했다. 그런 화가 중에는 저 유명한 홀바인(Holbein)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인이 세상 떠난 후 거의 1년 동안은 제4대 왕비 추진사업이 별다를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영국을 유럽에서 정치적으로 위기상황에 몰아 넣을수 있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왕과 합스부르크 황제가 그 동안의 해묵은 감정싸움을 종식하고 동맹관계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만일 이들이 동맹관계를 맺게 된다면 같은 가톨릭 제후로서 로마 가톨릭을 지원한다는 명분아래 가톨릭에 감히 반기를 든 영국에 대적코자 연합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독일에서는 라인강변을 중심삼아 남으로부터 북까지 세력을 떨치고 있던 클레브스(Cleves), 율리히(Julich), 마르크(Mark), 베르크(Berg)등의 공국들이 연맹을 맺었다. 이들 연맹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창대하였다. 연맹의 대표인 클레브스의 젊은 공작은 세력 확장을 위해 독일의 가장 유력한 공국인 색소니(Saxony), 그리고 몇 몇 루터교 공국들과 혼인 관계를 유지하는 정책을 펴 나가고 있었다. 젊은 공작은 이들 연맹을 ‘겔더란트 공작령’(Duchy of Gelderland)이라고 불렀다.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황제는 이 호칭에 대하여 매우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클레브스 공작령의 세력이 익일 창대해 짐으로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었다. 헨리는 만일 클레브스 가문과 혼인으로 연결된다면 유럽에서의 따돌림 신세를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유익할 것으로 생각했다. 클레브스 연맹이 개신교를 옹호하는 입장이므로 로마 가톨릭의 잔소리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클레브스 공작 가문에는 미혼의 두 공주가 있지 않은가? 방년 24세의 앤(Anne)공주와 여동생 아멜리아(Amelia)공주였다. 홀아비 신세인 헨리의 관심이 이 두 공주에게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대의 화가 홀바인이 다시 파견되었다. 두 공주의 초상화를 그려오는 임무였다. 헨리가 초상화를 보고 배우자를 선택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헨리와 앤과의 결혼 계약이 성립되었다. 영국이외의 국가 사람과 영국 왕과의 결혼이니만치 계약을 체결하는 데에 만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계약이 체결되었을 즈음에는 영국의 정치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프랑스 왕과 합스부르크 황제와의 관계가 종전처럼 적대 관계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영국으로서는 더 이상 프랑스 등등의 위협을 고려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친선관계만 맺으면 눈앞의 대적인 프랑스를 견제할 수 있는 노릇이었다. 

 

클레브스의 앤의 초상화를 그려 넣은 메달


아무리 국제사정이 조금 달라졌다고 해도 클레브스 가문과의 결혼약속은 지켜야 했다. 드디어 1540년 1월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야속하게도 이미 결혼식 이전부터 헨리는 어떻게 하면 이 결혼의 재난에서 도피할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헨리는 클레브스의 앤과 결혼함으로서 가톨릭 국가들로부터 단체 따돌림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였는데 일이 잘 되려고 했는지 또는 헨리의 심중을 살펴주어서인지 클레브스 연맹 공국과 합스부르크 황제간에 일촉즉발의 전쟁 위험이 있게 되었다. 헨리로서는 더 이상 클레브스 가문과 인연을 맺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나마 새로운 왕비 앤이 헨리의 마음에 쏙 들었다면 문제는 좀 더 간단해 질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우선 새로운 왕비 앤은 영국왕실의 그 골치 아픈 법도에 질려 있었다. 무슨 놈의 예절이 그렇게도 까다로운지 몰랐다. 신경과민에 걸릴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앤은 노상 몸이 건강치 못했다. 영어도 잘 못했다. 독일의 뒷셀도르프의 공작가문에서 자라난 앤은 집안일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교육은 단단히 받았지만 음악이나 무용, 문학 등에 대하여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반면, 헨리는 음악, 문학, 출판, 사냥에 이르기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취미가 높았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나 개인적 취향으로나 엔을 몰아 낼 이유가 자꾸 쌓이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라는 여인이 등장하였다.


매듭을 풀기까지는 6개월이 걸렸다. 헨리는 특기라고 할수 있는 ‘트집 잡아  떨쳐내기’가 시작되었다. 헨리는 앤이 자기와 결혼하기 전에 ‘로렝 공작’이라는 사람의 아들과 약혼했던 사실을 들쳐 냈다. 그리고는 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입장에서 자기와 결혼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결혼이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했다. 만일 앤이 그 주장의 부당성을 들어 이의를 제기하고 여러 측면에서 항의를 했다면 이기지도 못할 것을 공연히 피해만 볼 뻔하였다. 그러나 앤은 의외로 헨리의 주장을 담담히 받아  들이고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었다. 증언을 하라면 했고 잘못을 인정하라면 그렇게 했다. 그리하여 헨리와의 결혼은 없던 일로 결정을 보았다. 대신, 앤은 영광스럽게도(?) ‘국왕의 여동생’(King's Sister)라는 칭호를 받고 저택과 영지를 보상금으로 받았다. 앤은 영지에서 17년 동안 왕실의 ‘오빠’에게 충성을 보내며 남이 보기에는 마음 편한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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