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나스 요셉 플레이옐(Ignace Joseph Pleyel)
하이든의 수제자,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활동
이그나스 요셉 플레이옐
이그나스 요셉 플레이옐은 1757년 남부 오스트리아의 루퍼스탈(Ruppersthal)에서 태어나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서 1831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파리의 페레 라세즈(Pere Lachaise)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플레이옐은 루퍼스탈에서 학교 교장인 마르틴 플레이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재혼을 세 번이나 하여 모두 38명의 자녀를 둔 중에 플레이옐은 24번째였다. 플레이옐은 1772년부터 아이젠슈타트에 가서 요셉 하이든의 제자가 되었다. 플레이옐은 베토벤보다 13년 후에 태어났지만 하이든으로부터 함께 배웠다. 플레이옐은 베토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귀족의 후원을 받았다. 플레이옐의 경우에는 라디슬라우스 에르되디(1746-1786)백작이 후원자였다. 하이든은 플레이옐을 수제자로 간주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플레이옐이 하이든에게서 공부할 때에 습작으로 인형극오페라인 Die Fee Urgele(요정 우르겔레: 1776)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극장과 비엔나에서 공연되어 찬사를 받았다. 플레이옐은 하이든의 오페라 Das abgebrannte Haus(불에 탄 집)의 서곡을 대신 완성했다. 하이든의 문하생으로 있다가 졸업한 그가 처음으로 음악가로서 직장을 가진 것은 에르되디 백작가문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그는 작곡가로서, 연주자로서 사회의 문을 두드렸다. 첫 공식적인 작품은 여섯 편의 현악4중주곡으로 작품번호 1번이다. 1780년대 초반에 그는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오페라 Ifigenia in Aulide(아울리데의 이피게니아)를 작곡했다. 이밖에도 나폴리 왕이 의뢰를 받아 작곡을 했다.
1783년 플레이옐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오르가니스트로 초빙되어 갔다. 보수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서 프란츠 사버 리히터(Franz Xaver Richter)의 아래에서 부음악감독 겸 부지휘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은 풀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예산이 풍부했다. 그래서 연주에 전념할수 있었다. 이제 프랑스에 정착한 그는 이름도 Ignaz에서 프랑스식으로 Ignace로 바꾸었다. 그는 1793년까지 10년동안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종사하면서 어느 시기보다도 많은 작품을 썼다. 1789년 리히터가 세상을 떠나자 플레이옐은 대성당의 총음악감독 겸 정지휘자가 되었다. 1788년 플레이옐은 프랑수아 스트라스부르의 카펫상인의 딸인 가브리엘 레페브르와 결혼하였다. 이들은 네 자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인 카미유(Camille)는 나중에 마리아 모크(Maria Moke: 1811-1875)와 결혼하였다. 플레이옐의 큰 며느리인 마리아는 당대에서 가장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다.
플레이옐의 현악4중주곡 음반 커버
1791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후 교회는 물론 일반 대중을 위한 음악활동이 모두 폐지되었다. 플레이옐은 직장을 찾아서 런던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윌리엄 크라머(William Cramer)가 조직한 Professional Concerts의 피아니스트로 활동하였다. 플레이옐은 스승인 하이든과 본의 아니게 라이발이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하이든도 런던에서 콘서트 시리즈를 조직하여 연주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연주에 있어서는 라이벌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평생을 좋은 사제지간으로 지냈다. 플레이옐은 하이든과 마찬가지로 런던 활동으로 상당한 돈을 모을수 있었다. 플레이옐은 스트라스부르에 돌아와 커다란 저택을 마련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1793-94년간 공포정치가 실시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지내야 했다. 플로이옐도 이른바 공공안전위원회에 일곱 차례나 불려가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유는 그가 외국인으로서 최근 샤토(저택)를 산 배경이 무엇이며 스트라스부르 대성당과의 관계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심문을 받았다. 플레이옐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왕정파라는 낙인이 찍혔다. 당시 공공안전위원회는 내키는 대로 사람들을 감옥에 가둘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처형까지 할수 있었다. 하지만 낙천적인 그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플레이옐이 지휘자로 활동했던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플레이옐은 새로운 공화국을 위해 작곡했다. 공포시대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작곡한 작품들은 La Prise de Toulon(툴론의 함락: 피아노반주의 솔로와 3부 합창을 위한 곡), Hymne de Pleyel chante au Temple de la Raison(이성의 성전에서 부르는 찬송가), Hymne a l'Etre Supreme(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대한 찬송가), La Revolution du 10 aout(8월 10일 혁명: 솔로이스트, 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등이었다. 대부분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서 초연되었다. 공포의 정치 시대에도 성당만은 예외였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은 Temple de l'Etre Supreme(전지전능한 존재의 성전)이라고 불렀다. 플레이옐은 프랑스로 귀화하였다. 그는 공화국에 대한 충성과 훌륭한 작품 활동으로 스트라스부르에서 인정받는 음악가가 되었다. 그는 파리의 혁명세력을 위해서도 작곡했다. 예를 들면 Le Jugement de Paris(판토마임 발레곡)였다.
플레이옐이 태어난 남부오스트리아의 루퍼스탈에 있는 플레이옐기념관
플레이옐은 1795년에 파리로 거처를 옮기고 음악출판사 Maison Pleyel을 운영하였다. 하이든의 현악4중주곡 전곡을 출판한 것은 대표적인 업적이었다. 출판사는 39년동안 운영되었고 약 4천 작품을 출판하였다. 아돌프 아담, 루이지 보케리니, 베토벤, 무치오 클레멘티, 요한 밥티느스트 크라머, 요한 라디슬라우스 뒤세크, 요한 네포무크 훔멜, 조르즈 온스로브(Georges onslow)등의 작품이 플레이옐의 손에 의해 악보로 남게 되었다. 1805년 비엔나를 방문한 그는 모처럼 스승인 하이든을 만났고 베토벤이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하이든과의 만남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807년 플레이옐은 피아노 제작에 손을 대었다. Pleyel et Cie는 그의 아들인 카미유(1788-1855)가 계속 맡아 경영하였다. 프레데릭 쇼팽이 사용한 피아노는 플레이옐이 제작한 것이었다. Pleyel et Cie 회사는 Salle Pleyel(플레이옐홀)이라는 연주회장을 운영하였다. 쇼팽이 파리에서 첫 연주회를 가진 곳이 이곳이며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곳도 이곳이었다.
비엔나 남동부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 플레이옐이 하이든의 문하생으로서 활동한 곳이다.
1824년, 67세로 모든 사업에서 은퇴한 그는 파리 교외의 시골에 집을 마련하고 여생을 보냈다. 그는 1831년 74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파리의 페레 라세즈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플레이옐은 41편의 교향곡, 70편의 현악4중주곡, 상당수의 현악5중주곡, 오페라 들을 남겼다. 대부분 스트라스부르에서 지낼 때에 작곡한 것이다. 출판과 피아노 제작 사업을 감당할 때에는 거의 작곡을 하지 않았다. 최근 음악계는 브람스가 작곡한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하이든이 작곡한 것이 아니라 플레이옐이 작곡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플레이옐은 케루비니, 마이에르베르, 탈버그 등 처럼 생전에는 대단한 명성을 얻었지만 사후에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 케이스이다. Pleyel의 이름은 독일에서는 플라이얼이라고 발음하지만 프랑스에서는 플레이옐이라고 발음한다. 그는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제국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발음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가 태어난 남부오스트리아의 루퍼스탈의 그의 생가는 기념관으로 만들어졌다.
파리의 페레 라세즈 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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