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헨리 8세의 왕비들

6. 캐서린 파르

정준극 2010. 2. 9. 02:01

여섯 번째 부인 캐서린 파르(Catherine Parr)

1512년 출생. 31세 때에 헨리와 결혼. 헨리와는 30년 차이. 36세로 세상을 떠남.

 

캐서린 파르


헨리의 여섯 번째 부인이자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르. 헨리는 지금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왕비를 맞이하였다. 젊은 아가씨 위주로 결혼했던 헨리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 번이나 결혼했던 경력이 있는 31세의 여인이었다. 캐서린 파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는 아직까지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시대에는 대체로 왕실의 먼 친척 아이들에 대한 기록이 정확치 않았기 때문이다. 캐서린의 아버지 토마스 파르(Thomas Parr)는 헨리7세로부터 지금의 왕인 헨리8세에 이르기까지 왕실에 봉사한 귀족이다. 지방에 큰 영지를 갖고 있는 훌륭한 귀족이었다. 왕족 감독관이라는 직책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캐서린의 아버지는 캐서린이 겨우 다섯 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재가를 하지 않았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젊은 자기를 희생하였다. 그러한 어머니 아래에서 캐서린은 엄한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귀족으로서의 교양을 쌓아왔다. 부친 토마스의 공로 때문인지 캐서린의 오빠 윌렴(William)은 왕실로부터 각별한 인정을 받았다. 나중에는 ‘노던앰프턴 후작’(Marquess of Northernampton)이라는 별도의 귀족 칭호를 받기까지 했다. 아버지의 후광, 오빠의 역할 등등으로 캐서린은 궁정 출입을 자유로 할수 있었다.


캐서린은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에 정통하였으며 다른 학문에 대하여도 지식의 정도가 매우 높았다. 궁정의 학식과 교양이 높은 몇몇 귀부인들은 자연스럽게 캐서린 주위에 몰리게 되었다. 캐서린은 당대의 학자들과 논쟁을 펼칠 수 있을 정도였다. 캐서린은 아직 10대 때에 에드워드 버로우(Edward Burough)경 이라는 귀족과 결혼한 일이 있다.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캐서린은 17세 때에 미망인이 되었다. 그 시점에 즈음에서 캐서린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아무도 없게 된 미망인 캐서린은 얼마 후, 요크셔의 이름난 지주인 존 네빌(John Nevill)경과 결혼하였다. 존 네빌경은 나이가 많았다. 그러던중 캐서린이 24세가 되던 해에 북쪽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남편인 존 네빌경은 반란군 지도자중 한 사람이 되었다. 본심은 그렇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반란군에 가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란군의 손에 집이 불타고 캐서린을 비롯한 가족들이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반란은 진압되었고 존 네빌경은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서 체포되었다. 하지만 국가에 대한 공로와 어쩔수 없이 반란에 참여했던 점이 참작되어 사면되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캐서린의 남편 존 네빌은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존 네빌과 캐서린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다시 미망인이 되었지만 궁정에서는 오히려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캐서린의 높은 교양과 학식을 존경하였다. 캐서린은 성품이 온화하였고 자비심도 많았다. 당시 궁정에서는 귀족 들 간에 권력 암투가 치열하였지만 캐서린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다만 인품으로서 사람들을 대하였다. 캐서린은 가톨릭 보다는 신교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종교에 대한 문제는 언제나 신중해야 하기 때문에 헨리 치하에서 자기의 종교관을 절대로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그 판단은 현명하였다.


헨리가 언제 캐서린 파르에게 구혼하였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모른다. 다만 캐서린 하워드가 처형당한 후 약 1년 반 정도 지나서 결혼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헨리와 캐서린은 1543년 7월 12일 결혼하였다. 실상 헨리는 캐서린 하워드와 작별을 고한 후 다시 결혼하는데 대하여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인생을 살다보니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아무튼 국가에 국모가 없으면 안 된다는 주위의 적극 권유로 인하여 캐서린과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헨리에게는 옛날처럼 자식에 대한 욕심이라든지 정열적인 연애 감정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사뭇 안정된 모습이었다. 캐서린은 왕비라기보다는 간호원이었다. 나이가 많은 헨리를 옆에서 극진하게 돌보아 주었다. 캐서린은 어떻게 해야 헨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가슴 속에 응어리진 분노를 삭여 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얼굴에 웃음을 띠게 할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육신의 고통을 덜어 줄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캐서린은 왕실 가족문제에 대하여도 슬기롭게 처신하였다. 잘 아는 대로 왕실의 직계 가족으로서는 첫 번째 왕비 캐서린에게서 태어난 메리 공부, 두 번째 왕비 앤 볼레인에게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공주, 그리고 세 번째 왕비 제인 세이무어에게서 태어난 에드워드 왕자가 있다. 이들 사이에 반목하는 감정을 가지지 않게 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어 지내도록 한 것이 캐서린 파르였다. 캐서린은 특히 메리 공주와 엘리자베스 공주가 헨리와 화해토록 하는 역할을 했고 다음 왕위 계승자인 에드워드 왕자의 교육에도 앞장서서 헌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네 번째 왕비였다가 ‘왕의 누이동생’이라는 명칭으로 신분이 바뀐 ‘클레브스의 앤’에게도 다정하게 대접하여 언제라도 왕궁을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캐서린의 이같은 헌신 뒤에는 남모르는 고통도 있었다.

 

 캐서린 파르의 석관


캐서린의 헨리의 청혼을 받기 얼마 전에 캐서린은 헨리의 세 번째 부인인 제인 세이무어의 오빠인 토마스라는 귀족과 결혼 얘기가 있었다. 헨리가 청혼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토마스와 결혼할 처지였다. 토마스는 에드워드 왕자의 삼촌이기도 했다. 어떤 연유로 두 사람이 결혼까지 약속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헨리의 청혼을 받은 캐서린은 왕의 청혼을 뿌리칠 수가 없어서 헨리쪽을 택하였다. 하지만 비록 캐서린의 몸은 헨리에게 가서 있었지만 마음만은 토마스 쪽에 가서 있었던 것 같다. 헨리가 결혼 4년만에 세상을 떠나자 캐서린은 통산 세 번째 미망인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기록이 밥 먹여 주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자유의 몸이 된 캐서린은 옛 애인을 잊지 못하여 남편 헨리의 장례식을 치룬 얼마 후에 토마스와 비밀리에 결혼하였다. 캐서린은 토마스와의 결혼 1년후 출산에 따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나저나 헨리는 캐서린으로부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그래서 캐서린을 무척이나 위했다. 헨리는 캐서린과의 결혼 생활 3년 동안 자식이 없었지만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처형한 두 번째 왕비 앤 볼레인의 경우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 준다. 헨리는 캐서린이 두 번 결혼한 일이 있었으나 자식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캐서린 쪽에 문제가 있어서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생각하여서 아예 자식 가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헨리에게는 이미 아들 한명과 딸 두명이 있다. 그것으로 만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캐서린은 헨리 사후 헨리의 세번째 왕비인 제인 세이무어의 오빠인 토마스와 결혼하고 나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나이 들어서 출산하였기 때문에 고생이 심했고 그로 인하여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만 불임여성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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