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헨리 8세의 왕비들

5. 캐서린 하워드

정준극 2010. 2. 9. 02:00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

1521년 탄생. 19세 때에 50세의 헨리와 결혼. 헨리와는 30년 차이. 21세의 꽃같은 나이로

처형당함.

 

캐서린 하워드


헨리의 여섯 왕비 중, 두 명이 형장의 칼 날 아래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하였으니 두 번째 왕비 앤 볼레인과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이다. 캐서린 하워드는 어떤 여인이었는가? 그의 아버지 에드몬드 하워드경(Lord Edward Howard)은 국가유공대신 노포크 공작(Duke Norfolk)의 동생으로서 변변치 못한 위인이지만 지체 높은 귀족이기에 하는 일 없이 그럭저럭 지내는 양반이었다. 캐서린 하워드는 처형당한 앤 볼레인과 사촌간이기도 하다. 기막힌 인연이다. 두 사람 모두 영국의 왕비가 되었으나 국왕 헨리의 눈 밖에 나서 처형당하는 기막힌 운명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명랑하고 활달한 처녀였다. 어릴 때부터 부족한 것 없이 응석받이로 자랐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고야 마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캐서린은 부모의 권유로 19살 나이에 왕궁에 발을 들여 놓았다. 왕비인 독일 클레브스 공국에서 헨리의 네 번째 부인으로 시집온 앤 왕비의 시녀로 들어왔다. 당시에 헨리는 앤과의 문제 때문에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아주 결치 아픈 상태에 있었다. 그러던 차에 생기발랄한 캐서린이 눈앞에 어른거리게 되었던 것이다. 캐서린은 눈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 눈빛에 그만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중년을 훨씬 넘은 헨리가 이 젊은 아가씨에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면 아마 캐서린은 어느 유복한 명문 귀족집 청년과 혼사를 맺어 사교계의 주인공도 될수 있었는데 어찌하다가 헨리의 부인이 되었다.


노포크 공작을 위시한 몇몇 하워드가의 사람들은 캐서린에 대한 헨리의 눈빛에 힘입어 두 사람의 결혼을 은밀히 진행시켰다. 이러한 은밀한 결혼 추진 배경에는 크롬웰에 대한 견제의도가 담겨있다. 크롬웰은 헨리의 제1장관으로서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헨리의 신임을 발판으로 여러 가지 혁신적인 정치를 추진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수구적인 귀족들의 정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크롬웰은 자기의 정치적 역량을 과시하느라고 헨리와 독일 클레브스 공국의 앤과의 결혼을 성사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유럽의 사정이 변하여 그 정략결혼은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 결혼은 오히려 헨리에게 부담만 주어 결국 헨리의 6명 왕비중 최단기간 이혼 합의라는 결말을 지은 것이 되었다. 평소 크롬웰에 대하여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세력들이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포크 공작이 주동인물이었다. 자기들 집안 규수를 왕비로 옹립한다면 자기들의 입신도 크게 확대 될뿐만 아니라 정적 크롬웰도 궁지에 몰아넣을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캐서린 하워드 미니에이쳐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은 1540년 7월 거행되었다. 클레브스 앤과의 결혼을 법적으로 무효화 한지 16일 후였다. 크롬웰은 어떻게 되었는가? 직위를 박탈당하고 처형되었다.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결혼은 그런대로 성공적인듯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점이 들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헨리를 살펴보자. 50대가 지난 헨리는 비만증에 걸려 제대로 활동하지를 못했다. 다리 근육통이 자주 일어나 걷는데도 문제가 있었다. 젊은 시절의 패기는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헨리는 옛날의 열정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헨리는 명랑 활달한 캐서린을 ‘여인중의 여인, 보석중의 보석’이라고 칭송하면서 끔찍이 위했다. 헨리는 그저 매일같이 캐서린에게 온갖 선물세례를 퍼부었다. 캐서린이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 캐서린은 화려한 파티를 좋아했다. 젊은 나이에 왕비로서 수많은 왕족들과 귀족들의 치하를 받으며 마음대로 자기의 발랄함과 명랑함을 자랑할 수 있는 궁중 연회야 말로 캐서린에게 아주 제격이었다. 캐서린은 사람들이 자기를 흠모하고 찬사를 보내는 일을 무척 즐겨했다. 헨리는 그저 그런 캐서린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캐서린의 이런 꿈같은 철부지 세월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하워드 가문은 캐서린을 등에 업고 온갖 권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적대감을 품는 부류들이 생기지 않을수 없었다. 이들은 그저 기회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 한지 1년도 채 안되어 캐서린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징조가 나타났다. 캐서린이 어느 연회에 초대 받았을 때 파트너로 동행한 사람이 바로 캐서린을 가장 흠모한다고 노상 노래 부르고 다니던 청년이었다. 캐서린으로서야 흥겨운 파티에 가는데 나이 많고 비만하며 다리에 병이 생겨 춤도 제대로 추지 못하는 헨리와 함께 가느니보다는 자기를 추종하는 젊고 잘 생긴 청년과 가기를 바랬을 것이다. 캐서린이 청년 파트너와 함께 나타난데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전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께서 몸이 불편하시어서 왕비에게 다른 사람의 호위를 받아 가시오라고 했을 터인데 누가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겠는가? 하지만 왕비의 행실은 날이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특히 헨리가 지방 출장 간 사이에는 더 그랬다. 왕비가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며 그 중에서도 자기를 가장 사모하는 청년을 개인비서로 삼아 밤낮없이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대주교인 크란머(Cranmer)는 이 사실을 왕에게 고하지 않았다가는 나중에 더 큰 화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헨리의 즉각적인 반응은 왕비에 대한 전면적 불신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신중을 기했다. 청문회를 갖도록 했다. 청문회가 진행 될수록 왕비에 대한 불리한 증거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하워드가문의 횡포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었던 귀족들이 불리한 증언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캐서린은 자비를 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수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과거 헨리의 여성편력을 들쳐 내면서 공격했다. 이게 오히려 더 큰 실수였다. 헨리는 충격을 받았다. 지가가 그렇게 총애하던 왕비 캐서린이 어떻게 그리도 뻔뻔스럽게 나올수 있는가 하면서 흥분하였다. 추호의 자비를 베풀 여지가 없게 되었다. 영국 왕과 왕실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였다. 캐서린은 자기 사촌인 앤 볼레인의 전철을 스스로 밟았다. 재판 결과 간통죄 등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642년 2월 13일, 발렌타인 하루 전날, 왕비는 런던탑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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