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왕비 제인 세이무어 (Jane Seymour)
1509년 출생. 25세에 헨리와 결혼. 헨리와는 18년 연하. 1537년 28세의 나이로 사망.
제인 세이무어
헨리의 세 번째 왕비인 제인 세이무어(Jane Seymour)의 이력은 많은 면에서 두 번째 왕비 앤 볼레인과 닮은 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왕비의 시종이었다가 왕비가 되었다. 앤은 결과적으로 캐서린을 내?고 왕비가 되었으며 제인은 앤의 뒤를 이어 왕비가 되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자기가 모시던 왕비를 자의반 타의반 밀어내고 왕비의 자리를 차지한 셈이었다. 그런가 하면 두 사람 모두 왕과의 내연적 관계를 거부하고 정식 결혼을 요구하였다. 두 사람 모두 결혼하게 되면 왕비의 자리를 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제인은 왕이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아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제인은 아들을 낳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약해진 몸을 추수리지 못한 나머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까지 헨리에 대한 헌신을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손들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았다고도 할수 있다.
제인의 아버지인 존 세이무어(John Seymour) 경은 궁정에서 헨리에 대한 충성으로 벼락출세한 사람이었다. 궁정에서의 높은 지위 때문에 제인의 가족들은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았고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큰 아들인 에드워드(Edward)는 ‘Somerset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나중에는 헨리와 제인의 유일한 아들로서 어린 나이에 국왕으로 등극한 에드워드4세의 후견인 (Lord of Protector) 노릇까지 하였다. 둘째 아들인 토마스(Thomas)는 해군제독이 되어 영국의 해군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맏딸 제인은 일국의 왕비가 되지 않았던가?
제인 세이무어 미니에이쳐
제인이 언제 궁정에 들어 왔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원래 제인은 캐서린 왕비의 시녀로 들어왔다. 얼마 후 캐서린이 몰락하고 앤이 득세하기 시작하자 앤의 시녀로 자리를 바꾸었다. 당시에는 귀족 부인이거나 귀족 집안의 규수들이 자발적으로 왕비의 시녀로 봉사하는 일이 많았다. 왕실로서는 인건비 들이지 않고 시녀들을 채용했던 셈이었다. 제인은 앤에 비해서 총명하거나 당돌하는 못했다. 인물도 그저 그러했다고 한다. 유명한 왕실화가인 홀바인(Holbein)이 그린 제인의 초상화를 보면 매력이라고는 별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헨리와 제인의 관계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현직 왕비인 앤이 엘리자베스를 낳고 나서 한 2년쯤 지나서였다. 그러니 만일 앤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무리 빽이 좋은 제인이라고 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앤이 아직도 왕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에 헨리는 Wolf Hall이라는 저택에서 며칠 지낸 일이 있었다. 그때 제인을 처음으로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한 얘기가 공식화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을 걸렸다. 헨리의 이 새로운 여인이 새 왕비가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그 다음해에야 겨우 소문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헨리 8세(챨리 클레멘스)와 제인 세이무어(루시 텔레크). 아들을 얻고서.
그 때 쯤 해서 헨리의 그 유별나고 냉혹하기 그지없는 고질병적 광기(infatuation)가 앤의 심경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 헨리가 제인에게 접근하자 제인으로서는 영광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거 잘못하다가는 목숨이 날라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집 세고 타협을 모르는 국왕, 교황을 무시하고 첫 번째 왕비와 이혼을 성사시켰던 헨리, 이제 두 번째 왕비까지 몰아내려고 마음먹고 있는 그가 아니던가? 과연 그런 사람과 결혼해야 할 것인가? 제인의 마음은 무거운 먹구름처럼 내려 앉아 있었다. 하지만 제인은 의외로 침착하고 온화했다. 아마도 제인은 헨리의 결혼이 정치적 게임의 소산이었음을 알지 못했던 것 같았고 더구나 자기가 그 와중에 깊숙이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앤 왕비는 불륜으로 기소되고 구금되었으며 1536년 5월 19일 처형당했다. 그 사건이 있은지 2주일도 되지 않아 제인과 헨리는 결혼하였다. 그러나 제인은 결코 왕비로서 대관식을 갖지 못했다. 생각건대 헨리는 만일 제인이 왕위 후계자 생산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까지도 대비하였던 것 같았다. 헨리의 법적 후계자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였다. 특히 앤이 처형되던 바로 그 해에 헨리의 사생아인 17세의 리치몬드 공작 헨리 휘츠로이(Henry Fitzroy)가 사망하자 그의 왕자 욕구는 상상이외로 높아 졌다. 헨리와 결혼 후 1년이 안되어 제인의 임신 소식이 알려지게 되었다. 마침내 헨리가 왕위에 오른지 29년 만에 에드워드(Edward) 왕자가 태어났다. 분명한 법적 왕위 계승자였다. 그러나 난산이었다.
태어 난지 며칠 안 되어 왕자는 세례를 받았다. 왕자의 세례식에는 캐서린의 딸인 메리와 앤의 딸인 엘리자베스도 참석하였다. 그 때에 메리는 아버지인 헨리와 화해하였기 때문에 궁정의 중요한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실제로는 메리가 아버지인 헨리와 화해했다라기 보다 복종을 서약하였던 것이고 그 때문에 궁정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며 에드워드의 세례식에도 참석토록 허락 받아 어린 왕자의 대모(Godmother) 역할까지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제인 세이무어의 초상화를 그려 넣은 시계
앤의 딸인 엘리자베스는 그 때 4살이었지만 세례식에 참석하여 자기의 존재를 나타 낼 수 있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엘리자베스가 비록 아주 어린 나이였지만 자기 어머니 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마음속으로 깊이 새겨놓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산후에 더 병약해지긴 하였지만 제인 왕비도 세례식에 참석하였다. 영국 왕실로서는 기쁘고 행복한 행사였다. 하지만 비극은 머지않은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제인은 산고의 여파로 몸이 무척 쇠약해 있었다. 원래 병약한 제인이었기에 에드워드는 산모의 진통이 너무 극심하여서 한참 후에 도저히 그대로 둘수가 없어서 급기야 제왕절제 수술로 태어났다는 얘기가 있다. 결국 제인은 아들 에드워드가 세례를 받은지 며칠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제인은 헨리가 자기 무덤으로 미리 마련해 놓은 런던 남쪽의 윈저(Windsor) 궁에 안치되었다. 그리하여 제인은 헨리의 왕비 중에서 유일하게 헨리와 같은 곳에 묻힌 여인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제인의 아들 에드워드는 그로부터 약 30년 후 헨리의 뒤를 이어 영국 왕으로 등극하였다. 그가 에드워드 4세였다.
헨리 8세와 제인 세이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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