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왕비 앤 볼린 (Anne Boleyn)
1502년 출생. 30세 되던 해에 헨리와 결혼. 헨리와는 11년 차이.
1536년 34세의 나이로 처형당함.
1000일의 앤. 헨리8세와의 결혼기념 초상화
영화 ‘1000일의 앤’으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앤 볼린은 어떤 여인이었는가? 어린 딸을 뒤에 남겨두고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런던 타워의 처형장에서 시퍼런 도끼날 아래에 가냘픈 목을 내 맡겨야 했던 영국의 왕비 ‘앤 볼린’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어찌하여 그에게 주어진 운명은 이처럼 처절해야만 했는가? 영국 성공회가 생기도록 한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 앤 볼린 왕비.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였던 앤 볼린이었지만 그의 딸 엘리자베스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중의 한 사람으로 후세에 길이 칭송받는 사람이 되었다. 앤 볼린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진 사항이 없다. 심지어 몇 년도에 태어났는지도 분명치 않다. 1502년 이라는 주장도 있고 1503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쨋든 헨리와는 열살이 넘는 차이였다. 아버지인 토마스 볼린경(Sir Thomas Boleyn)은 런던의 주식 상인이었다. 어찌 보면 장사치에 불과했던 그가 일약 귀족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재수 좋게도 ‘하워드’라고 하는 귀족 가문의 규수와 결혼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규수의 친정어머니는 왕실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 노포크공작(Duke of Norfolk)의 조카였다.
귀족 집안의 한 구석에서 태어난 앤은 그래도 명색이 명문 하워드 가문의 친족이었으므로 어릴 때 프랑스 궁정으로 보내졌고 프랑스 왕비의 문하에서 예의범절과 사교를 배웠고 교양을 익혔다. 말하자면 귀족 집안에 걸맞는 규수로 만들어 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의 풍습으로서 귀족 처녀의 교양수업이란 것은 관찮은 남자를 만났을 때 그 사나이를 어떻게 끌어 들여서 결혼까지 할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 주목적이었다. 1521년 쯤 인가, 앤의 나이 18세, 아니 19세 였을 때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갈등이 깊어져서 곧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무성하였다. 프랑스에 있던 앤은 곧 바로 영국으로 돌아왔고 어머니 쪽의 주선으로 헨리왕의 궁정에 들어가 생활할 수 있었다. 꽃다은 나이의 앤이었다. 얼마 동안은 헨리의 눈에 뜨일 일이 없었다. 하지만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궁정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짱이었다. 결국 어떤 멋진 젊은 킹카와 약혼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 여우보다 더 교활한 월시 추기경(Cardinal Wolsey)이 등장한 것은 이때였다 (Wolsey라는 단어는 여우라는 의미도 있음). 싱그러운 어떤 귀족 청년과 앤과의 결혼을 중지시킨 사람이다. 아마 헨리의 지시에 따라 앤의 결혼 약속을 파기시켰던 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고려 이전의 태봉국 황제라는 궁예와 연화 아가씨의 결혼이 생각난다. 종간이라는 궁예의 최측근이 궁예가 승려였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에게는 황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왕건과 연화가 정혼한 사이라는 것을 없던 일로 하고 연화를 궁예와 결혼시킨 사례이다.]
앤 볼린과 헨리 8세의 만남
앤에게는 언니가 있었다. 메리였다. 아마도 어떻게 하면 왕실에 가까이 다가 갈수 있을까하는 부모들의 욕심 때문에 헨리의 정부(情婦)가 된 사람이다. 왕비 캐서린을 거들떠보지도 않은지 벌써 몇 해째였던 헨리로서 두어군데에 숨겨놓은 정부가 없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앤의 언니 메리였단 말인가?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앤의 언니 메리가 헨리의 정부였던 덕분에 아버지 토마스(Thomas)는 하루아침에 귀족의 반열에 정식 출사하는 신분이 되었다. 메리의 베게 송사가 효력을 발생했다는 주변 얘기였다. 다 아는 대로 앤의 아버지는 장사치였다가 벼락 귀족이 된 기회주의자였고 어머니는 귀족 친척 덕분에 귀부인 행세를 하는 꼴불견이었으며 언니는 국왕의 숨겨진 정부, 그리고 오빠도 있었지만 역시 권력에 아부하는 쓸개 빠진 인간...이러한 가정에서 어떻게 앤 같은 여자가 태어나 고집불통에다가 안하무인격인 헨리에게 대항하여 그의 마음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헨리로 말하자면 어릴 적부터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이 자랐고 떼를 쓰면 안 되는 일이 없지 않았던가? 그런 헨리인데 앤에게는 꼼짝 못했다.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려야 했고 참으라고 해면 참아야 했다. 앤의 주장은 줄기찼다. 자기와 결혼하려면 캐서린 왕비와 이혼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헨리로서는 무슨 수를 쓰던지 이혼을 성사시켜야 했다. 헨리는 앤과의 결혼을 위해 무려 6년이란 세월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그렇게 기다린 데에는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다. 물론 헨리도 앤과 하루라도 속히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뒤를 이을 왕자를 얻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왕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결혼도 하고 아들도 얻어야 했다. 이것이 지상과제였다. 이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여자와 비공식적으로 야합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사생아의 출현뿐이다. 만일 국왕이 법적 후계자가 없이 사정상 요단강을 건너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서자도 아닌 사생아를 국왕에 오르도록 할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고 선 이혼, 후 결혼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앤과의 결혼은 합법적이고 정상적이어야 한다. 실제로 헨리는 캐서린과의 이혼이 그렇게 끈질기도록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그건 그렇고 과연 앤이 얼마나 매력적이기에 헨리가 그토록 안절부절 했을까?
앤에 대한 기록을 보면 앤을 별로 매력적으로 좋게 써놓은 것이 별로 없다. 어찌된 일일까? 짧은 생애를 살았던데 비하여 시기하고 질투하는 적이 상당히 있었다. 그 중에서도 캐서린을 추종하는 세력이 앤을 적으로 삼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앤은 헨리의 말을 자주 무시했다. 헨리는 무시를 당할 때마다 앤에게 어찌하지는 못하고 대신 주위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주위 사람들은 앤을 원망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무슨 일을 기록으로 남겨 놓아야 할때 그런 사람들이 앤에 대하여 좋게 기록할 리가 만무했다. 앤에 대한 당시의 기록이 사실인지 또는 미워하는 나머지 왜곡해서 써 놓았던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젊은 시절의 앤 볼레인
현재 남아있는 앤의 초상화를 보면 별로 매력적인 여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주부와 같은 모습이다. 앤이 30세쯤 되었을 때 초상화를 그린 어느 화가는 앤에 대하여 ‘그다지 아름답고 매력 있는 여인이 아니었다. 보통 키에 건강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얼굴은 가무잡잡한 편이었고 목은 길었다. 입은 큰 편이었으나 가슴은 그다지 솟아오른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검은 눈은 아름다웠다’ 라고 말했다. 그 화가가 앤을 좋아해서 그렇게 말했는지, 또는 싫어해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매력적이기는 했는지 헨리도 ‘완전히 마녀에게 당한 느낌이다’라고 불평을 털어 놓았다고 한다. 마녀에게 당했다고 하면 그건 바꾸어 말하여 앤이 그만큼 매력적이며 한편으로는 사악한 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34세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늙은 모습의 앤 볼레인 왕비의 공식 초상화
영국 역사를 바꾸어 놓은 저 유명한 ‘왕의 중대사건’(King's Great Matter)은 1527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 헨리가 46세 때였고 앤이 25세 때였다. 캐서린을 법적인 왕비가 아니며 헨리와는 부부사이가 아니라는 선언을 한 것이 이 사건이었다. 헨리는 이 사건을 시작하면서 앤을 앞에 나서게 하지는 않았다. 그저 뒤편에 숨겨 있었다. 헨리의 사려 깊은 배려 때문이었다. 앞으로 자기와 결혼할 예비 신부 앤을 공식 석상에 자꾸 내세우게 되면 저 여자 때문에 이런 사건이 시작되었다고 오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캐서린은 헨리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고 있던 터였다. 그러한 형편에서 나이도 어린 앤을 마치 다음 왕비로 확정이나 한 듯 앞에 내세우면 반감을 살 수 있었고 생각했던 것이다.
3년쯤 지나서 앤은 궁정의 공식 행사에 종종 참석해서 귀족이나 외국 사절들로부터 마치 왕비와 같은 예우를 받기 시작했다. 한편 캐서린은 궁정에서 떠나 다른 곳에서 지내도록 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앤이 당연히 궁정의 안주인으로서 행세하기 시작했다. 앤의 운명은 1532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1532년 앤은 독자적인 귀족 칭호를 받게 되었다. Machioness of Pembroke라는 칭호였다. 얼마 후 앤은 헨리와 함께 프랑스를 공식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 궁정은 앤에게 왕비에 대한 예의로 환영하기를 거부하였다. 프랑스 궁정의 귀부인들은 앤을 눈을 내려 깔고 보았다. 헨리의 인내심은 이제 한계에 도달하였다. 드디어 헨리는 캐서린과 자기가 한 번도 법적인 부부관계가 아니었음을 공표하였다. 이 말은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조차 영국왕실의 공주로서 그 위치를 지워버리려는 뜻이었다. 그 공표이후 헨리는 앤과 결혼하였다. 1532년이었다.
헨리와 앤의 결혼에 대하여는 이상한 미스테리가 많았다. 누가 주례를 했는지, 어디서 예식을 올렸는지, 누가 증인으로 참예하였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토마스 크란머(Thomas Cranmer)까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크란머는 1533년 앤의 결혼을 유효하다고 공표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사람이 놀랍게도 몇주후에는 서한을 통해서 이들이 언제 결혼했는지 알지 못한다고 공식 발표하였으니 이 두 사람의 결혼은 정말 미스테리에 쌓인 것이 아닐 수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1533년에 앤이 이미 gps리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두 사람은 법적으로 정식 부부임이 선포되어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왕위를 계승하게 될지도 모르는 그 아이가 사생아가 될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의 중대 사건’을 서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영화 '천일의 앤'에서 앤 볼레인(즈느비에브 부욜드)과 헨리 8세(리챠스 버튼)
1533년 1월 크란머는 캔터베리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2월에는 교황이 그의 임명을 추인해 주었다. 3월에는 교구장에 봉헌되는 예식이 성대하게 있었다. 그 즈음에 영국의 의회는 ‘상소억제 법’(Act of Restraint of Appeals)을 통과시켰다. 교황이 영국에서의 결혼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거부도 할수 없도록 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5월에 크란머는 헨리의 첫 결혼이 무효이며 두 번째 결혼이 효력이 있다는 선언을 했다. 6월 1일, 이제는 공공연히 헨리의 부인으로 행세하는 앤이 왕비로서의 대관식을 가졌다. 이제 남은 것은 앤이 임신한 아기의 출산을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헨리로서는 당연히 남자 아이, 즉 왕자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었고 앤의 승리는 완전한 것 같았다.
그로부터 석달 후인 9월 7일, 앤은 딸아이를 출산했다. 아무도 이 아이가 나중에 저 유명한 엘리자베스(Elizabeth)여왕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왕위 계승자에 대한 헨리의 미친 듯한 무조건적인 기대와 그로부터 야기되는 파란만장의 사태는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처음에 헨리는 별로 실망하지 않은 듯 행동했다. 아니 오히려 그 실망감을 감추고 지냈다.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중에 헨리는 앤에게 대하여 점점 피곤하게 느끼고 있었다. 불같은 성격의 헨리, 고집이 센 앤, 그리고 상당한 나이 차이....두 사람은 성격적으로도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나이 차이도 큰 문제였다. 과거 수년 동안 연상의 여인과 부부로서 지냈던 헨리에게 너무 젊은 부인은 큰 부담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피곤한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들뿐이었다. 그러나 1536년 1월, 캐서린이 비운의 삶은 마감하고 세상을 떠난 지 바로 몇 주후에 앤은 아들을 유산하는 가슴 아픈 일을 당하였다. 헨리로서는 두 번째 결혼이 첫 번째 결혼보다 더 나은 것이 없었다. 아마도 두 사람의 결혼에 신의 저주가 던져졌는지도 모른다. 헨리의 정부(情婦)는 앤의 친 언니인 매리(Mary)였다. 정부의 여동생과 결혼한 것과 형의 미망인과 결혼한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모두 죄악의 아니겠는가? 캐서린이 이미 세상을 떠난 마당에 헨리의 마음을 괴롭히는 하나의 죄의식은 앤과의 결혼이었다. 앤과의 결혼이 불법이라고 한다면 헨리로서는 다음 결혼을 할수 있는 것이 아닌가? 헨리로서는 완벽하게 정상적이며 의심할 나위 없이 유효한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앤 볼린이 감금되었다가 처형된 런던 타워
그런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토록 정열을 다해 사랑한다고 난리를 쳤던 앤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앤에게 대하여 지겹게 생각하고 있던 헨리로서 그런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앤을 처형해 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왕비로서의 자격을 박탈하는 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헨리는 두 가지 모두를 택하였던 것이다. 앤의 오빠와 궁정에 있던 젊은이 4명이 앤과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너무 친밀하게 지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도 추가되었다. 고문에 못 이겨 체포된 사람 중에 어떤 젊은이가 앤과 불륜의 관계에 있었다고 거짓 자백을 하였다. 왕비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궁중 가수였다. 1536년 5월의 어느 날 아침, 나무마다 파란 새싹이 돋아나고 있는 때에 앤은 어두운 런던 타워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앤에게 뒤집혀 씌운 죄목은 자비를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앤이 처형되기 이틀 전에 앤과 헨리의 결혼은 무효로 선언되었다. 이제 헨리는 다시 한 번 미혼이 되었다. 시퍼런 도끼날에 머리가 잘려나간 앤의 몸은 런던 타워의 한 쪽 뜰에 아무런 격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그로부터 열흘 후 헨리는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앤 볼린 왕비의 시녀인 제인 세이무어와 결혼하였다.
대관식때의 엘리자베스 여왕. 25세에 여왕이 되어 45년간 영국을 통치하였음. 결혼을 하지 않아 '처녀여왕'(Virgin Queen)이라고 불렸음. 미국 버지니아주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기려서 붙인 명칭임.
앤 볼린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던 열가지 사항
앤 볼린은 영국 튜도 왕조의 헨리 8세의 여섯 왕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어째서 유명하였는가? 말할 나위도 없이 앤 때문에 영국의 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하여 앵글리칸 처치(성공회)로서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있다. 앤의 유일한 딸인 엘리자베스가 훗날 엘리자베스 1세로서 영국의 여왕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비록 앤은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지만 그의 딸은 영국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군주 중의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1536년 5월 19일에 프랑스인 사형집행인에 의해 처형된 앤 볼린은 왕비의 신분인데도 불구하고 간통과 근친상간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결국 사형을 당했다. 그런데 앤은 사형집행인의 시퍼런 도끼날에 목이 잘려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땀이 너무 나는 발한증으로 어차피 숨을 거둘 운명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래서 사형집행은 형식적이었다는 것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 한가지 에피소드만 보더라도 우리가 앤 볼린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사항들이 많다는 것을 짐작케 해 준다. 또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앤 볼린이 죽은 후 헨리 8세가 세번째로 결혼한 여인은 제인 세이무어라는 여인인데 제인 세이무어는 앤 볼린의 시녀였다는 것이다. 그것까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겠지만 실은 제인 세이무어가 앤 볼린의 6촌 동생(second cousin)이었다는 것이다. 즉 앤의 어머니의 사촌의 딸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앤 볼린에 대하여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열가지 사항을 살펴본다.
1. 앤 볼린은 귀족가문 출신이어서 왕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지만 사실상 그의 선조는 농부였고 증조 할아버지는 모자 만드는 장인이었다. 앤이 헨리 8세와 결혼할 당시에 앤의 아버지 토마스 볼린은 1대 윌트셔 경(1st Earl of Wiltshire) 겸 오르몬드 경(Earl of Ormond)이라는 귀족 호칭을 가지고 있었다. 오르몬드 경이라는 타이틀은 아일랜드 정부에 기여한 바가 컸기 때문에 주어진 호칭이었다. 앤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하워드는 레이디(Lady)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디는 남자에게 주는 써(Sir))라는 호칭에 대응하는 것이다. 앤의 친정 아버지는 헨리 7세의 총신으로 외교관이었던 토마스 하워드으로 2대 노포크 공작(2nd Duke of Norfolk)라는 호칭의 귀족이었다. 그러므로 앤의 부모만 보아서는 영국에서도 알아주는 귀족가문 출신들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상 토마스 볼린의 선조는 노포크의 서민 출신이었다. 예를 들어 앤의 고조 할아버지는 노포크 영주의 땅에서 소작을 하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농사에 필요한 물은 비록 영주의 소유였지만 값을 치루지 않고 사용할수 있었다. 앤의 증조 할아버지는 1430년대에 런던에서 모자를 만들어 팔았다. 장사가 잘되어 생활이 넉넉하게 되자 1435년에는 유명한 머서회사에 들어가서 그후로는 좀 더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몇년후 증조 할아버지는 런던 구역의 시장까지 지냈고 마침 그의 둘째 부인이 남작부인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덩달아서 귀족 행세를 할수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재산으로 노포크에 있는 블리클링 저택을 구매하여 살았고 그로부터 젠트리(Gentry: 귀족과 향사 사이의 계급)로서 행세를 하며 지냈다.
함께 사냥을 나간 헨리 8세와 앤 볼린
2. 앤은 성 토마스 아 베케트와 인척관계였다. 성 토마스 아 베케트(St Thomas à Becket: 1120-1170)는 1162년부터 세상 떠날 때까지 영국교회(당시는 로마 가톨릭)의 본산인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다. 헨리 2세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헨리 2세는 토마스를 대주교로 삼으면 왕실에 대한 교회의 비판을 막아 줄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토마스 대주교는 교회 편에 섰다. 그래서 헨리 2세와 교회의 권리 및 특권에 대한 이견으로 날카로운 대립관계를 가졌다. 헨리 2세는 왕권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해서 토마스 대주교를 눈에 가시처럼 여겼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1170년 12월 29일에 4명의 자객을 보내어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던 토마스 대주교를 암살하였다. 그후 바티칸의 알렉산더 3세 교황은 토마스 대주교를 순교자로서 성자로 시성하였다. 훗날 영국 성공회도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토마스 대주교의 호칭은 '캔터베리의 성 토마스', 또는 '런던의 토마스'로 불려지다가 근자에는 '베케트의 성 토마스'라는 호칭으로 정착되었다. 앤은 영국 교회의 종교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실상 영국 가톨릭 교회의 성인이며 순교자인 성토마스와 먼 친척관계가 된다는 것은 의미 깊은 일이 아닐수 없다. 앤의 증조부로서 7대 오르몬드 경인 토마스 버틀러는 런던의 성 토마스 교회에 묘소를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그만큼 토마스 아 베케트를 존경하였다. 토마스 버틀러는 순금으로 장식한 상아 술잔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더할수 없는 가보였다. 토마스 대주교가 사용하던 술잔이라고 한다. 앤의 증조 할아버지인 토마스 버틀러는 이 술잔을 손자인 토마스 볼린, 즉 앤의 아버지에게 물려주면서 대대로 볼린 가문에서 간직해 달라고 부탁했다.
헨리 2세가 자객들을 보내어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는 토마스 베케트를 살해하는 장면. T. S. 엘리엇은 1935년에 '대성당의 살인'(Murder in the Cathedral)을 발표했고 그후 이 내용으로 여러번 영화가 만들어졌다.
3. 앤은 아일랜드 사촌인 제임스 버틀러와 결혼할뻔 했다. 1522년, 갓 스므살의 사랑스런 아가씨인 앤은 프랑스 궁정에서 지내다가 영국으로 돌아왔다. 혼담이 들어오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는 중에 사촌인 아일랜드의 제임스 버틀러와 이상한 관계로 결혼할 뻔했다. 앤의 아버지인 토마스 볼린과 제임스의 아버지인 피어스 버틀러는 오르몬드의 작위를 두고 서로 자기가 적법한 상속자라고 주장했다. 오르몬드 경이라는 작위는 앤의 증조부친 토마스 버틀러가 처음 받은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다투게 되자 앤의 삼촌인 서리 경(Earl of Surry)가 중재에 나섰다. 앤과 제임스를 결혼시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볼린 측에서는 결혼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없던 일이 되었다. 얼마후 오르몬드 작위에 대한 두 집안 간의 다툼은 그때 앤과 가깝게 지내기 시작한 헨리 8세가 앤 측의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앤의 아버지인 토마스 볼린 경이 오르몬드 경의 작위를 무난히 유지하게 되었다. 대신에 피어스 버틀러에게는 오소리 경(Earl of Ossory)이라는 새로운 작위를 주었다.
4. 앤은 또한 헨리 퍼시와도 결혼할 뻔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앤은 헨리는 우연하게도 헨리 8세의 첫번째 부인인 캐서린 왕비에게 봉사하는 그룹에 참여하게 되었다. 왕비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시녀는 아니었지만 필요시마다 궁정의 귀부인으로서 왕비를 모시는 일을 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헨리 퍼시라는 청년을 알게 되었다. 노섬벌랜드 경(Earl of Northumberland)의 상속자로서 궁정에서 인기가 많은 청년이었다. 헨리 퍼시는 앤이 궁정에 들어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앤과 은밀히 만나기를 반복하였다. 두 사람은 어느덧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헨리 퍼시의 친구로서 월시 추기경에게 봉사하고 있는 윌렴 케이븐디쉬는 두 사람이 결혼까지 약속했다고 말했다. 세상에 비밀은 없으며 더구나 한정된 공간인 궁정에서 말들을 좋아하는 사람들 틈에서는 비밀연애가 있을수 없었다. 헨리 퍼시의 아버지인 노섬벌랜드 경과 막역한 사이인 월시 추기경도 앤과 헨리 퍼시의 연애사건을 알게 되었다. 월시 추기경은 헨리를 불러다가 호되게 꾸짖고 헨리 퍼시를 그의 아버지에게 돌려 보냈다. 결국 앤과 헨리 퍼시는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없던 일이 되었다.
5. 앤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하워드도 헨리 8세의 정부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헨리 8세는 알아주는 여성편력가였다. 세상에서 한다하는 사람으로 부인을 여섯 명이나 두었고 게다가 정부 및 숨겨놓은 애인도 여러 명이었던 사람이 있으면 헨리 8세를 제쳐두고 한번 나와 보라고 하고 싶다. 헨리 8세가 앤의 언니인 메리(1449-1543)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메리는 헨리 8세의 두 아이까지 두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무튼 메리 볼린은 헨리 8세가 앤 볼린을 만나서 뜨거워지기 전부터 이미 헨리 8세의 정부였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뜬금없이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던 일이 있다. 메리와 앤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하워드도 헨리 8세의 정부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앤은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하워드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괴상한 소문도 있었다. 그런 소문은 런던에서 금세공업자로 잘 알려진 사람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아마다스란 여인이 1533년에 공공연히 발설한 것이어서 오히려 허튼 소리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그 부인은 사람들에게 '토마스 볼린이란 작자는 와이프와 두 딸들을 모두 헨리 8세에게 바친 포주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헨리 8세의 친구 겸 가신인 조지 스로크모턴 경이란 사람은 어느때 헨리 8세의 면전에서 그에게 '폐하, 폐하는 어머니와 딸을 가지고 놀았더군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헨리 8세는 안색을 바꾸면서 '아냐. 어머니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점잖은 스로크모턴 경이 농담으로 빈말 삼아 왕에게 그렇게 말했을 리는 없으므로 헨리 8세가 앤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하워드와 모종의 뜨거운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짐작할수 있다. 그 당시에는 그런 소문이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해서 수그러졌는데 얼마후에 런던에 있는 예수회 성직자인 니콜라스 산더라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보시오, 엘리자베스 하워드는 헨리 8세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딸인 앤 볼린은 헨리 8세보다 10여년이나 어렸습니다. 앤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맞는 것 같습니다'라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별 얘기도 다 있다.
앤의 언니인 메리 볼린. 헨리 8세의 정부로서 두 아이까지 낳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6. 앤은 발한증으로 거의 죽을뻔 한 일이 있다. 발한증은 한마디로 땀이 지나치게 많이 나는 증상이다. 일반적으로 인플루엔자 때문에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앤이 왕비로 있을 때에 궁정에 인플루엔자가 크게 유행한 일이 있었다. 하두 독감이 심해서 노약자는 물론이지만 젊은 사람, 튼튼한 사람들도 맥 없이 쓰러졌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인 뒤 블레이 추기경은 인플루엔자로 죽은 사람들을 보고 '감기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쉽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까지 말했다. 1528년 6월에 앤 왕비의 시녀 중의 한 사람이 발한증으로 고생하는 일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안 헨리 8세는 왕비의 거처에 왕래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12 마일이나 떨어진 곳으로 피신 아닌 피신을 했다. 그때 앤은 잠시 친정에 가서 있었다. 그런데 앤은 물론이고 앤의 아버지인 토마스 경도 인플루엔자에 걸렸다. 그 소식을 들은 헨리는 왕실 주치의를 보내 돌보도록 했지만 앤의 발한증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앤과 친정 아버지인 토마스 경은 살아났지만 앤의 처형, 즉 메리의 남편인 윌렴 캐리는 인플루엔자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궁정 사람들도 몇 명이나 희생되었다. 앤은 이때 정말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으나 요행히 살아 남았던 것이다.
7. 앤 왕비 이외에도 앤 볼린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더 있었다. 앤이라는 이름은 볼린 가에서 흔한 이름이었다. 앤의 증조할머니가 볼린 가에서는 첫번째 앤 볼린이었다. 앤의 숙모에도 앤 볼린이 있었다. 존 셀턴 경과 결혼하여 앤 셀턴(레이디 셀턴)이 되었다. 앤 셀턴은 앤 왕비의 딸인 엘리자베스의 보모격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 공주의 사촌 언니가 되는 메리 공주를 돌보는 사람 중의 하나라도 임명되었다. 메리 공주는 앤 볼린과 헨리 8세의 결혼을 기본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사연 때문인지 1534년에 앤 왕비는 레이디 셀턴에게 서한을 보내어서 메리를 호칭할 때에 더 이상 공주라고 부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만일 메리가 고집을 부리며 말을 듣지 않으면 뺨을 때려도 좋다고 덧 붙였다. 레이디 셀턴은 메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들이 앤 왕비의 사주를 받아서 독을 먹인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것 같아서 두려운 중에 지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레이디 셀턴은 메리 공주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8. 제인 세이무어는 앤의 6촌이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앤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하워드는 제인의 어머니인 마저리 웬트워스와 4촌간이었다. 그러므로 앤과 제인은 6촌간이었다. 제인은 앤 왕비의 시녀였다. 그러다가 아들을 낳지 못해서 앤에게 싫증이 난 헨리 8세는 반반하게 생긴 앤의 시녀인 제인에게 눈길을 주게 되었고 급기야는 제인과 결혼하고 싶어서 앤에게 불륜이니 무어니 하는 죄명을 뒤입어 씌워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그런 기막힌 사이인데 실은 6촌간이었으니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앤의 어머니와 제인의 어머니는 요크셔어에 있는 저택에서 함께 지내며 자랐다. 앤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하워드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타일니가 이들의 가정교사였다. 앤의 어머니와 제인의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낸 사이이고 친척간이었지만 앤 왕비와 제인 세이무어가 소녀시절부터 서로 가깝게 지냈다는 기록은 없다.
헨리 8세와 제인 세이무어, 에드워드 왕자
9. 앤이 제인과 다투기 시작한 것은 1536년 초반부터였다. 그러다가 앤은 그해 5월에 죽임을 당하였다. 앤이 헨리 8세와 제인과의 관계를 알게 된 것은 1536년 초였다. 어떻게 알았느냐면 제인이 목에 걸고 있는 펜단트 때문이었다. 제인은 앤이 헨리로부터 결혼 전에 선물로 받은 펜단트와 똑 같은 펜단트를 하고 있었다. 펜단트의 안에는 대체로 연인의 작은 초상화를 넣기 마련이다. 그러지 않아도 제인에 대하여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앤은 제인의 펜단트를 보자 이상한 예감에 어디 좀 보자고 말했다. 그러나 제인은 한사코 보여주기를 거부하였다. 화가 난 앤은 제인의 목에서 펜단트를 낚아 챘다. 그리고 펜단트를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핸리의 작은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제인의 목에는 상처가 났고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헨리는 앤을 정말 가만두어서는 안되는 여자라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 후로 앤과 제인은 날카로운 말다툼을 시도 때도 없이 벌였다고 한다.
처형 직전에 시녀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앤
10. 앤은 체포된 후에 자기도 모르게 말을 잘못해서 여러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프란시스 웨스턴 경이었다. 앤은 헨리의 덫에 걸려서 1536년 5월 2일에 간통 및 근친상간죄로 체포되어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그 이틀 전인 4월 30일에는 앤에게 봉사하는 음악가인 마크 스미튼이 왕비와 간통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앤은 설마 헨리가 자기에게 말도 안되는 죄목을 뒤집어 씌어서 체포까지 할 줄은 생각 못했다. 그래서 감옥에 갇히게 되자 일종의 히스테리 겸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혼자서 중얼거리거나 고함을 치기도 했다. 얼마나 억울하면 그랬을지 상상이 된다. 그런데 앤은 감옥에서 혼자 중얼거리면서 마크 스미튼과 나누었던 얘기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과 지냈던 일도 무의식 중에 내뱉었다. 그 이름 중에는 헨리 노리스라는 청년도 들어 있었다. 런던 탑의 간수장은 앤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엿들어서 모두 기록하고 곧바로 헨리에게 보고하였다. 앤이 거명한 사람들이 당장 체포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앤이 또 하나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 중에는 프란시스 웨스턴 경에 대한 것이 있었다. 앤은 호감있는 신사로서 궁정에서 인기가 많았던 웨스턴이 자기에게 사랑을 고백했다는 내용의 말을 중얼거렸고 그것이 헨리에세 보고되었다. 프란스시 웨스턴 경은 처음 앤에게 간통죄 및 근친상간죄를 뒤집어 씌울 때에 조사대상자의 리스트에 들어가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앤이 중얼거리는 바람에 웨스턴 경과 다른 네 사람이 체포되어서 앤이 사형에 처해지기 이틀 전인 5월 17일에 모두 처형되었다.
앤의 처형. 전통적으로 참수에는 도끼를 사용했으나 앤의 경우에는 칼을 사용했다. 앤이 프랑스에서 지내서 프랑스 관습을 잘 알고 있을 것이므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귀족들을 처형할 때에 도끼를 사용하지 않고 칼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앤은 죽기 전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형집행인이 아주 기술이 좋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나저나 나는 목이 가늘어서 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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